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여화심어(麗華心語)
308년 11월 2일, 흉노대선우 유연(劉淵)이 황제를 칭한다. 등극후에 그는 즉시 아들 유총(劉聰)과 대장 왕미(王彌)를 보내어 서진의 도성 낙양(洛陽)을 공격하게 한다. 당시, 낙양에서 대권을 장악하고 있던 동해왕(東海王) 사마월(司馬越)은 스스로의 목숨을 구하고자, 4만명의 인마와 많은 신하들을 데리고 낙양을 떠나서 동으로 가서 항(項)에 주둔한다. 그리고 다음해 우울하게 세상을 떠난다. 유총은 기회를 틈타 동해왕의 인마를 소멸시키고, 낙양을 함락시킨다. 그리고 진회제(晋懷帝) 사마치(司馬熾)를 포로로 잡아간다. 진회제가 포로로 잡힌 후, 예주자사(豫州刺史) 염정(閻鼎)과 옹주자사(雍州刺史) 가필(賈疋)등은 다시 진무제의 손자인 사마업(司馬鄴)을 황제로 옹립하고 장안(長安)을 도성으로 삼는다. 건안4년(316년) 장안이 포위되고, 이때의 서진왕조는 이미 방어할 힘이 없었다. 진민제(晋愍帝) 사마업은 성을 나가서 항복한다. 서진왕조는 이렇게 멸망한다.
서진(265-315)은 위(魏)의 사마씨가 건립한 국가이고, 서진은 강대한 군사력으로 당시 분열상태이던 중국을 통일했다. 그러나 통치계급 내부의 갈등으로 단기간내에 서진왕조는 와해된다. 그리하여 중국은 다시 분열상태에 들어간다. 서진의 멸망을 한 마디로 개괄하면: "한 여인과 여덟 남자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한 여인'은 바로 가남풍(賈南風)이다. '여덟 남자'는 바로 여덟명의 사마싸 제후왕을 말한다. 기실, 이번 동란에 참가한 사람은 8명만이 아니다, <진서>는 그 중 8을 모아서 하나의 열전에 넣었고, 그래서 역사에서 "팔왕지란"이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기실 그 내막은 더욱 복잡다단하다.
삼국시대, 사마의(司馬懿)는 조조(曹操)의 군사(軍師)로서 오, 촉과 전투를 벌인다. 그의 탁월한 군사정치지휘능력으로 연속하여 조비(曹丕), 조예(曹睿), 조방(曹芳)의 세 황제를 보좌한다. 그렇게 그는 위나라이 실권파가 된다. 위나라 가평3년(251) 사마의가 죽고, 그의 아들 사마사(司馬師), 사마소(司馬昭)가 차례로 권력을 장악한다. 사마소는 권세가 아주 컸고, 스스로 진왕(晋王)에 오르고, 그의 아들 사마염(司馬炎)을 태자로 삼아 위나라를 대체할 준비를 한다. 265년, 사마소가 죽고, 그의 아들 사마염이 위나라황제 조환(曹奐)을 폐위시키고, 국호를 진으로 하며, 수도를 낙양으로 한다. 이것이 바로 중국역사상의 서진왕조이다. 사마염은 바로 진무제(晋武帝)이다.
사마염이 즉위할 때, 삼국중 오나라는 아직 평정되지 못했었다. 그래서 진무제는 등극후에 한 첫번째 큰 일이 바로 동오를 평정하여 천하를 통일하는 것이었다. 280년, 진군은 남하하여 건업(지금의 남경)으로 진격한다. 오주(吳主) 손호(孫皓)는 성을 나와서 항복한다. 이제 위, 촉, 오는 차례로 멸망하고, 중국은 잠시 통일왕조가 나타난다. 통일대업을 완성한 후, 진무제는 십여명의 공로가 있는 사마씨를 왕으로 봉한다. 그리고 진나라초기의 관제, 병제, 법제등 일련의 정치제도를 조정한다. 그러나 진나라의 신하들은 대부분 전왕조의 명문거족이므로, 그들이 제기한 정치개혁조치는 많은 경우 자신들의 이익을 지키는 것을 위주로 했고, 그래서 진나라초기의 경제는 그다지 큰 발전이 없었다.
