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청 후기)

아편전쟁에서의 인도인

중은우시 2020. 7. 8. 15:58

글: 강홍군(姜洪軍)

 

"만일 추운계절이 되면, 그들 영국어르신들은 아예 다른 것은 심지 못하게 하고, 그들의 부하들이 집집마다 찾아가서 선금을 현금으로 지급하고, 계약을 체결하게 했다."

 

이 글은 인도작가 아미타프 고시(Amitav Ghosh)의 소설 <앵속해(罌粟海, Sea of Poppies)>(중문판은 인민문학출판사에서 출판했다)에 나온다.

 

그렇다면, 이들 '영국어르신'들이 가난한 인도농민에게 무엇을 심게 했단 말인가?

 

이 '물건'은 바로 근대 중국인에게 엄청난 고난을 가져다준 아편이다. 그리고 이 것을 마음대로 중국에 수출하게 하기 위하여, 영국인은 아편전쟁을 일으킨다. 이 전쟁을 둘러사고, 무수한 얘기들이 파생된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이 전쟁의 불가결한 제3자 즉 인도를 빠트리곤 한다. 인도는 영국인이 중국에서의 군사모험을 실현하게 만드는 중요한 후방기지였다. 도한 영국인에게 아편이라는 특수한 상품을 제공하는 생산기지였다.

 

인도농민은 영국상인에게 속아서 아편을 재배했다.

 

미국의 타임워너가 내놓은 <인류문명사도감>을 보면 "서방인은 중국의 고립국면을 타파하기 위한 무역근거지를 인도차대륙에 두었다. 거기에서, 동인도회사의 주도하에 수천수만헥타르의 비옥한 토지는 아편재배에 사용되었다. 아편은 일반적으로 11월에 파종하여, 3월에 익는다. 익는 계절이 되면 독성이 풍부한 아편즙이 구형의 과실에서 잘라진 틈으로 수집한다. 재배자는 그 후 거대한 창고로 운송한다."

 

인도는 영국인의 식민지가 된 시기를 거슬러 올라가면 1600년 12월 31일이다. 당시 영국여왕 엘리자베스1세는 영국동인도회사에 발급한 허가장에서 인도에서의 무역특권을 부여한다. 158년이후인 1758년, 영국동인도회사는 이미 초기의 무역회사가 아니었다. 면화, 비단, 인디고, 질산나트륨과 차(茶)등의 화물을 독점하는 대형업체가 된다. 그후 이 회사는 자신의 무장역량까지 보유하고, 무력을 빌어 일련의 전쟁을 일으키고, 점차 인도지배를 실현한다.

 

그 동안, 영국인은 앞에서 얘기한 것처럼 인도농민을 시켜 앵속을 심고, 아편으로 가공하여 중국으로 보낸다. 그렇게 큰 돈을 벌고 영국인은 다시 그 돈으로 계속 확장한다.

 

가난한 인도농민은 처음에 그것을 심으려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것을 재매하는 것은 아주 힘들기 때문ㄴ이다. 땅을 15번이나 갈아야 하고, 모든 흙덩어리를 호미로 깨트려야 했으며, 비료를 사서 뿌려야 하고, 계속하여 물을 공급해야 했다...이와 비교하면, 욕심이 없는 인도농민이 보리, 콩, 야채를 재배하면 훨씬 편하게 일할 수 있었다. 농민들에게 이 일을 하게 하기 위하여, 영국인들은 그레이트브리튼자본의 음험한 풍격을 보여준다.

 

고시는 <앵속해>에서 이렇게 썼다: "그들에게는 안된다고 말할 방법이 없었다. 마닐 그들이 거절하면 그들은 돈을 그들의 집에 놓아두거나, 창문으로 집어던진다. 그리고 때가되면 백인 관리는 네가 돈을 받지 않으려 해도 소용없다. 너의 손도장은 위조할 수 있다라고 말한다. 이들 백인관리는 모두 아편재배의 커미션을 받아먹고 있었다. 그래서 절대로 이들 농민들이 자기마음대로 하게 놔두지 않았다. 그리고 마지막에 농민이 버는 것은 3.5루피아를 넘지 않는다. 그 돈은 바로 그들이 선지급한 바로 그만큼의 돈이다."

