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심근배조(寻根拜祖)
동한의 광무제(光武帝) 유수(刘秀)의 뒤에 있는 삼대집단은 바로 하남집단(河南集团), 하북집단(河北集团), 하서집단(河西集团)이다. "하남집단"은 남양(南阳)과 영천(颍川)을 포함하고, "하북집단"은 기주(冀州)와 유주(幽州)를 포함하며, "하서집단"은 하서주랑(河西走廊)의 장액(张掖), 돈황(敦煌), 주천(酒泉), 무위(武威), 금성(金城)의 5군을 포함한다.
하남집단과 하북집단은 유수가 동한을 건립하는 기반이 되고, 하서집단은 동한의 통치를 유지하는 핵심역량이 된다.
동한제국은 명문사족집단이 건립한 정권이다. 그 기반은 바로 삼대집단이다. 그렇다면 이들 삼대집단은 어떻게 형성되었는가?
신조(新朝)말기, 왕망(王莽)의 개혁이 실패하고, 천재지변까지 더해지면서 천하에 유민이 사방에서 일어나고 변란이 끊이지 않았다. 반란을 진압하기 위하여, 왕망은 부득이 명문사족들에게 사인무장을 건립하도록 허용하게 된다. 그리하여 이들 명문사족계급은 속속 무장군벌로 성장하게 된다.
지황3년, 서한종실의 자제인 유인(刘縯)이 용릉(舂陵)에서 거병하여, 녹림군(绿林军)과 연합하여 처음으로 "신망을 무너뜨리고 한실을 부흥한다"는 정치적 구호를 내세운다.
지황4년, 용릉군과 녹림군이 연합하여 황제를 옹립하게 된다. 유인은 이번 연합군의 내부투쟁에서 패배하고, 황위는 녹림군이 받든 유현(刘玄)이 차지하게 된다.
얼마 후, 유인이 피살당하고, 녹림군은 낙양, 장안을 함락시키고, 신조는 멸망한다.
유현의 "갱시정권(更始政权)"은 기실 명문사족집단과 농민군이 섞여 있는 잡탕집단이었다. 그리하여 성립초기부터 내분이 끊이지 않았다.
형을 죽인 문제로 인하여, 그때 유수는 유현으로부터 견제를 당한다. 유현에게서 벗어나기 위하여, 유수는 사방으로 떠돌아다니게 된다. 용릉자제들의 도움으로 마침내 북순(北巡)의 기회를 갖게 된다.
소위 "북순"은 사신의 신분으로 하북(유주, 기주)로 가는 것이고, 신망의 관리들 수중에서 관할권을 회수했다.
이번 "지옥여행"에서 유수는 왕랑(王郎)의 추살을 당하여, 로노(卢奴)에서 계현(蓟县)까지 북으로 계속 도망쳐야 했다. 그리고 다시 계현에서 신도(信都)까지 도망친다. 여러번의 생사위기를 겪으면서 살아남는다. 그를 따르던 100여명은 최후에 겨우 남양, 영천의 십여명 충성스러운 추종자들만 남게 된다.
바로 이 극도로 위험한 시기에 유수는 망외의 소득을 얻는다. 임광(任光), 비동(邳彤), 경순(耿纯), 유식(刘植)을 대표로 하는 하북호족집단이 돌연 그의 편이 되고, 이로 인하여 그는 기반을 확보한다.
얼마 후, 유식등의 도움으로, 하북최대의 명문집안인 유양(刘杨)도 10만의 사병을 이끌고 가담한다. 그리고 외조카딸인 곽성통(郭圣通)을 유수에게 시집보낸다. 이렇게 하여 유수는 하북최강의 무장세력을 확보하게 된다.
왕랑과 싸우는 과정에서 경감(耿弇)이 돌연 오한(吴汉), 구순(寇恂), 경단(景丹), 개연(盖延), 왕랑(王梁) 및 그들의 6천 유주철기를 이끌고 유수에 가담한다.
기주집단과 유주집단의 가담으로 유수는 왕랑을 격패하고, 하북을 통일시킬 수 있었다. 그리고 이때부터 유현과 갈라서서 동한정권을 건립한다.
