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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남북조)

두 왕조에서 황후를 지낸 비정황후 양헌용(羊獻容)

by 중은우시 2018. 10. 30.

글: andy


먼저 진혜제(晋惠帝)의 황후로 있었고, 나중에는 흉노이 전조(前趙)에서 헌문황후(獻文皇后)로 있었던 양헌용은 일찌기 6변 폐위되고, 7번 황후에 오르며 두 나라의 황후를 지낸다. 그녀는 역사상 가장 비참하면서도 가장 운이 좋고, 가장 전설적인 황후중 한 명이다.


양헌용은 한위진(漢魏晋)시기의 명문거족중 하나인 태산양씨(泰山羊氏) 출신이다. 서진의 개국공신이자, 오나라를 멸망시킨 공신이고 저명한 전략가, 정치가 겸 문학가이며, 정남대장군, 거평후(鋸平侯)인 양호(羊祜)의 질손녀이다. 그녀의 당고모할머니(양호의 언니)는 사마의의 장남인 사마사(司馬師)의 정실부인인 경헌황후(景獻皇后) 양휘유(羊徽瑜)이다. 양호로부터 시작하여 9대를 거슬러 올라가면, 태상양씨는 매 대마다 2천석이상의 고관귀족이 있었고, 모두 청렴하고 덕망이 있는 것으로 이름있었다. 조부인 양근(羊謹)은 조위시기에 상서좌복야의 관직에까지 오르고, 부친 양현지(羊玄之)는 진혜제때 상서랑을 지낸다.


영강원년(300년) 겨울십일월, 한혜제 사마충의 숙공, 태자태부, 거기병영우군장군, 조왕 사마륜(司馬倫)이 신하 손수(孫秀)와 설계하여, 먼저 가황후(賈皇后)를 유인하여 이미 그녀에 의하여 폐위되어 금용성(金墉城)에 유폐되어 있던 폐태자(廢太子) 사마휼(司馬遹)을 죽이게 하고, 다시 민회태자(愍懷太子) 사마휼의 복수를 한다는 명목으로 궁중정변을 일으킨다. 그리고 진혜제의 조서를 위조하여 악행이 심했던 가황후를 죽인다. 이렇게 하여 황후의 자리가 공석이 된다.


상서랑 양현지는 딸 양헌용이 황후의 자리를 잇게 하고 싶었다. 그의 장인인 평남장군, 연주자사 손기(孫旂)는 중서감 손수와 사이가 좋아서 손수가 극력 추천하여 양현용은 권신인 상국 겸 조왕 사마륜에 의하여 진혜제 사마충의 신황후가 된다(1립, 당시 나이 16-18세였을 것이다). 이때 진혜제 사마충은 이미 41살이고, 양현지보다도 나이가 많았다. 그리고 더욱 멍청해지고 약해져 있었다. 그러나 양씨집안은 진혜제에 이르러 더 이상 집안이 혁혁하지 못했고, 양현지는 그저 현학(玄學)에만 몰두하여, 정치적 식견은 없었다. 그저 부귀를 탐하여, 딸이 황후에 오르니 기뻐하여 마지 않아싿. <진서.후비전>의 기록에 따르면, 양헌용이 입궁하여 혼례를 치를 때, 혼의(婚衣)가 아무런 이유없이 불이 붙었고, 주위에서는 모두 불길하다고 귓속말을 했다. 결혼 후 황후의 부친 양현지는 과연 딸의 덕에 광록대부에 오르고, 흥진후에 봉해진다. 그러나 겨우 3개월만인 영녕원년(301년) 춘정월, 상국, 사마륜이 황위를 찬탈한다. 그리고 질손자 진혜제 사마충은 명목만 남은 '태상황'이 되고, 일가족은 금용성에 유폐된다. 양황후도 자연히 폐위된다(1폐), 삼월, 삼왕(제왕 사마경, 성도왕 사마영, 하간왕 사마옹)이 거병한다. 사월, 좌위장군 왕여(王輿)는 상서, 광릉공 사마최(司馬漼, 진혜제의 당숙)와 궁정정변을 일으켜, 중서감 손수등을 참하고, 사마륜을 죽인다. 그리고 진혜제 사마충을 다시 궁으로 불러들여 복위시킨다. 양황후도 자연히 복위된다(2립, 폐위된지 3개월만임). 양황후의 외할아버지 손기의 일가족은 손수에 연좌되어 멸족된다. 그러나 황후의 부친 양현지는 운이 좋았다. 대사마, 제왕 사마경(진혜제의 당제)과 태위, 장사왕 사마예(진혜제의 서제)가 권력을 잡았던 시기에 처벌을 받지 않았을 뿐아니라, 여전히 권세를 누린다. 관직은 상서우복야에 이르고, 작위는 흥진공에 이른다.