 

고시의 이 글은 비록 소설이지만, 그의 작품은 아주 엄격하다. 예를 들어, 당시 선상의 지시에 쓰이는 용어와 해상에서의 용어를 확실하게 쓰기 위하여 그는 1882년에 런던에서 출판된 <인도선원실용사전. 혹은 영인항해술어 및 용어사전>을 자세히 연구하기까지 했다. 이 책을 쓰기 위하여, 그는 많은 학자와 역사학자들의 관련문헌도 섭렵했다. 그 중에는 작자가 1865년 캘커타에서 출판된 카즈푸르 아편공장의 매니저인 J. W. S. 맥아더가 쓴 <아편공장일기>도 자세히 연구했다.

 

여기에서 많은 노력을 들여 고시와 그의 책을 소개한 이유는 이것이 비록 문학작품이지만, 거기에서 반영하는 역사적 모습은 너무나 분명하기 때문이다.

 

당시, 영국인들은 그들의 선진기술을 가지고, 칼과 불로 독특한 문화발전궤도를 지니고 있던 인도인의 사회기초를 파괴한다. 그리고 현지인들은 영국의 이익을 위하여 일하도록 만든다. 영국인은 현지의 농업생태시스템을 파괴시켰고, 아편공장은 앵속에 대한 수요가 넘쳤다. 현지의 가난한 농민들이 다른 양식을 심을 면적은 갈수록 줄어들었다.

 

영국을 위하여 아편을 만든 인도인은 개미와 같았다.

 

"바로 그때 그중의 한 (젊은이)가 부주의해서 아편구(球)를 떨어뜨려, 직접 땅바닥에 부닥친다. 깨지면서 안에서 즙이 흘러나와 바닥을 온통 적신다. 손에 채찍을 든 감독관이 몰려와서 이 운나쁜 젊은이를 마구 때리기 시작한다. 이 젊은이는 비명을 질렀고, 처연한 울부짖음은 이 텅비고 차가운 건물안에서 맴돌았다."

 

이는 고시가 자신의 작품에서 묘사한 내용이다. <인류문명사도감>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거기에서 수많은 인도노동자들이 구리잔으로 교질의 아편을 1킬로그램 정도의 구(球)로 만든다. 그후 노동자들은 다시 아편잎으로 이를 둥글게 싼다. 그후 널판에 올려놓아 말린다. 이 둥근 구는 매일 굴린다. 그리고 부순 아편꽃으로 먼지를 문질러 벌레가 생기거나 독이 발생하는 것을 막는다. 마지막으로 이들 완성품은 밀봉된 상자에 넣는다."

 

고시는 현실주의적인 색조로 아편에 만들어지는 중의 궤이한 광경을 묘사한다: "그들은 모두 맨몸의 사내들이다. 허리 깊이의 아편솥 속에 들어가서 한바퀴 한바퀴 돈다. 연흑색이 아편장을 휘젓는 것이다. 그들의 눈빛은 텅비어 있고 빛이 났다. 하나하나 모두 장(漿) 속에 들어있는데 마치 꿀 안에 떨어진 개미들 같았다. 한걸음 한걸음 일어나서, 밟는다. 이들은 모두 강시같았다. 그들의 눈은 어두운 공간 속에서 붉은 빛을 냈다. 보기에 그들은 모두 실오라기하나 걸치지 않은 것같았다. 그러나 그들은 허리띠를 찬 것같았다. 그렇게 보였다. 왜냐하면 이 짙은 장 속에 들어 있어서 그들으 피부색과 구분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들에게 두려움을 주는 백인감독관들도 있다. 그들은 순찰하고 있다."

 

아편은 아편공장에서 일하는 인도노동자들을 해칠 뿐아니라, 공장 주위의 원숭이떼까지도 피해를 입혔다. 이들 원숭이는 다른 지방의 것들과 달랐다. 그 원숭이들은 더 이상 시끄럽지도 않고, 더 이상 길가는 사람을 막지도 않고, 물건을 훔치지도 않고, 심지어 더 이상 소리를 지르지도 않는다. 그들은 나무에서 뛰어내려와, 공장 배수구에서 몇번 핥고는 다시 나무 위로 올라가서 멍하게 갠지스강이 흐르는 것을 지켜보았다.

