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장금(張嶔)
"중국인들은 수도를 점령당하는 치욕과 함께 20세기를 맞이했다"고 말하는 '경자국난(庚子國難)'때 서태후가 서안(西安)으로 도망친 것에 대하여 많은 역사애호가들은 이해를 하지 못하고 있다.
서안으로 도망쳐서는 안된다고 말할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서태후의 이번 소위 "서수(西狩)"는 시기가 맞지 않았다. 첫째는 서북대지는 사상유례없는 가뭄으로 고통을 겪고 있었다. 예를 들어, 서태후가 "서수"하는 과정에서 지나간 산서(山西)는 '경자국난'전에 이미 여러 해동안 가뭄으로 피해를 입었고, 심지어 '밭이 메말랐고' '보리싹이 시들었다' 산서의 전체 35개 주현(州縣)은 재해를 당해 있었다. 그리고 서태후가 '도망쳐 숨은' 서안은 어떠했을까? 섬서는 재해를 당한 주현이 더욱 많아서 60여곳에 이르렀고 기아에 시달리는 백성이 삼백만에 달했다. 그녀의 이번 '서수'는 정말 부적절한 시기에 간 것이다.
북경에서 도망친 후 서안까지 가면서, 전체 노선이 아주 힘들었다. 황급히 도망치게 된 서태후는 그녀 자신이 말하는대로 "완전히 시골할머니가 되었다" 막 북경을 빠져나왔을 때, 가마조차도 준비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 낡은 마차를 타고 도망치게 된다. 처음 며칠간은 허물어진 묘(廟)에서 지냈고, 먹은 것도 형편없는 음식들이었다. 유림보(楡林堡) 역참에 도착했을 때, 그녀 일행을 맞이하러 나온 회래지현(懷來知縣)은 참지 못하고 대성통곡한다: "이 지경인지 몰랐습니다. 정말 부끄럽고 가슴아픕니다!"
그렇다면 문제가 있다. 북경이 함락되기 전에, 비록 국면이 위급하기는 했지만, 전국 대부분 지역은 아직 청정부가 장악하고 있었다. 서태후가 정말 도망치려고 했다면, 산동으로 갈 수도 있고, 중원으로 갈 수도 있었다. 그랬다면 노선은 더욱 순조로웠을 것이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고생고생해가면서 산넘고 언덕을 넘어 산서를 거쳐 서안까지 '서수'를 했을까? 설마 현지가 기근에 시달리는 것을 알면서도 그렇게 한 것일까?
먼저 '마후포(馬後砲)'의 원인 하나는 바로 군사적인 요소이다. 경자국난때 청군은 십여만명을 모았고, 대량의 선진적인 무기를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결과는 2만명의 팔국연합군에게 일패도지해버린다. 경진(京津, 북경천진)지구는 탄약이 많이 있었기 때문에, 적군에게 보급이 충분했다. 만일 서태후일행이 중원으로 도망쳤는데, 팔국연합군이 계속 추격해 온다면, 일마평천(一馬平川)으로 내달려 올 수 있다. 서태후가 포로로 잡힐 위험도 있는 것이다. 반대로 길이 험한 산서, 섬서는 어쨌든 '천험(天險)'으로 방어하기 편했다. 기근이고 뭐고간에 안전이 우선이었다.
그러나, 당시 경자국난때는 서태후가 이렇게 많은 것을 생각하지도 못했다. 심지어 북경성이 함락되기 전에, 그녀는 한번도 자신이 도망쳐야하는 상황을 맞이한다고 생각지 않았다. 그래서 서안으로 도망친 것은 너무나 돌연한 상황이었다.
얼마나 돌연했는가? 기실, 대고구(大沽口)에 상륙한 팔국연합군은 계속 북경으로 쇄도했다. 기세등등하게 선전포고를 했던 서태후는 아주 자신이 넘쳤었다. 그녀가 이렇게 자신하고 있다보니, 나머지 대청의 각급관리들은 감히 그녀를 화나게 할 수가 없었다. 비록 전선의 청군이 계속 패배하고 있었지만, 서태후에게 보고되는 것은 항상 승전했다는 것뿐이었다. 특히 팔국연합군이 북경으로 다가오는 1900년 8월 12일, 서태후는 여전히 성지를 내려, 보고서상 승전을 했다는 청군의 장령들에게 상을 내렸다. 그런데, 바로 이어지는 것은 팔국연합군의 포탄이었다.
그후 이틀도 되지 않은 기간동안, 북경성은 혼란에 빠진다. 도망갈 준비를 할 시간이 이렇게 부족하다보니, 준비는 엉성할 수밖에 없었다. 몇대의 낡은 마차를 겨우 구하고, 생활용품조차 제대로 챙겨갈 수 없었다. 그리고 천여명의 무리를 이끌고 도망치는 것이다. 피난가는 백성들의 틈에 끼어서 북경을 벗어났다. 그렇다면 어디로 갈 것인가? 많이 생각할 여유고 없었다. 안전할 것이라고 생각되는 곳으로 그냥 갈 뿐이었다. 이렇게 계속 북으로 가다가 하북(河北) 회래현에 도착한 후에 비로소 가마를 갖게 된다. 연도의 관민들도 거의 다 도망쳐 버렸다. 유림보역에 도착했을 때, 회래지현 오영(吳永)이 그녀를 맞이하고 난 후에 비로소 안정을 되찾게 된다.
