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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한)

왜 한무제는 <춘주공양전>을 숭상하고, 한선제는 <춘추곡량전>을 숭상했을까/

by 중은우시 2019. 9. 16.

글: 국학분사단(國學粉絲團)


<춘추(春秋)>는 유가의 '오경(五經)'중 하나로 공자가 편찬한 것이다. 우리가 보기에 그거은 그저 하나의 사서(史書)이다. 모두 그 내용을 많이 알지는 못하고 있을 것이다. 다만 고대에 <춘추>의 지위와 역할은 우리의 상상을 훨씬 초월한다.


고대인들에게 "춘추결옥(春秋決獄)"이라는 말이 있다. 이는 법관이 판단하기 어려운 소송이 있을 때, <춘추>의 대의(大義)를 기준으로 판결한다는 것이다. <춘추>의 지위가 법의 위에 놓이게 되었다. 한무제에 이르러, "파출백가(罷黜百家), 독존유술(獨尊儒術)"을 확립한다. 이때부터 유가사상은 중국을 이천여년간 지배한다. <춘추>의 지위는 더욱 중요해진다. 작게는 집안의 소사부터 크게는 국가의 대사까지 왕왕 <춘추>에서 그 이론적 근거를 찾곤 했다.


다만 문제가 있다. <춘추>는 경전으로 문가가 너무나 간략하다. 그것이 기술한 역사사건은 간단하기 그지없어, "모년모월모사(某年某月某事)"라는 몇 글자뿐인 경우가 있다. 이 몇 개의 글자만 남겼다. 실로 석자여금(惜字如金)이라 할 수 있다. 게다가 문언문은 한 글자가 여러가지 뜻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후인들이 이해하는데 어려움을 남겼다. 다만 동시에 후인들에게 해석의 여지를 많이 남겨놓은 것이기도 하다. 수백년동안 입에서 입으로 전수되면서 서로 다른 사람은 같은 문제에 대하여 서로 다른 견해를 가지게 된다. 해석하는 각도가 서로 달라진 것이다. 그리하여 점점 수로 다른 학술유파가 생긴다. 고대에 학자들의 경전에 대한 해석을 글로 쓴 것을 '전(傳)'이라고 불렀다. <춘추>를 해석하면서 형선된 <전>은 아주 많다. 지금까지 전해져 내려오는 것으로 비교적 유명한 것ㅇ느 3개이다. 각각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춘추공양전(春秋公羊傳)>, <춘추곡량전(春秋穀梁傳)>. 


이 세 개의 '전'의 역사적 지위는 크게 다르다. <춘추좌씨전>은 전체적으로 사서의 형식으로 나타났다. 책으로 형성된 것이 비교적 이르다. 역사적으로 영향을 미친 기간도 아주 길다. 관우가 밤에 읽었다는 <춘추>는 실제로 <춘추좌씨전>이다. 그런데, <춘추공양전>과 <춘추곡량전>은 정치와 윤리사상을 더 많이 담고 있다.


한무제때는 극력 <춘추공양전>을 숭상했다.


당시 <춘추>를 연구하고 공부하는 학술파벌은 주로 5개가 있었다. 그 중 공양학과 곡량학이 가장 유명했다. 각자의 주장이 서로 다르니 누구의 말을 들을 것인가? 공정하게 결정하기 위하여 한무제는 토론전을 개최한다. 공양학파는 초일류고수를 파견하는데, 바로 그 이름도 유명한 동중서(董仲舒)이다. 곡량학파에서 파견한 사람도 당연히 고수이다. 그는 하구강공(瑕丘江公)이라고 부른다. 아쉽게도 이 하구강공의 말솜씨는 그다지 뛰어나지 못했다. 동중서처럼 날카롭지 못했다. 그래서 곡량학이 패배하고, 공양학은 이때부터 관학(官學)이 되어, 일시 독보적인 지위를 차지한다. 하구강공은 어쨌든 최일류고수이다. 한무제는 그를 그냥 돌려보내기는 아까워, 그로 하여금 태자 유거(劉據)의 스승을 맡아달라고 한다. 그런데 이렇게 하다보니, 태자는 곡량학의 팬이 되어 버린 것이다. 그는 곡량학을 아주 숭상했고, 부자간에는 서로 의견불일치가 나타나게 된다.


한무제가 공양학을 숭상한 것은 하나의 중대한 국책과 관련이 있다; 바로 흉노를 공격하는 것이다.


한무제 이전에 역대황제들은 흉노와 '화친'정책을 취했었다. 그런데 돌연 기존 방식을 깨고 '전쟁개시'를 하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다. 전쟁은 아이들 장난이 아니다. 한무제는 유가경전에서 그 근거를 찾아내고 싶어했다. <춘추공양전>은 금방 그 답안을 내준다. 그것은 바로 제양공(齊襄公)의 '구세복구(九世復仇)'의 전고(典故)이다. 이 일은 <춘추>에는 단지 "기후대거기국(紀侯大去其國)"의 몇 글자이다. 사건의 경위는 대체로 이러하다. 제(齊)나라가 기(紀)나라를 공격하는데, 기나라의 국군인 기후는 기나라를 떠난다. '대거(大去)'라는 두 글자는 이해하기 쉬운 글자는 아니다. 대체로 이런 의미이다. 기후가 그의 국가를 떠났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어떤 이유때문인가?


