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남북조)

모용린(慕容麟): 후연을 멸망시킨 모용가족의 소인(小人)

중은우시 2019. 2. 18. 01:26

글: 소가노대(蕭家老大)


그의 고발로 부친 모용수(慕容垂)는 도망가는 도중에 추격을 당해 어쩔 수 없이 전진(前秦)에 투항했고, 그의 기밀누설로 형인 모용령(慕容令)이 거사를 도모하다가 실패하고 패배하여 죽음을 맞이했고, 그가 중간에서 농간을 부려 형인 모용보(慕容寶)는 서자(庶子)와 반목하여 원수가 되어 서로 전쟁을 벌이게 만들고, 그의 모반으로, 후연(後燕)제국은 내우외환으로 하마터면 멸망할 뻔한다.


모용린이라는 모용가족의 피가 흐르는 그는 이기심으로, 이익을 쫓으며 의리를 잊고, 반복무상하며, 진화타겁(趁火打劫)했다. 심지어 부친과 형을 팔아먹고, 정국을 교란시키며, 사직을 위험에 빠트렸으니, 모용제국에서 가장 비열하고, 가장 위험한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불의를 많이 저지르면 스스로도 죽게 되는 법이다. 한때 황제를 칭하기도 했던 이 교활한 인물은 결국 스스로의 무덤을 파고 말았다.


모용린의 소자(小字)는 하린(賀麟)이다. 대선비산 아한대 원시산림에서 나중에 중원으로 쳐들어온 선비족 모용가족으로 전연(前燕) 문명제(文明帝) 모용황(慕容皝)의 손자이고, 후연(後燕) 성무제(成武帝) 모용수의 아들이며, 혜민제(惠愍帝) 모용보(慕容寶)의 동생이고, 남연(南燕) 모용덕(慕容德)의 조카이다. 전연, 전진, 후연, 남연의 4왕조를 거쳤다. 역사상 모용가족은 뛰어난 인물들을 많이 배출했으며, 웅재대략, 무공개세, 인욕부중, 격분장렬한 인물이 수를 헤아릴 수 없다. 음험하고 간사하기로 유명한 모용린은 이 유명한 모용가족에서는 특이한 인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전연 말기, 오왕(吳王) 모용수가 명성을 크게 떨치자, 집권자들이 시기하여 그를 용납하지 못했다. 모용수는 앉아서 죽기를 원치 않고, 또한 골육상쟁을 벌이고 싶지는 않아서, "피지어외(避之於外)"하기로 결정한다. 그리하여 용성(龍城, 지금의 요녕성 조양)을 점령하고 자신의 근거지로 삼고자 계획한다. 전연 건희10년(369년) 십일월, 모용수는 사냥을 명목으로 몰래 도성인 업성(지금의 하북성 임장)을 떠나, 일가족과 심복을 데리고 용성으로 출발한다. 그러나, 생각지도 못하게 중도에 의외의 일이 벌어진다. 한단에 이르렀을 때, 작은 아들 모용린이 도망가서 되돌아가 고발을 한다. 모용수의 주변에서 도망친 사람들이 많이 나타난다. 서평공 강수가 정예기병을 이끌고 추격하여 범양에 이르렀다. 만일 장남 모용령이 죽을 힘을 다해서 뒤를 막지 않았더라면, 모용수는 거의 범양(지금의 북경)에서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 기밀이 이미 누설되다보니, 무용수는 막다른 골목에 몰려 할 수 없이 전진에 투항한다.


모용린이 부친을 고발한 이유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모용린이 서출이어서, 모용수의 사랑과 인정을 받지 못했는데, 모용린이 이렇게 한 것은 그에 대한 보복이라고 할 수 있다. 둘은 모용린이 소위 대의멸친으로 황제 모용위(慕容暐)의 호감을 사서 관직을 얻고자 했다. 개인적인 원한과 개인의 사욕으로 모용린은 부자간의 정도 포기하고, 자신의 친부에게 칼을 빼든 것이다. 이는 대역무도하다고 할 수 있고, 세상에서도 보기 드문 일이다. 모용수는 모용령등을 이끌고 전진에 투항한 후, 모용린은 전연에 남는다.