이때, 동한의 개국공신은 운대이십팔장(云台二十八将)이 모두 모였다. 거기에는 하남집단의 15명, 하북집단의 13명(그중 임광, 오한은 남양사람이고, 이충은 동래사람이지만 모두 하북에서 기반을 닦았다)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28개의 가족은 명단에 이름을 올리지 못한 남양음씨(南阳阴氏), 완성이씨(宛城李氏)등의 가족과 합쳐서 동한개국의 정치적기반이 되는 양대호족정치집단을 이룬다.
그러나, 세심한 사람이라면 아마도 느꼈을 것이다. 동한의 외척으로 음씨, 등씨 두 가족은 각각 2명의 황후만을 배출했을 뿐두이고, 진정으로 조정을 오랫동안 장악하고 영향력이 가장 컸던 것은 두씨(窦氏), 양씨(梁氏)였다. 이건 또 어떻게 된 일일까?
이는 광무제 유수의 정치평형술과 관련이 있다.
황제가 천하를 얻을 때는 외부역량의 지지가 필요하다. 그러나 천하를 얻고난 후에는 황권강화를 원하고, 그렇게 되면 강대한 외부역량은 소멸하는 것이 가장 좋다.
이는 거의 모든 왕조에서 개국후에 황제와 공신이 충돌하는 원인이다. 우리는 단순히 도덕적인 층면에서 평가해서는 안된다. 제국의 장기적인 안정을 위하여 황제는 반드시 그렇게 해야 한다. 다만 수단이 서로 달랐을 뿐인 것이다.
사람들은 모두 유수가 인자하고, 공신을 한명도 죽이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 말은 틀리지 않았다. 그러나 만일 도덕적인 층면에서만 본다면 그것은 너무 좁은 생각이다. 기실 유수도 공신을 죽이고 싶었겠지만, 그렇게 하지 못한 것이다. 왜냐하면 호족의 세력이 너무 강했기 때문이다. 조금만 실수하면 아마도 제2의 왕망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유수가 취한 조치는 두 가지이다: 첫째, 이들 호족가족에 장기적인 이익을 주면서 '병권'을 회수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공신들은 속속 관직을 내려놓고 고향으로 돌아간다. 그들의 자녀들은 조정의 관리로 들어오고 지방이익을 독점한다. 또한 황실과 혼인관계를 맺어 혈연이익공동체를 구성한다.
둘째, "적을 만드는 것"이다. 당연히 자신의 적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양대집단의 적을 만드는 것이다. 이 "적"은 바로 하서집단이다. 두씨, 양씨, 마씨등이 이들 집단의 구성원이다.
신조말기 천하가 대란에 빠졌을 때, 장액태수 두융(窦融)은 독보적인 안목을 가지고, 양통(梁统)등과 연합하여 "하서오군연맹"을 결성한다. 겉으로는 농서군벌 외효(隗嚣)의 아래에 있었지만, 기실 지방을 할거하면서 스스로를 지키고 있었다.
나중에 외효와 유수의 사이가 틀어지자, 두융은 뛰어난 정치적 안목을 바탕으로 유수를 지지한다. 그리고 유수를 도와 외효를 격패시킨다.
하서집단은 비록 동한개국의 '원시주주'는 아니었지만, 두융, 양통을 대표로 하는 그들의 정치적 재능은 뛰어났다. 후기에 황권과 양대집단, 그리고 양대집단의 갈등 가운데, 하서집단은 현명하게 '스스로의 손발을 자르고' 황권을 옹호한다.
이 거동은 유수의 마음을 얻었다. 그리하여, 두씨, 양씨는 황족과 정략결혼할 기회를 갖게 되고, 두 가족의 자제들은 신속히 황제의 심복이 된다.
특히 두씨는 "공이 한명, 후가 두명, 공주가 세명, 이천석이 네명이 된다. 할아버지부터 손자까지, 저택은 경성과 마주할 정도이고, 노비가 수천을 헤아렸다."
짧은 10년만에 두씨, 양씨, 마씨는 하북집단의 곽씨, 하남집단의 음씨, 등씨와 어깨를 나란히 하며, 이들 삼대집단이 공동으로 동한제국 외척정치의 주체로 등장한다.