10년후, 태희원년(290), 진무제 사마염이 병사하고, 차남 진혜제(晋惠帝) 사마충(司馬衷)이 즉위한다. 진혜제 본인은 우둔한 사람이다. 나라를 다스릴 능력이 없었다. 그리하여 조정의 대권은 모조리 황후 가남풍이 손에 넘어간다. 사마씨 여러 왕들은 조정이 가남풍의 손아귀에 들어간 것에 불만을 품고, 속속 가남풍을 죽이고 대권을 쥐고자 한다. 그리하여, 진나라역사상 유명한 "팔왕지란"이 발생한다. 그중, 팔왕은 모두 진나라황질의 종친들이다. 그들은 각각 여남왕 사마량(亮), 초왕 사마위(瑋), 제왕 사마경(冏), 조왕 사마륜(倫), 성도왕 사마영(潁), 장사왕 사마예(乂), 하간왕 사마옹(顒), 동해왕 사마월(越)이다.
299년, 조왕 사마륜이 가남풍과 그녀이 일당을 죽이고, 대권을 장악한다. 그 후 영녕원년(301) 진혜제를 폐위시키고 스스로 황제에 오른다. 이것이 '팔왕지란'의 시작이다. 그후 제왕 사마경, 조왕 사마륜, 장사왕 사마예, 하간왕 사마옹, 서도왕 사마영간에 정권을 차지하기 위한 전투가 계속하여 벌어진다. 306년에 이르러, 동해왕 사마월이 진혜제를 독살하고, 진무제 사마염의 스물다섯번째아들인 진회제 사마치를 황제에 앉힌다. 5년에 걸친 '팔왕지란'은 이렇게 끝이 난다. 서진 후기에 발생한 '팔왕지란'은 진왕조의 원래 쇠약했던 통치력을 더욱 악화시킨다. 서진말기에 이르러, 국내의 인민들이 속속 반란을 일으킬 뿐아니라, 역외의 흉노, 선비족들도 서진을 호시탐탐 노리게 된다.
각지의 유민들이 속속 반란을 일으킬 때, 내천(內遷)한 소수민족의 지배계층도 연이어 거병하여 서진에 반기를 든다. 그중에 유연, 석륵(石勒)이 가장 먼저 반기를 들었다. 유연은 자가 원해(元海)이고, 흉노좌부수(左部帥) 유표(劉豹)의 아들이고, 한화(漢化) 정도가 비교적 높았다. 유표가 죽은 후, 그는 좌부수의 직위를 승계하고, 진혜제때는 오부대도독이 된다. 영흥원년(304년), 유연은 거병한다. 금방 5만명의 규모로 성장한다. 수도는 이석(離石, 산서성 이석)으로정하고 국호를 한(漢)이라 한다. 그리고 자칭 한왕이 된다. 호,한 양족의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귀순한다. 유연은 여러 신하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옛날에 한나라의 천하가 아주 길었고, 백성들에게 은혜를 베풀었다. 나는 한황제의 외조카로 한황제와 형제의 결맹을 맺었다. 형이 죽으면 동생이 있는 것이 왜 안된단 말인가?" 그렇게 국호를 한(漢)이라 한다.
석륵은 갈(羯)족이다. 상당(上黨) 무향(武鄕)에 살았다. 일찌기 가노(家奴)로 팔려간 적이 있다. 유연이 한왕을 칭할 때, 그는 반란에 참가한다. 311년 4월, 석륵은 고현(苦縣, 하남성 녹읍) 영평성에서 십여만 진군을 격패시킨다. 이로써 진나라는 원기를 크게 상한다. 6월, 왕미, 유요(劉曜)등이 낙양을 함락시키고, 왕공이하 삼만여명을 죽인다. 그리고 진회제를 포로로 잡는다. 팔월에는 다시 장안을 함락시킨다. 나중에 진나라ㅏㅇ수 가필등이 관중의 한인들의 지지를 받아 장안을 다시 되찾고, 사마업을 황제에 앉힌다. 그가 진민제이다. 건흥4년(316), 유요가 장안을 포위하니, 진민제는 성을 나와 투항한다. 이렇게 서진이 멸망한다.
진나라는 진무제때 정권을 건립한 이래, 모두 3대 4명의 황제가 있었다. 전후로 겨우 51년간 존속했다. 서진왕조는 중국역사상 최초로 외족에 의하여 멸망한 왕조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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