그러나, 좋은 시절이 오래가지는 않았다. 2년여후, 즉 태안2년(303년) 팔월, 하간왕 사마옹(진혜제의 당숙)과 성도왕 사마영(진혜제의 서제)가 권신 태위, 장사왕 사마예를 토벌한다는 명목으로 난을 일으키고, 양황후의 부친인 상서우복야 양현지등을 주살하라고 청한다. 양현지는 우울증에 빠져 죽는다. 다음 해인 영흥원년(304년) 정월, 태위 사마예는 동해왕 사마월(진혜제의 당숙)등의 배신으로 사마옹의 장수 장방(張方)에 의해 구사(灸死)한다. 성도왕 사마영은 승상이 되어 권력을 독점하고, 이월에는 황후 양씨와 태자 사마담(司馬覃, 청하왕, 진혜제의 조카, 진혜제는 후사가 없어, 권산 대사마 제왕 사마경이 그를 황태자에 앉혔다)을 폐위시키고, 금용성에 유폐시킨다(2폐). 칠월, 사공, 동해왕 사마월은 우위장군 진진(陳眕)과 낙양에서 병변을 일으켜, 업(鄴)에 주둔하고 있던 권신 승상이자 황태제 사마영을 토벌하고, 황후 양씨와 태자 사마담을 복위시킨다(3립, 5개월간 폐위되어 있었음).


사공 사마월은 이어서 진혜제를 받들고 북으로 업을 정벌하러 나서나 황태제 사마영에게 대패당한다. 황태제 사마영은 어지러운 싸움 속에서 진혜제를 맞이하여 업으로 데려가고, 사마월은 하비(下邳)로 도망친다. 팔월, 태재, 하간왕 사마옹이 우장군, 풍익태수 장방을 관동으로 보내어 황태제 사마영을 지원한다. 진진과 낙양수비군이 패배하고, 태자 사마담은 장방을 맞이하여 낙양으로 들인다. 장방은 황후 양씨와 태자담을 폐위시킨다(3폐). 안복장군, 도독유주제군사 왕준(王浚)과 사공 사마월의 동생이자 병주자사, 동영공인 사마등(司馬騰)은 오환(烏桓)과 단부선비(段部鮮卑)의 기병과 힘을 합쳐 황태제 사마영을 공격하여 대패시킨다. 그리고 업을 함락시킨다. 황태제 사마영은 패배하자, 진혜제를 데리고 남으로 낙양으로 도망친다. 이때부터, 장방이 병력을 가지고 권력을 농단하며, 군대는 경사일대를 대거 약취한다. 십일월, 장방은 진혜제, 황태제 사마영등을 겁박하여 낙양을 떠나 서쪽으로 태지 사마옹의 주둔지인 장안으로 간다. 상서복야 순번(荀籓), 사례교위 유돈(劉暾)등은 경사 낙양에 유대(留臺)를 설치하고, 정무를 본다. 유대는 다시 황후 양씨를 복위시킨다(4립, 폐위된지 3개월)


