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서태후)

서태후는 왜 저수궁(儲秀宮)에 거주했을까?

by 중은우시 2018. 6. 9.

글: 역사변연(歷史邊緣)





광서10년(1884년) 50세 생일을 축하하기 위하여 서태후는 장춘궁(長春宮)에서 저수궁(儲秀宮)으로 거처를 옮긴다. 그리고 백은 63만냥을 들여 저수궁을 수리한다. 그 후, 서태후는 말년에 잠깐 낙수당(樂壽堂)에 거주한 것을 제외하고(낙수당은 건륭제가 태상황으로 물러났을 때 살았던 곳인데, 서태후는 스스로를 건륭제와 비교하기를 좋아했다), 기본적으로 모두 저수궁에 거주한다. 저수궁은 서태후 일생에서 가장 중요한 궁전이기도 하다.


저수궁은 두 개 부분으로 나뉘어 있다. 남쪽은 체화전(體和殿)이고 뒷쪽은 저수궁이다. 간단히 말하자면, 서태후는 저수궁에 거주하면서, 체화전에서 식사를 했다.


저수궁은 5간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3명2암의 5간이다. 3개의 명간(明間)은 서태후가 거처하는 곳이다. 정중간의 1간에는 정좌(正坐)가 마련되어 있다. 이는 조배(朝拜)를 위한 것인데, 명절에 잠깐 앉아 있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이곳에 가벼이 앉지는 않았다. 저수궁 서쪽의 정간은 침실과 연결되어 있다. 침실의 외간(外間)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는 침실에서 쓰는 물건들을 놓아둔다. 유포(油布), 수호(水壺)등등. 동쪽의 남쪽 창에 임한 곳에는 갱(炕)이 설치되어 있다. 이곳은 널찍하고 밝다. 서태후가 차를 마시고, 아편을 피우고, 아침을 먹고, 얘기를 하고, 황제와 황후, 후궁을 만나는 것이 대부분 이곳에서 이루어졌다.


3개의 명간을 제외하고 2개의 암간(暗間)이 있다. 가장 서쪽에 있는 것은 그녀의 침실 겸 화장실이다. 가장 동쪽에 있는 것은 동암간인데, 정실(靜室)이라고도 부른다. 서태후가 예불드리고, 생각하는 곳이다. 서태후는 무슨 골치아픈 일을 만나서 마음이 복잡하면 이 안에 들어가서 조용히 지내곤 했다.


체화전도 5간 구조이다. 저수궁과 같다. 중간의 1간은 천당문(穿堂門)이다. 조견(朝見)하러 오는 사람이나, 그녀를 모시는 사람들이 출입하는데 쓴다. 동쪽의 두간은 연결되어 있는데, 두 개의 탁자가 가운데 놓여 있다. 이곳은 서태후가 식사하는 곳이다. 서태후는 아침을 저수궁에서 들고, 점심 저녁의 두번의 정찬은 대부분 체화전에서 먹었다. 통속적으로 말하자면, 체화전은 서태후의 서재 겸 식당이다.


서태후가 저수궁에 거처한 것은 의미가 있다. 현재의 마로 하자면 자신의 정치적 자산을 확실히 잡고 있는 것이다.


동치제를 낳기 전까지 서태후는 그저 빈(嬪)에 불과했다. 지위가 높지 않았다. 그녀는 한동안 함풍제의 총애를 받았는데, 함풍제의 그녀에 대한 감정은 비교적 두터웄다. 동치제를 낳은 후에는 비(妃)로 승진하고, 그 후에는 아들 때문에 다시 귀비(貴妃)로 오른다. 함풍제가 열하에서 죽고, 동치제가 즉위하자, 서태후는 비로소 동태후 자안과 동등한 지위를 확보한다. 신유정변이후에는 서태후가 정권을 장악하고, 자희단우강이황태후라는 존호를 받는다.


서태후에 있어서, 유일하게 자랑할만한 것은 바로 함풍제를 위하여 아들을 낳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아들을 바로 저수궁의 후전에서 낳았다.  이것은 그녀의 가장 큰 자랑이다. 권력을 잡는 밑바탕이 된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오랫동안 저수궁에서 거주하게 된 것이다.


첫째는 함풍제에 대한 그리움을 나타낸다. 선황이 자신을 총애해준 은혜를 계속 잊지 않는다는 것을 드러냄으로서 자신의 미덕을 보여준다. 둘째는 동치제를 힘들게 기른 것을 드러냄으로써 자신의 인자함을 보여준다. 한손으로 두 황제를 붙잡고 대내적으로는 육궁을 복속시키고, 대외적으로는 신하들을 호령한다. 그래서 그녀는 저수궁에 거주하는 것을 좋아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