공양학가들은 그들 나름의 답안을 내놓았다. 원래 기후의 조상이 채양공의 9대조에게 죄를 지었다. 주왕(周王)에게 제양공의 9대조를 고발하여, 주왕은 제양공의 9대조를 기름가마에 던져넣어 삶아죽였다. 제양공은 조상의 복수를 위하여, 온 나라의 병력을 끌어모아, 기나라를 공격했고, 기나라를 이겼으며, 기후는 도망쳤다. 춘추시기는 제후간의 혼전이 벌어진 때였고, 이 제양공은 주왕의 명령이 없이 임의로 기나라를 공격한 것이다. 이는 확실히 예의에 어긋난다. 기후가 도망친 것이 올바른 것인가? 그 문제는 뭐라고 얘기하기 어렵다. 공자는 <춘추>에서 '대거'라는 두 글자를 썼는데, 명확하게 좋다 나쁘다를 판단하지 않은 글자이다. 그러나 공양학자들은 이렇게 해석한다. 관점은 아주 선명하다. 제양공은 구세복수를 한 것이다. 이는 조상을 위하여 정의를 실현한 것이니 당연히 옳은 일이다. 고인의 관념에 복수는 대사이다. 중국이건 외국이건 초기의 법률은 바로 복수에하 한걸음 한걸음 발전해 온 것이다.


한무제는 공양학의 '구세복구' 전고에서 흉노에 출병할 이유를 찾아냈다: 복수. 당초 한고조 유방이 흉노와 전쟁을 벌였다가 평성 백등산에 포위된 적이 있고,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했다. 흉노 선우는 서신을 보내어 고후를 모욕했다. 황후를 처로 취하겠다고 하였던 것이다. 이것들은 모두 국가의 큰 모욕이다. 아쉽게도 당시 한나라는 국력이 부족하여, 그저 참을 수 밖에 없었다. '화친'정책으로 흉노를 다독거렸다. 한무제에 이르러, 국력이 강성해지고, 조상의 치욕을 이때 갚지 않으면 언제까지 기다려야 할 것인가. 제양공을 보라. 그는 이백년이 지난 원한을 조상을 위해 풀어주지 않았던가. 한무제의 복수는 더 말할 필요도 없다.


역사적 상황은 급격하게 변화한다. 한무제는 전국의 힘을 모아서 공격했지만, 흉노를 철저히 무너뜨리지는 못한다. 그러나 기회는 금방 왔다. 그의 중손(重孫)인 한선제가 등국했을 때, 흉노에 내란이 발생한다. 5갈래의 흉노간에 내분이 일어나 국력이 크게 약화된다. 이치대로라면, 이는 흉노를 멸망시킬 좋은 기회이다. 그러나, 이때 소망지(蕭望之)라는 대신이 일어나서 흉노는 내란을 겪고 있다. 다른 사람의 위기를 틈타서 공격하는 것은 올바르지 않다. 당연히 다독이고 화해하는 정책을 써야 한다. 이렇게 큰 일을 아무렇게나 결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소망지는 마치 미리 계획을 세워둔 것같았다. 그는 <춘추공양전>을 끄집어 낸다.


원래 <춘추>에서 기재된 이런 내용이 있다; "진사개수사침제(晋士匄帥師侵齊), 지곡(至穀), 문제후졸(聞齊侯卒), 내환(乃還)". 대체적인 의미는 진나라의 장군인 사개가 국군의 명을 받아 제나라로 공격해 들어갔는데, 곡이라는 지방에 이르러, 제후가 죽었다는 말을 듣는다. 그러자 그는 더 이상 공격하지 않고 군대를 돌려서 돌아갔다.


공양학은 이 글을 가지고 분석을 한다. '환(還)'이라는 글자를 가지고 설명한다. '환'은 즉 군대를 되돌리고 더 이상 싸우지 않는다는 것인데, 제나라를 공격하는 것은 국군이 정한 대사인데 어찌 이렇게 그만둘 수 있단 말인가. 사개의 이유는 바로 적국인 제나라의 국군이 죽어서 장례로 바쁠텐데, 우리 진나라가 어찌 남의 위기를 틈타서 공격할 수 있겠는가? 군대를 되돌려 돌아온 것이야말로 바로 '예'에 부합하는 행동이다.