반년후, 영흥2년(305년) 여름사월, 권신 중령군, 녹상서사 장방은 다시 황후 양씨를 폐위시킨다(4폐). 얼마 후 이미 죽은 태위, 장사왕 사마예에 충성하는 태주자사 황보중(皇甫重)의 양자 황보창(皇甫昌)은 사공 사마월의 명이라 사칭하고, 양황후를 금용성에서 맞이하여 낙양궁으로 데려간다. 양후의 명으로 병력을 일으켜 장방을 토벌한다. 그런데 일이 잘 진행되지 않아 황보창이 주살된다. 칠월 사공월은 격문을 보내어 산동의 각왕, 정진으로 하여금 "장방을 토벌하고, 진혜제를 맞이하여 수도로 돌아간다"는 명목을 내걸고 병력을 일으켜 권신인 태재 사마옹을 공격한다. 십일월, 입절장군 주권(周權)은 자칭 평서장군이라 칭하며, 사공월의 명이라 사칭하며 양황후를 복위시킨다(5립. 폐위7개월만). 그러나 주권은 그 후에 낙양령 하교(何喬)에게 패배하고, 하교는 다시 양황후를 폐위시킨다(5폐). 권신 태재 사마옹은 이 기회를 틈타 양황후가 여러반 간사한 무리들에게 황후로 옹립되었다는 이유를 들어 조서를 거짓으로 만들어 유대에 양황후를 사사하도록 한다. 조서가 계속 내려왔지만, 사례교위 유돈은 계속 거절하고 항의하는 상소를 올린다: "양서인(羊庶人)은 집안이 무너지고, 텅빈 궁에 쫓겨나 갇혀 있으며, 엄밀하게 외부와의 연락이 막혀 있었다. 그래서 간사한 자들과 결탁할 수가 없어서, 모두 그녀가 억울하다고 말한다. 지금 이렇게 궁지에 빠진 사람을 죽여서 천하가 그녀의 비참한 처지를 동정한다면 무슨 도움되는 것이 있겠습니까." 태지 사마옹은 대노하여, 사람을 보내어 유돈을 수습하려 한다. 유돈은 청주로 도망가서 사공인 사마월의 동생, 고밀왕 사마략(司馬略)에 의탁한다. 양황후도 이렇게 하여 목숨을 건진다. 일년여의 전쟁을 거쳐, 태재 사마옹은 형세가 궁핍하게 되자, 사람을 보내어 장방을 암살하여, 그의 머리를 가지고 화의하고자 하나 거절당한다. 다음 해, 즉 광희원년(306년) 오월 태재 사마옹은 배배하여 장안을 빠져나가 도망친다. 유주자사 왕준은 기홍(祁弘)등에게 그들이 이끄는 선비기병을 이끌고 장안으로 들어가 대가 약탈하며 이만여명을 죽이게 한다. 그 후에 진혜제를 소가 끄는 수레에 태워 동쪽으로 돌아온다. 육월, 진혜제 사마충이 낙양으로 돌아오고, 다시 양황후를 복위시킨다(6립, 7개월만임)


5개월후, 즉 그해 십일월, 진혜제 사마충은 떡을 먹다가 중독되어 사망한다. 양황후는 저내자인 청하왕 사마담(진혜제의 조카고, 이미 우장군 장방에 의하여 폐위되었다)으로 하여금 황위를 승계하도록 하여 황태후의 명의를 가지려 하나, 권신 태부, 동해왕 사마월의 반대로 이루어지지 못한다. 태부 사마월은 황태제 사마치(司馬熾, 진혜제의 막대동생으로 권신, 태재, 하간왕 사마옹이 세움)로 하여금 황제위에 오르게 한다. 그가 진회제(晋懷帝)이다. 진회제는 과부가 된 형수 양헌용을 혜황후(惠皇后)로 하여 홍훈궁(弘訓宮)에 거주하게 한다(이때의 나이는 22-24살일 것이다). 그리고 생모이자 진무제 사마염의 중재인인 왕원희(王媛姬)를 황태후로 추존한다. 그후 혜왕황후는 깊은 궁궐에 살명서 과부로 지낸다. 그녀의 어린 딸 청하공주(淸河公主)와 같이 쓸쓸하게 살아간다. 


