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서태후)

서태후의 3명의 보디가드(保鏢) : 한명한명이 곽원갑보다 강했다.

중은우시 2020. 3. 4. 20:59

글: 소철(小哲)


서태후는 죽기를 겁냈던 사람이다. 그래서 자신의 안전을 아주 중시한다. 출행때는 항상 많은 수행원들이 따라다녔고, 그 중에는 무공이 고강한 보디가드가 있었다. 오늘은 서태후이 삼대보표에 대하여 얘기해 보기로 한다.


1. 궁보전(宮寶田)


무협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동해천(董海川)의 이름을 들었을 것이다. 이 만청 팔괘권(八卦拳)의 창사자는 일류고수이다. 그의 수하에 무공이 고강한 제자가 아주 많았다. 그중에는 서태후의 보디가드가 한 명있다. 바로 궁보전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무예를 익히는 것을 좋아했다. 생계를 위하여 외지로 나가서 일할 때, 윤복(尹福)이라는 사람을 알게 된다. 그는 무학을 좋아하던 사람이다. 그래서 둘은 바로 친구가 된다. 윤복은 궁보전이 이렇게 무예를 좋아하고, 신체조건이 무예를 익히기에 적합한 것응ㄹ 보자, 그를 자신의 사부에게 소개한다. 윤복의 사부가 바로 그 대명이 자자한 동해천이다. 동해천의 가르침하에 궁보전은 신속히 발전하여, 금방 당시의 일류고수로 성장한다.


서태후는 평소에 나쁜 일을 많이 해서, 항상 누군가 자신을 암살할지 모른다고 우려했다. 그리하여 민간에서 각종 무술고수를 모집하여 보디가드로 삼는다. 궁보전은 무공이 뛰어나 서태후이 눈에 든다. 그리하여 자금성(紫金城)으로 들어가 어전대도시위(御前帶刀侍衛)가 된다. 그리고 대내시위(大內侍衛)들의 우두머리가 된다. 이 직위는 단지 사품(四品)에 불과하지만 권력은 아주 컸다. 그는 황제와 태후의 생사를 통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 보면 궁보전의 무예는 서태후의 인정을 받았던 것같은데, 나중에 그는 조정의 부패를 보고 실망하여 고향으로 돌아가 무관을 연다.


일설에는 장작림(張作霖)은 궁보전의 명성을 듣고, 그를 동북으로 초청한다. 그리고 그에게 부하사병들의 무술을 가르치게 하려 한다. 그러나 장작림은 궁보전의 몸매가 말라서 무림고수처럼 보이지 않는다고 여긴다. 궁보전은 그의 생각을 눈치채고 상대방으로 하여금 자신에게 총을 쏘라고 말한다. 장작림은 망설이면서 총을 쏘았는데, 생각지도 못하게 궁보전이 두 발의 총탄을 피했다고 한다.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감탄을 금치 못했다.


2. 이서동(李瑞東)  


만청의 무림고수를 얘기하자면 모두 가장 먼저 떠올리는 사람이 곽원갑(霍元甲)일 것이다. 그는 무예가 고강할 뿐아니라, 애국심도 있었다. 나중에는 중국인의 명예를 위하여 싸우다가 결국 목숨을 잃는다. 드라마를 본 사람은 모두 알고 있을 것이다. 곽원갑은 청말의 일류고수라는 것을. 그를 이길 수 있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는 것을 다만 이서동은 무예에서 곽원갑보다 위였다. 이서동이 젊었을 때 일찌기 서태후의 보디가드를 맡았고 대내의 유명한 고수였다. 그러나 나중에 관직을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가서 평범한 사람으로 살아간다. 많은 사람들은 그의 존재를 몰랐다.


이서동은 그다지 유명하지 않았기 때문에, 곽원갑은 상대방의 진정한 실력을 알아보고 싶었다. 그리하여 먼저 도전을 신청한다. 이서동은 당시 53세였다. 그는 곽원갑이라는 후배를 보살펴줄 줄 알았고, 먼저 손을 쓰라고 해준다. 곽원갑은 자신의 장기인 퇴공(腿功)을 시전했고, 수십초를 내질렀지만, 이서동은 여전히 아무런 상처도 입지 않는다. 곽원갑은 약간 초조해져서 손과 발을 함께 쓰기 시작하며 자신의 장기를 모조리 쏟아붓는다. 그러나 이서동은 단지 주먹질 한번으로 그를 땅바닥에 쓰러뜨린다. 이를 보면 이서동의 실력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알 수 있다.


3. 장촉금(張蜀錦)


모두 알고 있는 것처럼 고대 과거에는 장원이 있다. 일단 장원이 되면 앞으로 관료로서의 길이 활짝 열린다는 것을 의미한다. 기실 문과 장원외에 무과 장원도 있다. 장촉금은 바로 무과 장원이다. 그러나 당시의 상황하에서 그는 그다지 재능을 발휘할 기회가 없었다. 청왕조는 계속하여 영토를 할양하고 배상금을 물었다. 장촉금처럼 무예를 익힌 사람들이 나설 자리가 없었다. 갑오청일전쟁후, 서태후는 더더욱 미움을 받고, 그녀를 죽이려는 사람들이 많아진다.


장촉금은 당시 서태후의 시위였다. 그녀가 서안으로 도망쳤다가 북경으로 되돌아올 때까지, 이 고수는 서태후의 곁에서 전혀 떨어지지 않고, 태후의 안전을 보호했다. 장촉금은 서태후에게 너무 충성하여 사람들로부터 조주위학(助紂爲虐)이라는 말까지 듣는다. 그러나 유가사상의 훈도를 깊이 받은 그는 광서제와 서태후에게 충성하는 것이 나라를 위해 충성하는 것이라 여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