부친을 팔아먹었을 뿐아니라, 모용린은 형도 팔아먹는다. 형인 모용령은 그의 밀고로 인하여 죽음을 당한다. 모용수, 모용령 부자가 전진에 투항한 후, 부견(苻堅)의 우대와 중용을 받는다. 그러나 부견의 모사인 왕맹(王猛)은 모용수부자를 심복대환으로 여겨서 그들을 제거하고자, 계책을 써서 모용수의 패도를 편취한다. 그후 왕맹은 모용수의 심복인 김희(金熙)를 매수하여, 김희로 하여금 이 칼을 신물로 하여, 모용수의 명이라고 거짓말을 해서, 모용령으로 하여금 전진을 배신하고 다시 연으로 돌아가게 만든다. 건희11년(370) 정월, 모용령이 속아서 연으로 돌아온 후, 조정의 시기와 의심을 받고, 전진이 파견한 간첩으로 몰린다. 그리하여 북쪽 끝의 사성(沙城, 지금의 북경 서쪽)으로 유배를 가서 변방을 지키게 된다. 모용린은 스스로 나서서 따라가서, 모용령의 일거일동을 감시한다. 오월, 모용령은 변방의 병사들을 모아서 반란을 일으킨다. 모용량(慕容亮)이 지키는 용성을 공격하려 할 때, 모용린은 다시 한번 밀고하여, 모용량이 성을 굳게 걸어잠근다. 그리하여 모용령은 실패하고 결국 피살된다.


비록 모용린이 여러번 부친과 형을 팔아먹었지만, 모용수가 나중에 업성으로 돌아왔을 때, 차마 모용린을 죽이지는 못한다. 그저 그를 외지로 내쫓았다. 그리하여 부자간에 얼굴을 마주하는 일이 거의 없었다. 비수지전이후, 전진은 와해되고, 모용수는 그 기회를 틈타 복국을 꾀한다. 모용린은 적지 않은 계책을 바치고, 모용수는 이를 크게 칭찬한다. 점점 모용린에게 호감을 가진다. 모용수가 후연정권을 건립한 후, 모용린은 무군대장군(撫軍大將軍)에 봉해진다. 그리고 중산(中山, 지금의 하북 정현)을 함락시켜 명성을 크게 떨친다. 후연 건흥원년(386년) 정월, 모용수가 칭제하고, 적자인 모용보를 태자로 세운다. 모용린은 조왕(趙王)에 봉한다. 그후 수년간, 모용린은 남북으로 다니면서 전쟁에 참가하여 전공을 크게 세우고, 후연의 대들보가 된다.


지위와 명성이 올라가면서, 모용린은 점점 후연의 최고권력을 장악하려는 마음을 품게 된다. 그러나 모용수의 후계자는 모용보로 확정된지 이미 오래이다. 그래서 모용린은 고민을 하고, 그 자리를 빼앗을 궁리만 한다. 다만 모용수가 살아있는 한 모용린은 감히 반란을 일으키지는 못하고 그저 시기만 기다렸다. 건흥10년(395) 구월, 보용보, 모용린이 군대를 이끌고 복위의 척발규(拓跋珪)와 대결한다. 척발규는 모용수가 급사했다고 거짓말을 퍼트려 후연군을 와해시킨다. 모용보등은 당황하여 어쩔 줄 모르고 사병들도 놀란다. 조왕 모용린과 모여숭등은 모용수가 진짜로 죽었다고 생각하여, 반란을 일으키기로 모의한다. 모용린을 황제로 옹립하고자 한다. 그러나 일이 누설되어 모여숭등은 죽임을 당한다. 모용보와 모용린은 서로를 의심하게 된다.


모용수의 죽음이후, 모용린은 창끝을 새황제 모용보에 향한다. 모용수는 임종전에 모용보에게 서자인 모용회(慕容會)를 태자로 세우라고 당부한 바 있다. 그러나 모용보는 적자인 모용책(慕容策)을 태자로 세우고 싶었다. 그리하여 모용보는 모용린에게 의견을 물어본다. 모용린등은 모두 찬성했고, 모용보는 마침내 모용린등과 계책을 상의하여, 모용책을 황태자로 세운다. 모용린이 모용책을 황태자로 세우는데 동의한 것은, 겉으로는 모용보의 뜻에 따른 것이지만, 기실 이 기회를 틈타 딴 생각을 품었던 것이다. 첫째, 모용회는 다재다능하고 웅재대략이 있었다. 그러나 모용책은 나이 겨우 11살로 어리석고 총명하지 못했다. 모용회를 놔두고 모용책을 황태자로 세우게 되면 나중에 모용린이 권력을 찬탈하기 쉬워진다. 둘째, 모용회는 모융수시대에 이미 '태자와 동일한 예우'를 받았다. 만일 황태자로 세워지지 않는다면, 반드시 모용보와 갈등이 생길 것이고, 모용린은 그 중간에서 이득을 얻을 수 있다. 과연, 모용보와 모용회는 반목하여 원수가 되어 서로를 죽일 기회를 노리게 된다. 결국 모용회는 실패하여 파살된다.