양헌용은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 좋은 자질을 자기고 간신 손수의 추천으로 황후의 자리에 오른다. 황후가 된 후에는 사마륜, 사마경, 사마예, 사마영, 사마옹, 사마월등 여섯 왕의 골육상쟁에 휘말린다. 그녀는 아무런 잘못이 없으나 5번이나 폐위되어 서인이 되어 금용성에 유폐된다. 두 번은 다른 사람들에게 그녀의 명의를 도용당해서 모반의 구실로 삼는다. 그리하여 하마터면 '사사'될 뻔한다. 갇혀 있는 기간이 2년여에 달한다. 그녀는 황후이지만 황후로서의 존엄은 누리지 못한다. 오히려 권신과 종왕 심지어 장방, 하교와 같은 장수들에게 모욕을 당하며 이리저리 끌려다닌다. 이전의 혜후 가남풍은 추악하고 질투심이 많으며 야심이 컸다. 황후로 십년간 있으면서, 태후의 부친인 태부 양준을 죽이고, 이어서 모태후 양지를 폐위시키고 죽였으며 양씨일족을 멸문시킨다. 여남, 초은의 두 왕을 주살하고, 민회태자 사마휼을 폐위시켜 죽이며, 포악하고 잔악했으며 악행을 많이 저지른다. 실로 그녀야말로 중화대지에 3백년의 여독을 남긴 '팔왕지란'의 시작용자이다. 그러나, 그녀는 권력을 농단하고, 발호했으며 호화사치의 극을 달렸고 천하의 부귀영화는 다 누렸다. 혜양후는 그녀와 비교하자면 실로 천양지차이다. 왕전히 무고한 피해자이다. 그래서 천하의 사람들이 모두 그녀를 불쌍하게 여겼던 것이다.


기실, 양헌용이 워험천만하게 권신에 의해 황후의 자리에 올라, 머리가 모자라고 나이든 괴뢰황제 사마충에게 시집을 간 때로부터 비극적인 운명은 결정되었다고 할 수 있다. 진혜제 사마충은 일찌감치 권신들이 쟁탈하는 카드나 도구가 되어 버렸다. 혜양후는 그보다 더욱 난감한 처지였다. 황제이고 황후인 그들은 자신과 가족의 생명안전도 보장하지 못했고, 인신자유도 보장받지 못했다. 하루종일 구차하게 연명하면서 두려움과 굴욕 심지어 배고픔과 추위 속에서 살아야 했다. 황제와 황후의 존엄과 권위는 일찌감치 남아 있지 않았다.


5년후, 영가5년(311년), "영가지란(永嘉之亂)"이 일어난다. 흉노 한(漢)의 대군이 경사 낙양을 함락시킨 것이다. 진회제 사마치는 과부형수 혜양후와 함께 포로로 잡힌다(6폐). 나이 겨우 10살된 청하공주와는 헤어지게 된다. 혜양후는 진나라를 멸망시킨 원흉이자, 흉노 한(漢)의 군주인 유연(劉淵)의 조카이자, 시안왕(始安王)인 유요(劉曜)가 첩(妾)으로 강납(强納)한다(이때의 나이는 27-29살일 것이다).


소위 '강납위첩(强納爲妾)"은 먼저 강간한 후에 그녀를 첩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이것은 '천조상국'의 황후였던 양헌용과 아직 존속하고 있던 대진왕조, 사마씨황족, 명문거족가문과 화하의 한족에게는 모두 큰 치욕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꾹 참고 순종한다. 이것은 '실절(失節)', '배반', '구차하게 생을 탐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진서.열녀전>의 기록에 따르면, 혜황후와 함께 '영가지란'에 포로로 잡힌 민회태자 사마휼의 전 태자비 왕혜풍(王惠風, 고 태위 왕연의 딸)의 행동과는 크게 대비된다. 유요가 왕혜풍을 부하장수 교속에게 하사하자, 왕혜풍은 검을 뽑아들고 항거하며, 죽어도 자신의 존엄과 명절을 지키겠으며, 절대로 욕을 당할 수는 없다고 한다. 교속은 할 수 없이 그녀를 죽인다. 이전에 흉노 한주(漢主) 유연은 교희(喬晞)로 하여금 개휴(介休)를 함락시키게 하고, 진나라 개휴령 가혼이 죽고 그의 처 종씨(宗氏)의 자색이 뛰어나서 교희가 그녀를 취하려 하자, 종씨는 '도각노(屠各奴)"라고 욕하며 끝까지 따르지 않는다. 그래서 교희는 그녀를 죽인다. 그 후에 중산왕 유요는 장안을 함락시키고, 서진을 멸망시킬 때, 진나라 산기장군 양위(梁緯)가 유요에게 죽임을 당한다. 양위의 처인 신씨는 자색이 뛰어나 유요가 취하려 한다. 그러나 신씨는 스스로 목을 매어 남편의 뒤를 따른다. 유요는 어쩔 수 없이 예의로 그녀를 매장해준다. 이 몇명의 '열녀'들의 숭고한 절개와 비교하면, 양헌용은 스스로를 부끄러워해야 할 것이다. 그녀는 원래 대진종실귀족과 관료가문의 '정절'의 모범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양헌용은 절대로 그런 생각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녀는 그저 유명무실한 '황후'였을 뿐이고, 어러번 구금당해서 공포, 굴욕과 '곤궁'함만이 있을 뿐 한번도 황후로서의 존엄과 위신을 가져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전혀 미련이 없었고, 더더구나 순장될 생각은 없었다. 그녀의 유일한 바램은 "반드시 살아야 하고, 반드시 잘 살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때, 양헌용의 인생에서는 가장 바닥을 친 것이다. 그녀는 이미 서인(庶人)보다 못한 오랑케의 포로이자 첩시성노(妾侍性奴)로 전락한 것이다. 그러나 그녀에게 인생의 전기는 바로 이때 마련된다.


