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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서태후)

서태후는 의화단 지휘부를 어떻게 처리했는가?

by 중은우시 2018. 11. 8.

글: 위득승(魏得勝)


서태후는 도망치는 길에 군대에 의화단을 토벌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의화단을 토벌할 때의 문제는 의화단의 지휘부(서태후에 의하여 의화단의 총지휘관으로 임명되거나, 조정에서 의화단을 적극 지지한 대신들)를 어떻게 할 것이냐이다. 서태후는 이홍장(李鴻章)을 대표로 하여 팔국연합군과 협상하도록 한다. 팔국연합군이 내걸은 조건은 의화단을 소멸시키고, 의화단의 지휘부도 용서해서는 안된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아주 골치아픈 문제였다. 그러나 서태후가 과감하게 처리하지 않는다면, 그녀가 북경으로 돌아오는 길은 열리기 어려울 것이다. 그래서 서태후는 마음을 독하게 먹고 결정을 내린다. 그녀는 결정해야할 때면 망설이는 법이 없다.


1901년 2월, 서태후는 명을 내린다: 장친왕(莊親王) 재훈(載勛)은 자진(自盡)을 명하고: 육현(毓賢)은 법에 따라 처형하게 하며; 강의(剛毅)는 이미 사망하였지만 원래의 관직을 박탈했고; 감숙제독 동복상(董福祥)등도 하나하나 처벌했다. 그러나 팔국연합군은 만족하지 않았다. 그들은 청나라조정이 단친왕(端親王) 재의(載漪)와 보국공(輔國公) 재란(載瀾)을 너무 가볍게 처벌했다고 여긴 것이다. 1주일후, 서태후는 다시 명을 내린다: 재의, 재란을 감금후결(監禁侯决)로 하였다가, 나중에 감형하여 신강으로 유배를 보내고, 영원히 사면할 수 없도록 했다; 강의는 이미 죽었지만, 유가문화에서 가장 중한 처벌인 개관육시(開棺戮屍)를 명한다; 조서교(趙舒翹), 영년(英年) 두 사람도 자진을 명한다; 군기대신 계수(啓秀)와 서동(徐桐)의 아들 한 명은 북경에서 처결한다. 이와 동시에 의화단에 반대했다 처형당한 원창(袁昶), 허경징(許景澄)등의 대신은 명예를 회복시켜준다.


재미있는 것은 조서교라는 인물이다. 서태후는 그를 보호해주고자 애썼따. 그러나 팔국연합군이 끝까지 동의하지 않는다. 서태후가 책동한 것인지 아니면 조서교라는 인물이 백성들에게 그렇게 옹호를 받은 것인지는 몰라도, 서안의 수백명이 연명으로 그를 보호하려 나섰고, 본인도 전혀 죽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그러나 서태후의 비호도 팔국연합군의 의지를 꺽지 못했고, 결국 조서교를 사사한다. 조서교는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했고, 시간을 끌면서 상황이 변화되기를 기다렸다. 그 결과 여러번 죽고, 여러가지 죄를 받지만, 자진시도는 성공하지 못한다. 형을 감독하던 관리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두꺼운 종이를 술에 담근 후에 그의 목에 집어넣어 막았다.  한번해서 죽지 않고, 두번해서 죽지 않았다. 조서교의 명은 정말 질겼다. 전후로 5번이나 시도한 끝에 그를 죽일 수 있었다.


같은 죽음이지만, 사람에 따라 너무나 달랐다. 장음환(張蔭桓)이라는 인물이 있다. 그는 사형을 앞두고도 사내대장부다웠다. 형을 받기 전에, 장음환은 부채그림을 두 개 그려서 조카에게 주었다. 그림을 다 그리자, 소매를 떨치고 일어나서, 형장으로 걸어간다. 그 후에 망나니에게 웃음을 머금고 말한다: "시원하게 해주게!" 그리고는 담담하게 죽음을 맞이한다. 이런 죽음은 체면과 존엄을 잃지 않은 죽음이다.


우리는 다시 장친왕 재훈의 죽음을 얘기해 보기로 하자. 그는 누르하치의 후손이다. 재훈은 가족들과 산서 남부의 포주관서(蒲州官署)에 살고 있었다. 흠차(欽差) 갈보화(葛寶華)가 성지를 받들고 간다. 갈보화가 도착한 후에, 먼저 재훈과 만난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그저 얼굴을 굳힌 채 떠난다. 갈보화의 뜻은 아주 분명했다. 그저 장친왕을 보고, 그가 착실하게 집에서 죽음을 기다리는지 확인하는 것이었다. 자신의 목표가 도망치지 않은 것을 확인하고는 갈보화가 물러나서 집을 살펴본다. 그는 장친왕의 집 뒤에 오래된 사당(廟)이 있는 것을 발견하고 들어가 본다. 그리고 거기에서 빈 방을 하나 정해서 모든 준비를 마친다. 그는 현부의 병력을 데려온 다음 장친왕 재훈은 만나러 간다.