 

인도에서 만들어딘 이들 아편이 중국으로 운반될 때 마지막 절차는 이러하다: "일하는 젊은이가 외각으로 모든 아편구를 포장한다. 외각은 두 개의 도기로 만든 반원형 용기를 쓴다. 아편구를 가운데 넣고 두 개를 합치면 전체적으로 예쁜 작은 탄환이 된다. 대영제국에게 이익을 가장 많이 가져다준 제품은 그 안에 들어있다. 이어서 이 아편구는 바다를 건넌다. 외각은 마지막에 만청국에서 칼로 내리쳐서 열리게 된다."

 

서방교육을 받은 인도엘리트들은 영국인의 손바닥에서 놀아났다.

 

<앵속해>에 나오는 한 중요한 인물은 인도왕공(王公)이다. 그의 부친은 영국, 미국상인들과 오랫동안 같이 일하며, 중국에서 아편을 판매한다. 이 젊은 인도엘리트는 양호한 서방교육을 받았다. 영국의 철학가 흄, 로크와 홉스를 아주 존경했고, 그들의 저작을 연구했었다.

 

흄의 저서는 <인성론>이 있다. 로크는 <인류이해론>, <관용을 논하다>가 있다. 그의 이론은 나중의 미국혁명과 프랑스대혁명에 영향을 끼치고 자유주의사조의 발전을 이끈다. 홉스는 <공민론>, <리바이어던>, <물질론>, <정체론>, <인론> <사회론>이 있다. 그는 사회계약사상을 내놓았고, 그중에는 만일 주권자가 개인경제권리를 침범하면 개인은 복종을 거절할 수 있다는 것이 있다.

 

영국에서 이들 철학자들로부터 완벽한 이론의 영향을 받아, 이 젊은 인도왕공은 영국에 장미빛으로 충만한 환상을 지니고 있었다. 이 '문명'국가가 어찌 아편을 팔아서 부를 쌓을 수 있느냐고 생각한다.

 

영국식문화를 앙모하는 인도왕공에게 영국의 아편판매업자는 경멸을 담아 말한다: "만일 영국이 아편무역을 중단하면, 당신의 회사, 그리고 인도의 귀족은 치명적인 타격을 입게 될 것이다."

 

"치명적이라고?" 젊은 인도왕공은 부드럽게 묻는다. "아편을 제외하면 우리가 중국에서 필요로하는 팔 물건이 없단 말인가?"

 

아편판매업자는 이렇게 대답한다: "처음에, 중국인은 영국의 어떤 상품(인도의 원재료로 만든 영국상품을 포함하여)도 필요로 하지 않았다. 그러나 영국인들은 중국의 차와 비단이 필요했다. 그래서 영국인들은 백은을 주고 중국의 이들 상품을 사왔다. 그러나 영국인은 충분한 백은이 없었다. 모든 식민지의 백은을 끌어모아도 부족했다."

 

영국철학자의 완벽한 이론에 심취해 있언 인도왕공은 그의 부친도 일찌감치 중국에 대한 아편판매에 개입해왔다는 것을 발견한다. 그리고 거기에서 얻은 이익으로 부를 쌓아 자신에게 물려주었다는 것도 알게 된다. 그는 양심에 찔렸다. 그는 이 무역은 당시 청나라조정의 허가를 받았다는 것으로 스스로를 안위했다. 다만 영국상인은 그에게 청나라조정이 아편판매를 금지하려 한다는 말을 전해준다.

 

이 인도왕공은 깜짝 놀란다. 그러나 아편판매업자의 이어지는 말에 더욱 크게 놀란다: "영국정부는 청나라조정과 전쟁을 준비하고 있다."  그는 놀라서 소리친다: "너의 뜻은 대영제국이 중국과 전쟁을 한단 말인가. 아편을 중국에 강매하기 위해서?"

 

인도왕공이 깜짝 놀라자 아편판매업자는 아마도 자기가 실언했다고 느꼈던 것같다. 그래서 급히 수습한다: "전쟁을 개시하지만, 아편을 팔기위해서는 아니다. 그저 원칙을 지키기 위함이다. 자유를 위해서. 무역자유를 위해서. 자유무역은 신이 인류에게 부여한 권리이다. 그래서 자유무역은 아편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각종 거래물품에도 적용된다."