유요는 비록 흉노의 도각종이지만, 상모가 기위(奇偉)하고 어려서부터 총명했고, 기도가 비범했으며, 문무에 모두 능했다. 일찌기 중원에 유학온 적이 있고, 경사 낙양에도 가서 한족 문화의 훈도를 받았다. 그리고 당시 한창 나이였다. 이때 역경의 양헌용으로서는 유요에게 일종의 '스톡홀름증후군'의 감정을 느꼈던 것같다. 피해자인 양헌용은 처음에는 생존본능으로 어쩔 수 없이 강간한 유요를 따랐으나, 점점 마음 속으로부터 호감과 의존감이 들게 되고, 기꺼이 그와 생사를 함께 하게 된다. 그녀는 금방 한창 나이의 미모와 서형문제의 특유한 총명함과 분위기로 유요의 은총을 독차지한다. 진왕 유요의 정실부인 복씨(卜氏)가 죽자, 양헌용은 진왕비(秦王妃)가 된다. 그녀는 유요와의 사이에 3명의 아들을 낳는다; 유희(劉熙), 유습(劉襲)과 유천(劉闡)


영가지란이 일어난 7년후, 즉 전조 광초원년(318년) 십월, 흉노 한(漢)나라에 "근준지란(靳準之亂)"이 일어난다. 상국, 진왕 유요는 대장군인 갈호인(羯胡人) 석륵(石勒)과 평양(平陽)으로 가서 난을 평정한다. 유요는 병주 적벽에서 즉위한다. 다음 해, 대사마, 대장군, 조공 석륵은 흉노 한주 유요와 갈라서서 나라를 세우고 왕을 칭한다. 흉노 한주 유요는 장안으로 천도하여 국호를 조(趙)로 고치고, 양헌용을 황후로 세운다(7립. 이때는 34-36살이다). 셋째아들 유희(劉熙)는 태자에 오른다. 그리고 나머지 아들들은 모두 왕에 봉해진다. 양황후는 "안으로는 특별히 총애를 받고, 밖으로는 조정에 참여했다." 이때 양헌용은 비로소 황후로서의 권위와 존엄을 느꼈을 것이다. 진혜제 사마청에게서는 얻지 못했던 것을 모조리 배로 얻을 수 있었다.