재훈은 보고, 갈보화는 여전이 얼굴을 굳게 하고서 말한다: "무릎을 꿇고 성지를 받으라!" 이것은 친왕에게 아주 무례한 말이다. 그러나, 재훈은 급히 무릎을 꿇지 않고 불안한 마음으로 한 마디 묻는다: "내 목을 가져가려는 것인가?" 갈보화의 손에는 성지가 있다. 이것은 상방보검과 같다. 그는 죄신이 묻는 말에 대답할 의무가 없다. 갈보화가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는 것을 보자, 재훈은 이미 끝났다는 것을 느낀다. 그는 할 수 없이 무릎을 꿇고 성지를 받는다. 사사(賜死)한다는 성지를 듣고난 후 재훈은 가족과 결벌하게 해달라고 요구하고, 갈보화도 응락한다. 재훈의 아들은 이 소식을 듣고 일찌감치 울어서 말을 할 수 없을 정도였다; 재훈의 두 첩은 두려움에 혼절한다. 그 모습은 처량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재훈은 조서교처럼 지저분하지 않았다. 그는 가족을 밀어내고 갈보화에게 묻는다. "어디서 죽는가?" 갈보화가 대답한다: "왕야께서는 뒤의 빈 방으로 가시겠습니까?" 재훈은 그를 따라서 빈 방으로 간다. 대들보에 이미 줄이 매어 있었다. 재훈은 갈보화를 보고는 말한다: "흠차대인께서는 정말 주도면밀하게 생각해 놓으셨군요. 대단합니다." 말을 마치고 바로 자결한다.


다음으로 영년의 죽음을 보자. 그는 쥐새끼처럼 간이 작은 인물이다. 가족과 고별하는 밤에 대성통곡을 그치지 않았다. 그후 그는 서안에 임시로 마련된 형부감옥으로 간다. 다음 날은 바로 원단(元旦)이었다. 모두 새해를 맞이하느라 바빠서, 아무도 그를 보러 오지 않았다. 그는 하루 종일 눈물을 흘리다가, 한밤중에 돌연 그친다. 해가 밝고나서, 그의 하인은 그가 땅바닥에 엎드려 있는 것을 본다. 얼굴이 모두 진흙으로 덮여 있었고 반쯤 죽은 상태였다. 이때는 사사한다는 성지가 아직 도착하기도 전이다. 영년은 미리 놀라서 거의 죽어버린 것이다. 가련하고 한탄스럽다.


육현의 죽음을 보자. 그의 죽음은 특히 관심을 끈다. 어쨌든 그는 의화단의 백락(伯樂)이다. 의화단을 지지한 대신으로서 처형당할 때 그는 병든 몸으로 유배를 가는 중이었다. 그는 유배길을 가면서 자신의 명이 좋지 못한 것을 탄식했다. 그는 이보다 더 나쁜 일이 벌어질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그가 아직 유배지에 도착하기도 전에 그의 목숨을 거둔다는 성지가 뒤따라 온다. 육현은 성지를 받은 후, 돌연 사색이 된다. 이는 이전에 그가 산서순무로 있을 때 흉악했던 모습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같았다. 형장에 도착했을 때, 육현은 이미 스스로 걸을 수가 없어서, 사람들이 부축해야만 했다. 그날 오후 1점, 육현은 목이 잘린다. 육현은 관료로서 잔혹하기로 이름을 떨쳤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육현이 관리로서 청렴했다는 것이다. 죽은 후에 재산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고, 염을 할 때는 입믈만한 새 옷이 한 벌도 없었다.


마지막으로 계수의 죽음을 보자. 계수는 서승욱(徐承煜)과 함께 북경 채시구(菜市口)에서 처형된다. 시간은 1901년 2월의 어느 아침이다. 계수는 행형명령을 들은 후 이렇게 묻는다: "누구의 명인가?" 망나니가 대답한다: "성지는 서안에서 왔습니다!" 계수는 담담하게 말한다: "태후의 뜻이구나. 서양인의 뜻이 아니라. 나는 죽어도 여한이 없다." 계수는 정말 우둔한 노재(奴才)였다. 묵숨을 거두는 것이 양인이면 안되고 서태후이면 괜찮단 말인가. 서태후는 의화단을 지지했던 이들 대신들을 처결한 후에 비로소 북경으로 되돌아올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