 

다잇 한 미국인이 이 아편무역업자의 파트너였다. 그 아편판매업자는 그 미국인에게 이런 말도 한다: "몇년내에 우리 동인도회사의 아편 연간수익은 너희국가를 넘어설 것이다. 전미국의 수입을."

 

작가 고시는 미국인도 이 죄악의 아편무역에 참여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아편의 독이 동방을 해치다.

 

"아편의 폐해는 중국 삼천년동안 없었던 큰 화이다." 이 말은 위원(魏源)의 <해국도지>에 나온다.

 

청나라때 문인 공자진(龔自珍)은 <기해잡시> 제85수에서 당시의 귀족관료들이 모여서 아편을 피우는 괴현상을 기록했다:

 

진량조약편남동(津梁條約遍南東)

수견장춘심오봉(誰遣藏春深塢蓬)

불왕인호연막객(不枉人呼蓮幕客)

벽사주호아부용(碧紗橱護阿芙蓉)

 

영국은 아편을 중국에 대량으로 팔았다. 당시 중국사회는 기풍이 완전히 무너지고, 대중의 심신건강은 망가진다. 고시는 이렇게 광주에서 온 아편흡입자의 참상을 묘사했다:

 

"나중에 닐(작중인물)은 알게 되었다. 기실 아편의 가장 두드러진 작용은 인체소화계통에 대한 강력한 영향이다...만일 인체가 이미 과도한 양의 섭취에 익숙해지면, 만일 돌연 아편에서 몸을 빼내게 되었을 때 방광과 괄약근은 통제불능이 되고, 결국 음식이나 수분이 몸에 남아 있지 않게 된다." 그 결과 닐의 감옥에서 만난 친구인 아편중독자는 입에 거품을 물고, 대소변을 가리지 못하고 계속 구토하게 된다. 그와 같은 감옥에 갇혀 있던 닐로서는 하루가 일년같았고, 엄청난 고통을 겪는다.

 

당시 아편이 범람하여 중국은 매년 백은 600만냥이 외국으로 유출되었다. 그리하여 재정이 고갈되고, 국고는 텅빈다. 이와 동시에, 그것은 사회의 생산력도 파괴했다. 그리하여 중국 동남연해지구의 공상업은 쇠락하게 된다.

 

고시의 글에서 영국아편판매업자는 젊은 인도왕공에게 거리낌없이 말한다:

 

"내가 처음 광저우에 갔을 때는 아직 어릴 때였다. 그때는 소량의 아편이었다. 변발을 기른 키작은 사람들은 아주 완고했다. 내가 말해주겠다. 그들을 아편에 중독되게 만드는 건 쉽지 않았다. 정말이다. 쉽지 않았다. 선생. 솔직히 말해서, 졍국, 미국상인들이 끊임없이 노력하지 않았다면, 이 아편중독상황은 여전히 귀족들에게만 국한되어 있었을 것이다!"

 

소계(紹溪)의 <19세기 미국의 대중국아편침략>이라는 책에 따르면, 1805년부터 1837년까지 미국은 중국에 아편 14,169상자를 수출했다. 미국자본가는 이를 통해 공업발전의 자금을 축적한다.

 

오미(鄔眉)가 2015년 5월 8일 텐센트문화채널에 올린 <미국대통령 루스벨트가족은 중국에서 아편무역으로 큰 돈을 벌었다>라는 글을 보면, "프랭클린 델라노 루스벨트의 외조부 워렌 델라노는 24살때 처음 중국을 간다. 그는 주강(珠江)지역에서 10년간 아편장사를 한 후, 큰 돈을 벌어 미국으로 돌아온다. 편지에서 델라노는 아편이 '좋지 않은 작용'을 한다는 것을 인정했다. 그는 얼굴이 창백하고, 뼈만 남아 앙상한 중독자를 만났다. 그러나 아편사업을 얘기할 때는 이렇게 말한다: '상인으로서 나는 그것이 공평하고 정당하며 합리적이라고 생각한다. 독주가 미국인에게 중요한 것과 마찬가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