얼마 후, "근준지란"때 헤어졌던 유요의 차남이자, 진왕세자였던 유윤(劉胤, 고 진왕비 복씨 소생)이 장안으로 돌아온다. 유윤은 어려서부터 영웅의 기질이 있었다. 그리고 어려운 일을 겪고서 살아났다; 그러나 태자 유희는 어려서부터 조심성많고, 힘든 일을 겪기 어려워했다. 그래서 유요는 유윤으로 태자를 바꾸고자 한다. 복씨는 흉노의 귀족4대성 중 하나이다. 호연(呼延), 복(卜), 난(蘭), 교(喬)는 흉노의 4개귀족성이다. 그래서 조정에 태부 호연안을 우두머리로 하는 대다수의 조정신하들은 유요의 생각에 찬동한다. 그러나 유윤의 친외삼촌이자, 복비의 오빠이며, 좌광록대부, 영태자태부 복태(卜泰)가 오히려 나서서 결사 반대한다. 심지어 죽음으로까지 항쟁한다. "유윤의 문무재략은 분명히 세상에서 아주 뛰어납니다. 그러나 태자 유희는 우애롭고 인자하니, 평화로운 시기에 현명한 군주가 될 수 있습니다. 하물며 동궁이라는 것은 ,백성과 신이 관련됩니다. 어찌 가볍게 바꾼단 말입니까. 폐하께서 굳이 그렇게 하시겠다면 신등은 죽음이 있을 뿐입니다. 감히 명을 받들 수 없습니다." 유윤 본인도 반대한다. "부친은 아들들에게 똑같이 사랑을 주어야 합니다. 이제 유희를 내쫓고 신을 세운다면 신이 어찌 편안할 수 있겠습니까. 만일 폐하께서 신에게 적을 물리치는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시면 유희를 보좌하여 성업을 이어가면 되지 않겠습니까. 반드시 신이 유희를 대신해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신은 죽음으로 청하오니 명을 받들지 못하겠습니다." 그리고는 눈물을 흘린다. 유요도 유희는 양황후의 소생이어서 차라 폐위하고 싶지 않았었다. 그리하여 전왕비 복씨를 원도황후(元悼皇后)에 추존하는 것으로 끝낸다.


원래, 양헌용은 당초 원래 정실황후가 있던 황제의 계후로 들어간 망국의 폐후이었고, 한족애첩이며, 흉노귀족대성 출신인 전왕비 복씨와 그 자녀, 가족들과 죽기살기식의 빙탄불상용의 권력투쟁에 쉽게 휘말릴 수 있고, 만일 그렇게 되면 반드시 패배할 수밖에 없는 일이다. 그러나 정반대로, 그녀는 그들과의 관계를 잘 처리했을 뿐아니라, 상대방으로부터 완전한 신뢰, 존중과 충성을 얻어낸다. 이것만으로도 그녀가 가진 선량한 본성과 인간적 매력 그리고 뛰어난 생존지혜를 엿볼 수 있다.


전조 광초5년(322년), 양헌용이 사망한다(38-40살이었을 것이다) 시호는 헌문황후이고, 현평릉(顯平陵)에 후장된다. 황후로서의 풍광과 애영을 다 누린다. 양헌용은 유요와 11년간 부부로 있었다. 그중 황후로 있었던 기간은 겨우 3년이다. 그녀는 정치적 야심이 없었고, 정치적인 업적이 있는 황후도 아니었다. 더더구나 무슨 역사적공헌은 얘기할 것도 없다. 그러나 그녀는 본성이 선량하고, 나쁜 짓을 한 적이 없으며, 뛰어난 생명력과 의지력 그리고 틈바구니 속에서 생존하는 대지혜를 가졌다. 그녀는 천신만고끝에 마침내 아름다운 결말을 얻어낸 것이다.


<진서.후비전>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유요가 이렇게 물었다: '나와 사마가아(司馬家兒)를 비교하면 어떠한가?' 황후가 대답했다; '어찌 나란히 말할 수 있습니까. 폐하는 개기지성주(開基之聖主)이시고, 그는 망국지암부(亡國之暗夫)입니다. 부인 하나, 아들 하나, 그리고 자기 몸까지 셋도 지켜내지 못했습니다. 제왕이라는 귀한 지위에 있으면서 처자식이 여러 신하들의 손에 농락당하게 했습니다. 첩을 당신에게 보냈을 때는 실로 살고 싶은 생각이 없었습니다. 어찌 오늘이 있기를 바랄 수 있겠습니까. 첩은 고귀한 가문에서 태어났고, 항상 세상남자들이 다 그렇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건즐(巾櫛)을 받든 이후부터 비로소 천하에 사내대장부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말로 보면 그녀는 진혜제와 진황실에 대하여 그저 원한과 멸시만 있는 것같다. 흉노인 전조의 황제 유요에 대하여는 아주 존경하고, 만족했다. 그녀는 그야말로 '개기의 성주'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마가아', 사마씨 집안 아이들은 진혜제 사마충을 가리키지만, 넓게는 그의 후계자인 진회제 사마치, 진민제 사마업까자 포함한다. 모조리 '망국의 암부'라 칭한다. 제왕이면서 자신과 처자식을 지킬 능력이나 권위도 없으니 아예 유요와 비교할 수조차 없다는 것이다. 그녀는 포로로 잡혀 평양에 왔을 때 원래 살고 싶지 않았으나, 오늘날의 휘황과 영광이 있을 줄은 몰랐다는 것이다. 뒤의 한 마디는 더욱 심하다. 직접적으로 진나라의 남자들은 모두 진혜제 사마충처럼 '사내대장부'도 아니라는 것이다. 오로지 흉노왕 유요만이 사내대장부라 칭할 수 있다는 것이다.


