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풍기장림(風起長林)
위진남북조 300년의 역사를 살펴보면, 중화대지에서 군웅들이 서로 싸우며 각국의 영토는 계속 변화했다. 그러나 이 난세에 농남(隴南)에 위치한한 소국은 마치 난세의 구경꾼과 같았다.
십육국의 명단에 이름을 올리지는 못했고, 남북조가 쟁패하는 대무대에서 그의 모습을 볼 수는 없지만, 이 조용히 농남에 웅크리고 있으면서 세상과 다투지 않았던 소국은 3백년이나 존속해하여 강대했던 전진, 후조등 대국들보다 훨씬 긴 수명을 자랑했다. 그 나라는 바로 저(氐)족이 건립한 구지국이다.
저족을 얘기하자면 우리가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은 전진(前秦)의 부견(苻堅)이다. 만일 비수지전의 패배만 아니었다면 그는 아마도 난세를 끝내고 중국을 통일하였을 것이다. 또 다른 유명한 저족은 바로 성한국(成漢國)의 이씨(李氏)들이다. 관중의 유민을 이끌고 남하하여 한중의 우두머리가 된다. 그들은 이곳에서 40여년간 6명의 황제를 배출한다.
이들과 비교하자면, 구지국을 건립한 양씨집단(楊氏集團)은 역사상 그다지 두드러지지 않는다.
양씨가족은 원래 약양청수(略陽淸水) 저족이다. 진한시기에 농우(隴右)에 정착한다. 양등(楊騰)에 이르러, 동한말기가 되고, 황건적의 난이 일어난다. 양등도 중원각지의 군벌들과 마찬가지로, 할거하여 독립한다. 적벽대전후, 위,촉,오의 삼국이 정립한다. 조조 휘하의 3대군단은 각각 농서, 형주와 합비를 겨냥한다.
양주(凉州)방면의 마초(馬超)가 모반을 일으켜, 조정에서 관직에 있던 부친 마등(馬騰)이 죽는다. 이때 양씨집단은 마초를 따라 반란을 일으킨다. 그 결과 조위대군 하후연(夏侯淵)의 공세를 버티지 못하고 마초를 따라 유비에 투항한다. 순식간에 수십년이 흘렀고, 양등의 5대손인 양비룡(楊飛龍)에 이르러, 서진이 삼국시대를 끝낸다. 양비룡은 적절히 중앙정부에 투항하여 정서장군(征西將軍)이 되어, 부족을 이끌고 약양(略陽)의 조상들 고향으로 돌아와 조용히 지낸다
실제로, 촉한때이건 서진때이건, 부락호족인 양씨집안은 항상 반독립상태로 강대한 정권에 의탁해 있었다. 유씨집안과 사마씨집안의 군주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에게 '자치'권한을 주면서 자신의 영토내에서 말썽만 피우지 않으면 된다고 여겼다.
만일 태평성대라면, 이들 부족의 호족은 통일제국의 황제를 두려워했을 것이다. 그리하여 조용히 말을 잘 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서진은 사마충이라는 천치황제를 세웠고, 각진의 번왕들이 연이어 거병한다.
조정은 팔왕지란을 처리하느라 정신이 없었고, 이들 지방의 호족을 신경쓸 겨를이 없었다. 나중에 강하(江夏) 일대의 장창(張昌)이 유민을 이끌고 반란을 일으켜, 주군을 빼앗는다. 내란이 어느 정도 진정되자, 일찌기 중원을 노리고 있던 유연(劉淵)의 흉노대군이 기세등등하게 쇄도한다. 영가지란으로 의관남도(衣冠南渡)하며, 북방은 혼란상태가 된다.
일찌기 진혜제 원강6년, 양비룡의 후계자인 양자 양무수(楊茂搜)는 사천가를 이끌고 구지로 간다. 그리고 자칭 보국장군, 우현왕(右賢王)이 되어, 국가를 건립하니 역사에서 구지국이라고 부르는 나라이다. 구지국이 관할하던 영토는 무도(武都), 음평(陰平)의 2개 군, 즉 오늘날의 농남(감숙남부)의 대부분 지역이다. 비록 스스로 왕을 칭했지만, 양무수는 진나라황실을 정삭(正朔)으로 모신다.