소망지가 공양학의 관점을 인용한 것은 이런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이다. 흉노가 내란으로 곤경에 처해 있는데, 우리 대한이 남의 위기를 틈타서 공격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래서, 이때 출병하는 것은 바람직스럽지 않다. 기실 소망지의 이유는 약간 억지스럽다. 제후간의 전쟁은 주왕조라는 대가정 내의 투쟁이다. 종법관계의 성분이 거기에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흉노는 오랑캐이다. 종법관계는 전혀 없다. 그런데 어찌 이를 인용할 수 있을 것인가? 당년의 위청(衛靑), 곽거병(霍去病)이 흉노를 칠 때, 이런 종법관계상의 '예'를 고려했던가?


그런데, 소망지의 견해는 겉으로 보기에는 고리타분해 보이지만, 실로는 고명하다. 그는 경전을 인용할 줄만 아는 고리타분한 선비가 아니다. 기실 진상은 이러하다. 그는 한선제의 심중을 잘 헤아렸다. 더 이상 흉노와 싸우고 싶어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효과를 보았을 때 멈추려고 한 것이다. 전쟁은 이제 끝내야할 시기인 것이다. 역사는 증명한다. 한선제가 소망지의 의견ㅇ르 들어서 흉노와 화해했다. 이 의사결정은 옳았다. 흉노의 호한야선우(呼韓邪單于)는 스스로 투항해오고, 흉노에 반격하는 주요 역량이 된다. 결국 또 다른 방식을 사용하여 철저히 흉노를 무너뜨렸던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볼 수 있다. 흉노와의 전쟁이라는 일에서 공양학은 두 개의 완전히 다른 답안을 내놓았다. 이는 의사결정자가 어느 것을 취하느냐의 문제일 뿐이다.


말하자면 이상하긴 한데, 이 한선제는 비록 흉노와의 관계에서 공양학의 주장을 받아들였지만, 그의 내심 깊은 곳에서는 공양학의 라이벌인 곡량학을 마음에 두고 있었다. 그 원인은 한무제가 만년에 일으킨 '무고지화(巫蠱之禍)'와 관련이 있다. 이는 억울한 사건이다. 태자 유거는 어쩔 수 없이 밀려서 반란을 일으키게 되고, 결국 일가족이 피살된다. 오로지 강보에 쌓여 있던 어린 손자만이 요행히 살아남는다. 그가 바로 한선제이다. 한선제는 그의 조부 유거를 동정했고, 곡량학에 찬동했다. 증조부 한무제가 지지했던 공양학에 반대한 것이다. 그의 증조부인 한무제가 조부의 일가를 몰살시켰고, 자신만이 요행히 살아남았기 때문이다. 한선제의 일생은 기구했다. 내심 깊은 곳에는 조부를 동정하고, 증조부 한무제에게는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깊은 원망을 품고 있었다.


만일 학술의 관점에서 보자면, 공양학은 역량을 더욱 숭상하고, 전쟁의 작용을 긍정한다. 그래서 전쟁을 좋아하는 한무제의 입맛에 맞았던 것이다. 한무제는 전쟁을 좋아하고, 상격이 잔혹하며, 윤리나 가족의 정을 중시하지 않았다. 그러나 곡량학은 종법윤리를 중시하는 편이다. 태자 유거가 피해를 입은 것은 종법윤리에서 볼 때, 약자이고, 동정할 만하다. 곡량학의 관점은 자연히 유거에게 유리하다.


결국 감로3년, 즉 기원전51년, 한선제는 석거각(石渠閣)에서 토론회를 벌인다. 공양학과 곡량학의 두 학자가 역사상 제2차 논쟁을 벌인다. 재판은 소망지가 담당한다. 최종 결과는 한선제의 뜻에 맞추어 <곡량전>을 관학계통에 편입시킨다. 관방이 지지하는 학파로서 공양학과 분정항례(分庭抗禮)하게 된다.


기실, <공양전>과 <곡량전>의 '공양'과 '곡량'의 두 글자는 비슷하다. 앞의 글자는 자음이 같고, 뒤의 글자는 모음이 같다. 아마도 수백년간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면서 독음에서 차이가 발생한 것일 것이다. 그래서 두 개의 파로 나뉘어진 것이다. 다만 라이벌로서 구별은 아주 크다.


예를 들어, 공양학에서 "기후대거기국"이라는 몇 글자를 해석하는 것을 위에서 보았는데, 곡량학에서는 어떻게 해석하는지 모도록 하자. 거기에는 무슨 '구세복구'같은 말은 없다. 제양공이 기나라를 공격한 것은 주왕의 동의를 받지 않았기 때문에 '예'에 부합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 기수는 위신이 아주 높아서, 그가 기나라를 떠나자, 백성들도 그를 따라간다. 그래서 4년이 지나자 기나라의 사람들은 모두 떠나버린다. 바로 이런 원인으로 <춘추>에는 제나라가 기나라를 멸망시켰다고 쓰지 않고, '기후대거기국'이라는 말을 썼다고 보는 것이다. 이는 기후의 현명함을 칭찬하는 말이라고 본다. 비판하는 것은 제양공의 '무례'이다.


보기에 이 3개의 전에서 해석하는 능력도 확실히 고심막측한 것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