양헌용의 이 말은 절대로 유요에게 아부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그녀의 진심어린 말이다. 비록 극단적이기는 하지만 충분히 이해가 된다. 정사인 <진서>와 <자치통감>은 모두 이 야사에 속하고 고증이 불가능한 '내실의 사적인 대화'를 기록하고 있다. 기실 그 뜻은 양헌용을 폄하하고, 질책하고, 그녀가 절개를 잃고, 욕을 당한 것을 영광으로 아는 것을 조롱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아마도 원래의 의도와는 다르게 반대로 후인들로서는 더더욱 그녀를 이해하고 동정하게 되었다. 보기에 양헌용은 흉노인 전조에서 보낸 이 십일년이 그녀 개인에게 있어서 가장 휘황하고 가장 행복했던 시간인 것같다.


그러나, 그녀가 전혀 생각지 못했던 일이 있다. 그녀가 '개기의 성주', '사내대장부'라고 보았던 흉노왕 유요는 그녀가 세상을 떠난 6년후에 죽어버리고 나라도 망한다. 전조 광초11년(328년) 십이월, 유석(劉石) 두 조(趙)나라의 생사를 건 결투가 낙양에서 벌어진다. 흉노조(전조)의 유요는 적을 가볍게 보고 술을 마셨다가 갈호조(후조) 석륵에게 패배하여, 십여곳을 찔리고 석륵의 양자 석감(石堪)에게 생포된다. 그리고 굴복하지 않아 석륵에게 살해당한다. 다음 해(329년), 갈호조(후조)의 중산공 석호(石虎)는 흉노조(전조)의 도읍 장안을 함락시킨다. 구월 다시 상규(上邽)를 함락시키고, 흉노조(전조)의 태자 유희, 남양왕 유윤 형제 및 그 종실의 왕공경, 문무백관을 모조리 죽여버린다. 3세5주를 거친 26년의 흉노한조제국은 이렇게 멸망한다. 흉노 도각족(屠各族)은 거의 모조리 죽임을 당한다. 다행스럽게도 헌문황후 양헌용은 7년전에 일찌감치 죽어서 두번째 망국황후의 겁난을 당하지 않을 수 있었다.


<진서.후비전>의 기록에 따르면, 영가지란때 헤어진 양헌용의 어린 딸 청하공주는 전란중에 역시 비참한 운명을 벗어나지 못했다. 어린 나이(겨우 10살정도)에 사람들에게 끌려가서 여러번 팔린 후에 강남 오흥의 부잣집 전씨(錢氏)의 노비가 된다. 거기서 전씨 딸의 잔혹한 학대를 받는다. 다행히 그녀는 부친 진혜제 사마충의 멍청함을 물려받지 않고, 모친의 생존지혜를 물려받았다. 방법을 써서 도망쳐 나온 다음에 관아에 신고하고, 자신이 공주임을 밝힌다. 오흥태수 주례는 놀라서 업에 건업에 보고하고, 이때부터 당숙이자 강동을 다스리던 진나라 승상, 낭야왕 사마예의 보호를 받게 된다. 낭야왕 사마예(司馬睿)는 전씨부녀를 주살하고, 그녀를 건업의 궁안으로 데려온다. 나중에, 동진의 원제 사마예는 그녀를 다시 임해공주로 봉하고, 성년이 된 후에는 조위의 종실인 종정 초국사람 조통(曹統)에게 시집가서 편안하게 일생을 마친다. 71세까지 산다. 임해공주와 그녀의 모친 양헌용은 '영가지란'때 낙양의 궁에서 헤어진 후에 다시는 만나지 못한다.