그후에 서진, 전조, 후조, 전진을 거치면서, 수십년동안 사마월, 유요, 석호등 효웅들이 한때 강성했다가 금방 사라진다. 그 동안 구지국의 역대 양씨 군주들은 국력이나 병력으로 보아 이들 중원대국의 적수가 될 수 없다고 여기고, 누구든지 북방을 차지하면 칭신하곤 했다. 원리 이런 생활이 지속될 수 있었는데, 생각지도 못하게 구지국 내부에 내분이 일어나게 된다.
다른 왕조들과 마찬가지로, 작은 구지국에서도 마찬가지로 군주의 승계를 둘러싸고 형제간에 다투는 비극이 발생한다.
동진 영화12년, 전 구지국의 군주인 양국(楊國)이 당숙인 양준(楊俊)에게 죽임을 당한다. 양준은 스스로 국왕이 된다. 양국의 아들인 양안(楊安)은 화를 피하기 위해, 전진의 부견에게 투항한다. 그리고, 두 사람은 사돈관계를 맺게 된다.
수년동안, 전진이 장수인 양안은 동진을 격패시키고 내란을 평정하며, 전연을 멸망시키고, 전량과 싸우면서 혁혁한 전공을 세운다. 군자의 복수는 십년도 늦지 않은 법이다. 십오년후, 양안은 도독익,양주제군사이 신분으로 전진 군대를 이끌고 파죽지세로 구지국을 함락시켜 부친의 복수를 한다. 전 구지국은 이렇게 멸망하고, 전진에 편입되어 1군1주로 된다.
이치대로라면 소국의 역사는 여기에서 끝나야 한다. 그러나 전 구지국이 망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부견은 비수에서 패배한다. 십육국 중에서 가장 중국을 통일할 가능성이 컸던 전진은 돌연 해체된다. 일찌기 충성심 강했던 그에게 투항했던 신하들은 이빨을 드러내서 속속 반란을 일으킨다.
양안의 아들이며 부견의 사위였던 양정(楊定)은 부친의 유풍을 이어받아 원래 전진의 군대에서 용맹한 장수였다. 반군장수인 서연의 모용충과 전투하다가 포로로 잡힌다. 그후 후진과 서연의 전투때 기회를 보아 탈출하고, 저족 부족을 이끌고 농우로 가서 후구지국을 건립한다.
그후 수십년간, 유유가 진(晋)을 대체하고, 척발씨가 흥기하며 중국은 남북조시대로 접어든다. 후구지국은 유송이 북벌에 실패한 틈을 타서, 병력을 일으켜 한중을 차지하려고 시도한다. 그러나 오히려 송군에 궤멸당한다. 송문제는 병력을 후구지국의 경내로 파견하여 일거에 후구지국을 멸망시킨다. 마지막 군주인 양난당(楊難當)은 도망갈 곳이 없어지자 북위에 투항한다.
그러나 구지국의 이야기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위,송간의 쟁패가 계속되면서, 북위의 병력이 구지를 점령한다. 양난당의 아들인 양문덕(楊文德)은 기회를 노려 무도로 도망쳐서 소왕국을 건립한다. 그는 저족, 강(羌)족을 모은다. 무도등 오군의 저족이 모조리 그에게 온다.
이 무도국은 삼십여년간 지속된다. 북위 효문제가 양씨집안의 또 다른 종실인 양난당의 동생 양문향(楊文香)을 보내어 공격하여 멸망시킨다. 양문향은 음평을 근거지로 하여 음평국을 만든다. 그리고 백년이 지난 후에 북주에 의해 멸망하며 끝이 난다.
삼백년간 이들 양씨들의 소국은 계속 이어진다. 그러나 이 구지국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다. 마치 봄바람이 불면 풀이 다시 살아나듯이. 서진때부터 북주때까지 지속된다.
이처럼 완강한 생명력은 도대체 어디에서 왔을까? 설마 그저 담장위의 풀처럼 강대한 정권에 의탁하여 생존했던 것일까? 기실 그렇지 않다. 구지국이 수백년간 지속될 수 있었던 것은 그 나름의 생존비결이 있었기 때문이다.
먼저, 지리환경상 우세한 점이 있다. 구지국은 진령의 서남측에 위치하고 있는데, 동으로 한중에 접하고, 남으로 재동(梓潼)에 접하고, 북으로 천수(天水)에 연접하고 있으며 서로는 음평과 만난다. 진나라를 등지고 촉을 마주하고 있다. 한중, 관중 및 익주에 모두 일정한 위협이 된다. 그리고 경내에는 산지와 구릉이 많고, 소수의 하곡분지가 있다. 그리하여 '일부당관 만부난개"의 지형이다.