후연 영강2년(397) 삼월, 후연이 모용린이 획책한 내분에 휩싸여 있을 때, 척발규는 기회를 틈타 후연에 대한 공세를 강화한다. 이 위기의 순간에, 조왕인 모용린은 적을 무찌를 생각을 하지 않고, 일치단결하여 외적을 물리칠 생각을 하지 않고, 심복을 시켜 모용보를 죽이고 모용린을 황제로 옹립케 하여 정권을 찬탈하려 한다. 그는 상서 모용호(慕容皓)로 하여금 모용보를 살해하고, 모용린을 황제로 세우게 하려 했으나, 이 일이 누설된다. 그러자 모용린은 이왕 시작했으니 끝을 보고자, 모용정(慕容精)을 겁박하여 금위군을 이끌고 모용보를 시해하라고 요구한다. 그러나 모용정이 의리를 들어 거절하자, 모용린은 분노하여 모용정을 죽이고, 정령(丁零)으로 망명한다. 후연은 이로 인하여 내란에 휩싸이고, 강적도 맞이한다. 내우외환으로 모용보는 중산을 지켜내기 어렵다고 보고, 모용린이 용성을 점거하여 별도로 정권을 세우는 것을 우려하여, 중산을 버리고 용성으로 간다. 그리하여 중산성은 지키는 사람이 없어지고, 백성들은 어찌할 바를 몰라 동문을 닫지 않았다. 만일 척발규가 입성문제에서 잘못된 결정을 내리지 않았더라면, 성문을 열어둔 중산은 겁난을 피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모용린은 정령으로 도망가는 도중에, 용성으로 도망치던 모용보와 만난다. 모용린은 도둑이 제발저린다고 놀라서 부하들을 이끌고 남쪽으로 도망친다. 망도(望都, 지금의 하북성 망도)에서 다시 중산수비장수 모용상(慕容詳)의 기습을 당해 어쩔 수 없이 산림으로 도망친다. 칠월, 정령에 칩거하고 있던 모용린은 변장을 한 후, 몰래 중산으로 돌아온다. 이미 황제를 칭한 동족 모용상을 죽이고, 스스로 황제에 오른다. 연호는 연평(延平)이라 한다. 용성에 있던 모용보와 분정항례(分庭抗禮)한다. 그러나, 중산은 척발규에게 포위된지 이미 오래 되었고, 성안의 양식도 다 떨어졌다. 장병들은 기아에 시달혔다. 모용린은 부득이 신시(新市, 지금의 하북성 신락)로 옮겨가서, 척발규와 최후의 결전을 벌인다. 십월, 모용린은 패배한다. 스스로 황제의 칭호를 버리고, 조왕으로 칭하며, 남으로 도망쳐 업성으로 간다. 거기에 주둔하고 있던 숙부 모용덕(慕容德)에 의탁한다. 그리고, 모용덕으로 하여금 군대를 황하이남으로 옮기도록 종용한다. 다음 해(398) 정월, 모용린이 재삼 권하자, 모용덕은 남연(南燕)정권을 건립하고 스스로 연왕이 된다. 그리고 모용린을 사공, 영상서령에 봉한다.


모용린이 모용덕을 남천하게 한 것은 표면적으로 보면 모용덕이 북위군의 공격을 피하게 한 것이지만, 기실 자신이 나중에 재기할 수 있는 준비를 한 것이다. 첫째, "하간에서 기린이 나타났다고 한다. 모용린은 이를 자신을 위한 상서로 생각한다." 모용린이 보기에, 황하에서 기린이 나타난 것은 특이한 현상이고, 자신의 이름과 부합하니, 하늘이 자신을 다시 등극시키려는 길조라고 여긴다. 그래서 고향인 업성을 최우선 선택지로 고른 것이다. 그러려면 모용덕을 이곳에서 내보내야 했다. 둘째, 모용덕이 뿌리깊은 업성을 떠나게 하여, 기반이 없는 활대(하남성 활현)로 가게 한 것은 모용린이 모용덕을 폐위시키고, 스스로 황제에 오르는데 편리하기 때문이다. 그 달, 야심만만한 모용린은 정변을 모의하나, 아직 손을 쓰기도 전에 발각된다. 모용덕은 과감하게 그에게 자살을 명한다. 어디에 묻혔는지는 불명확하다. 모용린은 한평생을 간사하게 지내다가 결국 최후도 비참했다. 이는 스스로 보응을 받은 것이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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