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호기와굴조(好奇搲掘組)
오랫동안 이런 견해가 떠돌았다. 서태후는 1900년 분개하여 11개국에 선전포고를 했다는 것이다: 즉 영국, 미국, 프랑스, 독일, 일본, 러시아,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스페인, 벨기에, 네덜란드의 11개국이다.
문헌자료를 보면, 서태후가 11개국에 선전포고를 했다는 주장의 근거는 그녀가 하달한 <선전조회(宣戰照會)>와 <선전조서(善戰詔書)>이다. 그러다 이 두 건의 문건을 읽어보게 되면, 그것은 그저 '조회'일 뿐, '선전조회'는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조서도 선전조서가 아니다. 이는 본질적으로 구분되는 것이다. 사실상 서태후는 경자년에 시종일관 열강에 대하여 선전포고를 한 적이 없다.
소위 <선전조회>라 함은 청나라조정이 1900년 6월 19일 열강의 주중국대사관들에 보낸 문건을 말한다. 고궁박물원 명청당안부에서 편찬한 <의화단당안사료>에 따르면 내용이 다음과 같다:
"중국은 각국과 지금까지 우호적으로 지내왔다. 그런데 각 수군제독이 포대를 점거하였다는 말이 있다. 이는 각국이 고의로 화목을 해치는 것이고 먼저 도발한 것이다.
현재 경성에서 권회(의화단)이 들고 일어나서, 인심이 흔들리고, 귀사신 및 가족등의 대사관에서의 상황이 위험하다. 중국은 실로 보호에 만전을 기할 수가 없으니 24시간내에 대사관호위병등을 데리고, 잘 단속해서 속히 출발해 천진으로 가라."
청나라문건에서 말하는 '각 수군제독이 포대를 점거하였다는 설'이 가리키는 것은 바로 프랑스 총영사 두사란(杜士蘭, Comte du Chaylard)이 서태후에게 보낸 조회를 가리킨다. 두사란은 조회에서 중국측에 대고구(大沽口)의 각 포대를 내놓으라고 요구했고, 내놓지 않으면 강제로 점령하겠다고 말했다.
바꾸어 말하자면, 열강들이 조회를 보내와서, 청군이 북경주재 대사관의 사람들이 의화단이 공격으로부터 안전하게 지켜준다는 것을 믿을 수 없으므로, 청나라조정에 대고구등 각처의 포대를 내놓으라고 요구했고, 청나라조정은 열강에 군사요지를 내주고 싶지도 않고, 그렇다고 열강과 전쟁을 벌이고 싶지도 않아서, 또 다른 해결방법을 내놓은 것이다. 열강의 북경주재 대사관의 사람들이 잠시 천진으로 피해 있으면서 열강들이 스스로를 보호하라는 것이다. 청나라조정이 보낸 이 조회에는 한 마디도 선전포고에 대한 문구는 없다.
그리고 국제법에 따르면, 양국의 선전포고에는 반드시 사신의 상호축출을 포함한다. 청나라조정은 열강들의 북경주재인원을 천진으로 옮기라고 하였을 뿐 국경밖으로 축출한 것은 아니다. 이를 보면 청정부는 열강들과의 단교를 원한 것이 아니다. 더더구나 열강들을 상대로 선전포고를 한 것도 아니다. 열강들은 이 조회를 받은 후, 그것을 선전포고문건으로 여기지도 않았다.
소위 <선전조서>를 보자. 이는 청나라조정이 1900년 6월 21일 반포한 <유내각이외방무례횡행당소집의민서장달벌(諭內閣以外邦無禮橫行當召集義民誓張撻伐)>인데, 거기에는 이런 문구가 있다: "그들과 구차하게 생존을 도모하여 만고의 웃음거리가 되느니 크게 쳐서 자웅을 겨루자"
그러나 이 글의 핵심내용은 여전히 대청의 모든 사람들에게 호소하여 들고 일어나 국가를 보위하기 위해 싸우자는 것이다. 이 조서의 중점은 내각을 향해 내린 것이고, 내용은 그저 내각과 지방의 총독 순무들에게 전달된 것이다. 그래서 청나라조정은 기실 '내부동원령'을 내린 것이지, '대외선전포고'를 한 것이 아니다.
열강들은 이 소위 <선전조서>를 받아보지 못했다.
이 '내부동원조서'는 서태후를 위시한 청나라조정의 고위층이 확실히 열강과 전쟁을 벌일 생각을 했다는 것을 말해주고, 그래소 먼저 내각에서 중신들을 동원한 것이다. 다만 금방 이홍장을 위시한 지방 총독, 순무의 반대에 부닥친다. 그래서 8일이 지난 6월 29일, 청나라조정은 다시 유지를 내린다 <군기처기출사아국사신양유등전지(軍機處寄出使俄國使臣楊儒等電旨)>인데, 여기에서 각국주재사신들에게 이번 전투는 조정이 원해서 일어난 것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했다.
7월에 이르러, 청나라조정은 일본, 영국, 프랑스, 독일, 미국의 5개국에 보내는 국서에서 다시 한번 청나라조정은 열강에게 선전포고하지 않았다고 밝히고, 전쟁은 대고구포대를 점령함으로 인하여 일어났다고 한다. <만국공법>을 이미 알고 있던 총리아문은 국제법에 따라서 처리한 것이다. 그래서 조정은 어떤 것이 대외선전포고인지 잘 알고 있었다. 갑오청일전쟁때 대일선전조서는 바로 그 증명이 된다.
그러므로, 서태후가 전세계를 향해 선전포고를 했다든지, 서태후가 11개국에 선전포고를 했다든지 하는 말은 정확하지 않다. 서태후가 비록 무능하고 멍청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미친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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