후세의 당나라사람이 쓴 <진서.후비전>에서 양헌용에 대한 평가는 이러하다: "헌용행란(獻容幸亂), 거욕의영(居辱疑榮)". 그 뜻은 양헌용이 다행히 난세를 맞이하여(여기서 '난'은 화란, 난세의 의미뿐아니라 은근히 유요에게 강간당한 일을 가리킨다), 몸은 굴욕을 당했지만 아마도 그녀 본인은 영광으로 알았을 것이다. 이 말은 기실 유학자의 비꼬는 의미가 들어 있다. 기실은 그녀가 절개를 지키지 못한 것을 질책하고 조롱하는 것이다. 굴욕을 영광으로 여긴 것을 비웃은 것이다. 그러나 이런 질책은 아무런 힘이 없다.


고대 그리스인은 트로이왕자 파리스에게 끌려간 스파르타 왕후인 절세미인 헬레네를 되찾아 오기 위하여, 각 도시국가는 십만의 연합군을 만들어 10년간 트로이전쟁을 벌여 결국 트로이를 멸망시키고, 헬레네를 되찾아 와서 최후의 승리를 거둔다. 그들은 헬레네의 실절과 배반을 질책하지 않았고, 오히려 남자들이 칠혈과 희생으로 그 치욕을 씻었다. 그러나 중국의 전제봉건왕조는 절대로 그렇게 하지 않았다. 제왕이나 야심가의 눈에 '천하', 권세와 비교하면 무슨 가족의 정이나 애정등은 버릴 수 있는 것이고, 별 것이 아닌 것이다. 여자는 그저 남자들의 놀이개이고, 부속품이고 희생물이다. 소위 '여자는 옷과 같다'는 것이 바로 이런 뜻이다. 필요할 때는 입어서 자랑하지만, 싫어지면 바꿔입으면 된다. 잃어버리면 다시 만들면된다. 권력자가 천하를 엉망진창으로 다스려서, 외족이 침입하고 나라가 망할 지경에 처해도 그저 자신의 목숨을 구하고, 실력을 유지하여, 다시 재기할 생각만 하며, 여자들에게는 절개를 지켜, 순국할 것을 요구한다. 귀한 황후의 몸이건 아니면 천한 노비의 몸이건. 설사 황후, 귀비, 왕비, 공주, 공부명부, 부인소저라 하더라도 일단 적의 손에 들어가면 권력자는 그저 죽음으로 순국하라고 요구하지 절대로 도와주지 않는다. 병력을 보내어 구해주지 않았다. 왕왕 혼자 알아서 하도록 놔두고 그 후에 아무도 물어보지 않는다. 사후에 몇 건의 순국한 건을 기려서 표창할 뿐이다. 설사 요행히 도망쳐서 돌아온다고 하더라도, 왕왕 질책만 받고 결국은 버려비는 운명이 된다. 죽지 않고 절개를 잃은 경우에 대하여는 권력자와 도학가들은 속속 지랙하고 욕하며 국가의 치욕이라고 떠든다. 양헌용도 마찬가지이다. 진나라의 황후로서 '영가지란'때 흉노에 포로로 잡혀 평양으로 갔다. 그 후에 진나라황실에서는 아무도 그녀의 행방을 물어보지 않는다. 더더구나 병력을 보내어 구할 생각은 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녀가 진혜제의 황후로 있을 때나 영가지란 후에 당한 고초 때문에 사람들은 모두 그녀를 불쌍히 여겼고, 흉노 전조에서 겨우 3년간 황후로 있었지만, 사람됨이 선량하고 조용했지만, 조국인 진나라에 대하여는 좋은 감정이 없었다. 그러나 진나라에 나쁜 짓은 하지 않았다. 그래서 후세에 그녀를 공격하는 평가에서 비교적 온화하고 관대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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