동징 의희팔년 십월, 당시의 후구지국의 군주인 양성은 후진에 반란을 일으켜, 기산을 침략한다. 후진의 황제 요흥은 요숭을 보내어 토벌한다. 당시 후진의 천수태수인 왕송총(王松忩)은 요숭에게 진언하여 말하기를, "선황(후진의 진무제 요장)은 위무개세, 신략무쌍이었는데, 그 어르신조차도 구지를 공격했다가 아무런 성과없이 돌아갔다. 그 원인은 양성 본인이 뭐 대단해서라기보다는 그들이 지형상의 우세를 이용했기 때문이다. 장군에게 건의하건데 경솔하게 공격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요숭은 그러나 구지국은 작은 나라이고, 아무리 대단해도 별 게 있겠느냐라고 생각하여, 선봉장인 조곤으로 하여금 공격하도록 명한다. 그러나 역시 패배한다. 바로 농남의 산과 구릉을 이용하여 공격과 수비를 자유자재로 했기 때문이다. 양씨는 이렇게 난세에서도 나라를 유지할 수 있었다.
다음으로, 외교전략이 신축성있고 변화무쌍했다. 만일 단순히 구지국의 역대군주가 강대한 국가에 이리저리 빌붙기만 할 줄 알았다고 보면 그것은 맞지 않는 말이다. 사실상, 구지국은 지리적인 위치가 중요했다. 남북간의 군사요지이고, 농우지역에서 촉지로 들어가는 유일한 통로이다. 그래서 높은 전략적 가치가 있다.
위나라의 대장 등애(鄧艾)가 바로 음평의 좁은 길을 몰래 넘어가서 강유의 중병을 우회하여 성도를 급습함으로써 촉한을 멸망시킬 수 있었다. 북벌의 전초기지이면서 남하입촉의 문호이기도 하다. 남북의 어느 쪽의 세력이든지 자신의 땅으로 삼고 싶어하는 곳이다. 구지국은 대국의 이런 생각을 이용하여, 그들이 싸우게 만들고, 자신에게 생존공간과 시간을 번 것이다.
그외에, 정치제도가 완비되어 있었고, 고도로 한화되어 있었다. 비록 저족이 건립한 소수민족정권이지만, 구지국은 조직형식에서 한족의 제도를 활용하여 내지와 다를 바 없었다. 그저 지방에서 여전히 씨족부락을 위주로 했다는 것이 다를 뿐이다. <송서.저호전>에 따르면, 구지국의 관직명칭은 승상, 사마, 주목, 자사, 태수등이다. 비록 작은 땅이기는 하지만, 이미 성숙한 관료제도를 갖추고 있었다. 참새가 비록 작지만 오장육부를 갖추고 있다는 것과 같다.
양성이 집권하고 있을 때, 구지국은 자신의 특징을 살려, 옛날의 행정제도를 개혁한다. "여러 사산의 저, 강족을 나누어 20부의 호군으로 조직하고 각각 진수(鎭戍)하게 한다. 군은 두지 않았다." 호군으로 군현을 대체하는 것은 군대를 장악하기 편리했고, 외래침입을 막는데 유리했다. 그리고 저족인의 유목과 농경이 결합된 생활방식에도 적합했다. 이렇게 함으로써, 인구가 상대적으로 희소한 구지국은 전쟁시에 전민개병으로 전투력이 상당한 정도에 이르게 된다.
비록 후세에 구지국을 아는 사람이 적고, 이 농남의 소정권이 십육국의 범주에 들어가지는 못했지만, 그것이 확실히 존재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삼백년간 존속했던 소국으로서 백마에서 온 저족은 전쟁이 일상이던 시대에 완강하게 생존했고, 계속하여 운명과 싸웠다.
지금은 사천성 평무, 구채구와 감숙 문현 일대에 구지국의 후예들이 생활하고 있다. 비록 이만명도 되지 않고, 티벳족에 편입되어 있기는 하지만, 그들의 질박하고 강인한 얼굴에는 여전히 저족조상이 살아왔던 세월을 엿볼 수 있다. 이 민족은 난세에 평범하지 않은 역사를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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