이것을 보면 왜 서태후가 회래지현의 앞에서 대성통곡을 했는지 이해가 될 것이다. 대청왕조를 거의 망하게 할 뻔했던 그녀는 이렇게 절처봉생(絶處逢生)한 것이다.
유림보역까지 도망쳐 온 후에 비로소 서태후와 그녀의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비로소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고민하게 된다. 그녀의 주변에 있던 대신들은 여러가지 의견을 내놓았다. 어떤 사람은 내몽골로 가자고 했다. 그러나, 지도를 보니 내몽골은 러시아와 너무 가까웠다. 또 어떤 사람은 승덕 피서산장으로 가자고 했다. 이곳은 서태후도 잘 아는 곳이었다. 예전에 그녀가 승덕 피서산장에 있을 때, 함풍제의 북수(北狩)에서 붕어한 기회를 틈타 그녀는 최고권력자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 다시 그곳으로 가려고 하다보니 북경과 너무 가까웠다. 팔국연합군은 당시의 영불연합군과 다르다. 정말 쳐들어 온다면 막을 힘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상황하에서 서태후의 유일한 선택은 서쪽으로 도망치는 것이었다. 산서는 길이 험하지만 그렇다고 안전하지는 않았다. 전략적인 위치가 더욱 좋고, '병장(屛障)'이 더 많은 섬서가 가장 안전한 곳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래서 잠시 쉬고난 다음 계속 서쪽으로 도망친다. 그리고 회래에서 서태후는 상유(上諭)를 발표하여, 먼저 "잠시 산서로 순행(巡幸)을 간다"고 한다. 이렇게 산서로 먼저 간 다음에 마음을 수습한 후 서안으로 출발했다.
그러나, 말로는 '순행'이라고 했지만, 서태후는 잘 알았다. 이번에 도망치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그래서 9월 5일, 서태후 일행이 장거리를 도망쳐 산서(山西) 대현(代縣) 양명보진(陽明堡鎭)에 도착했을 때, 안문관(雁門關)에 올라간 서태후는 무수한 영웅들이 피를 흘린 이 성관 위에서 순식간에 천리밖의 북경을 떠올린다. 그녀는 이런 말을 남긴다: "새외는 추워서 꽃이 다 졌구나. 북경은 한창일텐데(塞上早寒, 得花遲, 京師極盛矣)" 말을 하면서 처연하게 눈물을 흘렸다. 도망치는 길에 갖은 고생을 겪은 서태후는 여전히 도륙당하고 있는 북경성을 그리워하고 있었다.
그러나, 서태후는 처연하게 눈물을 흘리는 동시에 산서를 53일간 지나간 서태후 일행은 현지에 적지 않은 해를 끼친다. 이 해의 산서는 원래 사상유례없는 가뭄을 맞이했다. 서태후가 '순행'을 왔으면, 백성들에게 무슨 복이라도 내려야 할 것이 아닌가. 서태후가 눈물을 닦은 대현만 하더라도, 현지는 백은 수만냥을 썼다. 그녀가 지나가는 곳은 모두 먹고 마시는 것을 준비해야 했다. 서태후에게 잘 먹이기 위하여 천재를 겪고 있던 산서의 백성들은 허리띠를 더욱 졸라매고 서태후 일행을 대접해야 했다. 천진지현(天鎭知縣)은 심지어 호화스러운 음식을 준비하지 못하게 되자, 겁먹고 독약을 마시고 자살하기까지 한다. 관리들도 이런 지경이니 백성들은 더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음독자살한 관리는 그래도 그중에 좋은 관리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절대다수의 지방관은 모두 갖은 방법으로 서태후에게 잘보이고 싶어했다. 국난이고 아니고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먼저 자신의 장래를 생각했다. 서태후의 주변에 있는 태감들도 도망치는 길에 계속 재물을 긁어 모았다. 심지어 한밤중에 민가로 들어가서 부녀를 욕보이기도 했다. 특히 관리들이 서태후를 접견할 때, 북경의 법도대로, 태감들에게 돈을 찔러주어야 했다. 그것도 걸핏하면 만냥이상이었다. 국가가 이런 지경인데도 그런 것은 잊지 않았다.
서태후가 서안에 도착하고나서, 안정이 되자, 현지인들의 고통은 더욱 심해진다. 서태후 개인이 먹고 입는 것으로 섬서가 8개월간 12만냥 백은을 썼다. <경자조약>이 체결되고, 서태후가 거들먹거리며 떠날 때는 3천대의 마차에 재물을 가득 싣고 간다. 연도에는 '천관차마(千官車馬)'로 기세가 아주 거창했다. 이 세월은 오늘날의 야사나 드라마에서 찍고 있지만, 당시에는 두 글자로 말할 수 있다: "황재(皇灾)"
왜 '서안'으로 갔는지에 대한 이유를 보고, 이 '황재'를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이때 겉으로 보기에는 풍광무비(風光無比)했던 청왕조는 이미 그 무능, 단견, 이기심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것이다. 당연히 남은 날이 얼마 되지 않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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