그러나, 우리는 또 한가지 현상을 발견하게 된다. 동한말기에 이르러, 이들 명문가족은 모두 사라지고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정치무대에서 활약하는 것은 여남원씨(汝南袁氏), 홍농양씨(弘农杨氏)등 신호족집단이다. 이건 또 어찌된 일인가?
한마디로 줄여서 얘기하자면, 삼대집단을 대표로 하는 외척집단은 점차 황권에 의해 약화되고 소멸되었다. 그리고 신호족집단이 그 빈틈을 타고 들어와서 이들의 자리를 대체한 것이다.
동한정권은 처음부터 "황권과 호족사족집단이 함께 천하를 다스리는" 모델이었다. 그리하여, 황권은 불완전했다. 황제들은 '저주를 받은 것'처럼 모두 젊은 나이에 죽었다. 후사를 두지 못하거나, 아들이 어렸다. 그리하여 황권은 태후를 우두머리로 하는 외척에게 장악되어 버린다.
재미있는 것은 태후들도 마치 '저주에 걸린 것'같았다. 그들은 자식을 낳지 못했다. 황제도 친아들이 아니다. 그래서 황제들이 성년이 되면, 극력 환관세력을 키워서 외척세력에 대항했다.
우리는 발견할 수 있다. 이들 외척세력의 최후는 대부분 비참했다. 두씨, 양씨는 여러번 멸문지화를 당한다. 다만 황제들이 권력을 차지한 후, 또 다시 젊은 나이에 요절해버린다. 그리하여 다시 어린 황제가 들어서고, 신외척이 등장한다. 이런 식으로 계속 반복되었다.
이 문제를 해결한 것은 동한역사상 악명이 높은 두 황제 한환제(汉桓帝)와 한영제(汉灵帝)이다.
한환제는 차례로 양씨, 등씨 두 명문집안황후를 폐위시킨 후, 궁녀를 황후에 앉히고자 했다. 이 사건은 후인들이 한황제의 황당한 짓거리로 여겨졌지만, 기실 그런 것이 아니다. 이는 황권이 처음으로 명문거족에 대하여, 외척세력에 대하여 반항한 것이기 때문이다.
유감스럽게도, 한환제는 호족집단을 이기지 못했다. 결국에는 호족집단의 뜻때로 두묘(窦妙)를 황후로 세울 수밖에 없었다.
한황제가 비록 중도에 무너졌지만, 그가 호족집단에 가한 타격은 영향이 컸다. 양씨, 등씨세력이 이때 이후로 힘을 잃게 된다.
한영제가 즉위한 후, 두씨가족은 다시 환관집단에게 패한다. 두묘의 부친인 두무(窦武)는 피살당하고, 두묘는 유폐된다. 나이 겨우 12살된 한영제는 동한역사상 유일하게 미성년으로 실권을 장악한 황제가 된다.
나중에 한영제는 마지막 호족집안 황후 송씨(宋氏)를 폐위시키고, 평민출신의 하씨(何氏)를 황후로 삼는다. 이로 인하여 호족집단의 황후독점은 끝이 나게 된다.
재미있는 것은 평범한 가문출신의 하씨가 황후에 오르자, 후사를 두지 못했던 황제들이 신기하게도 생육능력이 되살아나게 된다. 한영제는 두 아들을 두고, 마지막황제인 한헌제는 10여명의 아들을 낳게 되는 것이다.
삼대집단을 대표로 하는 호족집단은 황권과의 기나긴 투쟁과정에서 시들어갔고, 또 다른 역량이 굴기했다. 그것이 바로 여남원씨, 홍농양씨, 영천진씨, 순씨, 사마씨등 신호족세력인 것이다.
이 집단은 마치 깊이 뿌리박은 씨앗처럼 서한때부터 싹을 틔우기 시작하여, 수십대를 거쳐 관료로 참여하면서 정치적자산을 쌓고, 한번 또 한번의 동란을 거치면서 어렵게 성장해왔던 것이다.
황권과 삼대군공호족집단의 결렬은 부지불식간에 이들 신호족집단의 양분이 되었고, 삼대집단의 붕괴와 더불어, 그들은 순식간에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게 된다. 그리고 한영제말기의 제국붕괴를 이용하여, 신속히 천하의 신호족으로 등장한다. 나아가 문벌집단을 형성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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