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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한)

진승(陳勝)은 칭제한 후 또 다른 반란주역 오광(吳廣)을 어떻게 대했는가?

by 중은우시 2019. 1. 6.

글: 풍전사감(瘋癲史鑒)


기원전209년, 진승은 대택향(大澤鄕)에서 "왕후장상에 씨가 따로 있느냐?"는 말로 반란의 기치를 내건 후, 진나라의 폭정에 시달리던 백성들은 전국각지에서 속속 호응해왔다. 1개월도 되지 않아, 진승의 반군은 겨우 900명의 가난한 백성에서 시작하여, 수만의 보병으로 발전하고, 전차(戰車)마저도 6,7백냥을 확보하게 된다.


공자는 <논어>에서 이렇게 말한 바 있다. 명부정즉언불순(名不正則言不順). 언불순즉사불성(言不順則事不成). 진승은 반란때 초나라장수 항연(項燕)의 이름을 빌렸다. 그래서 초나라의 원래 도성인 '진현(陳縣)'을 빼앗아와야 할 의무가 어느 정도 있었다. 진승은 수중의 병력을 이용하여 안휘, 하남의 경계지역을 장악한 후, 곧이어 진격목표를 '진현'이라는 전략요충지로 삼는다.


반란군은 금방 세력이 커지고, 진현의 수성관병은 일찌감치 놀라서 간담이 서늘해져 있었다. 성안의 관리들은 모두 도망쳐서 겨우 군승(郡丞) 하나만 남아서 속죄양이 된다. 진성은 가볍게 진현 현성을 점령했다. 즉시 그는 성안의 귀족과 호족을 불러모은다. 그리고 서둘러 왕에 오른다. 진승은 아마도 같이 고생한 동료들을 생각하여, 칭왕후에 백관을 설치한다. 자신의 골간들에게 대거 상을 내린다. 또 다른 반란의 지도자인 오광은 이로 인하여 '가왕(假王)'에 봉해진다. 명목상으로는 진승과 지위가 같았다. 다만 지휘권이 약간 낮았을 뿐이다.


속담에 '천무이일(天無二日), 국무이군(國無二君)" 즉 하늘에 두 태양이 없고, 나라에 두 임금이 없다. 진승이 오광을 '가왕'에 봉한 것은 이미 최고로 높은 자리이다. 오광 본인도 이에 대하여 별다른 이의가 없었다.


당시의 상황에 따르면, 진승이 왕에 봉한 것은 허수의 성분이 많았다. 진승은 왕을 칭하기 전에, 진여(陳餘), 장이(張耳) 두 사람이 저지하려고 시도한 적이 있다. <사기. 장이진여열전>에 따르면, "장군께서 눈을 부릅뜨고 용기를 내어, 만번 죽을 각오로 계획을 세워 천하를 위하여 잔적을 제거하고자 했습니다. 이제 진현에 도착하자마자 왕을 칭하면, 천하에 사적인 욕심을 보여주는 것이니 장군께서는 왕을 칭하지 마십시오."


진승이 왕에 칭한 것은 자신의 야심을 철저히 드러낸 것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불만을 표한다. 진승이 왕을 칭한 후, 무신(武臣)이라는 사람을 옛나라땅으로 보냈는데, 무신은 한단에 도착한 후 스스로 조왕(趙王)에 오른다. 그리고 바로 좌우승상까지 임명한다. 진승은 대노하여 사람을 보내 무신의 가족을 붙잡아 오고, 그들을 죽여 화풀이를 하려고 했다.


확실히 진승은 누군가가 정말로 그와 평기평좌(平起平坐)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 오광을 가왕에 봉한 것은 그저 명목적으로 안위시키는 것이다. 진승은 자신을 배반한 무신을 없애고자 했는데, 사람들이 말리자 이해득실을 따져본 후, 조왕의 지위를 인정해준다. <사기.진섭세가>의 기록에 따르면, 주국(柱國)이 말하기를, "진나라가 아지 망하지 않았는데 조왕 장상의 가족을 죽인다면, 또 하나의 진나라가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냥 왕으로 세워주는 것이 좋겠습니다." 진왕은 그 말을 듣고 사신을 조나라에 보내 축하해 준다.


하나의 모범은 가장 좋은 선전이다. 무신이 스스로 조왕에 오른 후, 연나라땅의 한광(韓廣)도 연왕(燕王)에 오른다. 위나라땅의 위구(魏咎)도 스스로 위왕(魏王)에 오른다. 그 동안 진승도 일찌기 막으려 한 적은 있다. 그러나 그는 이들 장수들에 대한 통제력이 너무 박약해서 성공하기 어려웠다. 진승은 다른 사람들이 스스로 왕에 오르는 것을 막지 못했고, 자신이 파견한 감군(監軍)도 그들에게 목이 베어졌다.


진승이라는 이 '진왕(眞王)'을 사람들은 별로 인정해주지 않은 것이다. 오광은 명실상부한 '가왕'이라는 거을 충분히 알 수 있다. 나중에 오광은 병력을 이끌고 형양(滎陽)을 공격한다. 진군은 수십만의 군대를 조직하여 반란군을 진압한다. 오광의 수하장군 전장(田臧)등은 상의한 다음, 가왕 오광은 병법을 몰라서 계책을 쓸 수 없다. 그를 죽이지 않으면 우리의 계책을 실시할 수가 없다고 결의한다.


전장은 몇 사람과 상의한 후, 직접 오광의 생사를 결정한다. 그후 그들은 진승의 명의를 빌어 오광을 죽인다. 그리고 사람을 시켜 오광의 수급을 진승에게 보낸다. 오광은 아무런 잘못도 저지르지 않았는데, 부하들에게 모살당한 것이다. 이것은 어떻게 보더라도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일이다. 진승은 그러나 화를 내지 않았을 뿐아니라, 오히려 전장을 상장(上將)으로 승진시킨다.


진승의 마음 속에 오광이 수하에게 죽임을 당한 것은 그다지 큰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어쨌든 그들은 반란을 일으킬 때 상사를 죽여서 위엄을 수립했다. 나머지 장수들도 마찬가지였다. <사기.진섭세가>의 기록에 따르면, 이때 여러 군현에서 진나라관리에게 고통을 받고 있던 사람들은 진나라관리를 죽여서 진섭에 호응한다. 되돌아 생각해보면, 이런 현상이 나타나게 된 것은 아마도 '왕후장상에 씨가 따로 있느냐?"는 말 때문일 수도 있을 것이다. 이 말은 인구에 널리 회자되는 말이다. 그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피를 끓게 만들었던가. 왕이 되고 재상이 되는 것은 무엇보다 바라는 일이었다. 사람들이 아무런 규칙의 속박을 받지 않으면, 왕왕 본능에 따르게 된다. 자연히 충동적인 일을 저지르게 된다.


어떤 사람은 진승이 아마도 죽은 오광은 이미 가치가 없다고 여겼을 수 있다고 본다. 차라리 살아있는 전장을 잘 이용하는 것이 낫고, 그로 하여금 더욱 죽어라 진군에 항거하도록 만드는 것이 유리하다는 것이다. 전장은 승진후 과연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오창(敖倉)에서 진군과 혈전을 버리다 전사한다. 오광은 전쟁터에 나가기도 전에 부하들에게 죽임을 당했다. 어느 정도 비극이기는 하지만 억울할 것은 없다. 오광이 죽은 후, 역사적으로 진승이 그에 대하여 어떻게 매장했고 추봉했는지에 대하여는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진승의 그 "부귀하게 되면 서로 잊지 말자!"는 말은 정말 실망을 금치 못하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