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남북조)

위진남북조 시기에 나타난 형형색색의 인생관

by 중은우시 2019. 4. 3.

출처: <중국대통사(中國大通史)>(상전, 조대위, 왕화, 조세한 주편)에서


위진남북조시기는 사회가 동탕(動蕩)에 빠져 있어, 노장사상이 성행하고, 불교가 전해져서, 양한(兩漢)이래로 고수되던 "명경행수(明經行修)"의 도덕관이 도전을 받게 된다. 사람들은 자아가치, 생명의의에 대하여 새롭게 평가하게 되고, 새로운 사회도덕준칙은 아직 형셩되지 않아서, 인생관에서 특히 혼란스럽고, 다양하며 형형색색의 모습이 나타나게 된다.


오늘은 위진남북조시기에 대표적인 몇 가지 사회사조를 알아보고, 고대인들의 인생에 대한 사고가 현대인들과 어떤 차이점을 보이는지 알아보기로 한다.


비인생지단촉(悲人生之短促), 탄공업지미성(嘆功業之未成)


이 주제의 대표적인 인물은 조조이다. 그는 실제행동으로 생명은 쉬지 않고 분투하며 계속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인생철학을 실천했다. 이 점은 그의 시사작품에서도 엿볼 수 있다.


조조이 <단가행(短歌行)>에서는 이렇게 적고 있다: "대주당가(對酒當家), 인생기하(人生幾何), 비여조로(譬如朝露), 거일고다(去日苦多). 개당이강(慨當以慷), 우사난망(憂思難忘), 하이해우(何以解憂), 유유두강(唯有杜康).....산불염고(山不厭高), 수불염심(水不厭深). 주공토포(周公吐哺), 천하귀심(天下歸心).


<도관산(度關山)>에서는 이렇게 썼다: "천지간(天地間), 인위귀(人爲貴), 입군목민(立君牧民), 위지궤칙(爲之軌則)"


"하늘과 땅 사이에 사람이 귀하다"는 것은 한위(漢魏)때 인생을 자각한 첫번째 목소리라고 할 수 있다. 더더욱 한나라때의 충효명절(忠孝名節)이 생명보다 고귀하다는 관념은 과감하게 부정한 것이다. 그리고 인생의 짧음을 슬퍼하고, 공업을 이루지 못함을 탄식하는 것도 당시의 주요 주제였다.


생명이 흘러가는데, 공업은 이루지 못했다. 이것은 이 시대 시의 주제이다. 또한 인생의 주제이기도 하다. 바로 이런 인생관념의 변화는 시에서 청신(淸新)과 풍골(風骨)의 문학을 가져오게 된다.


술과 약


술, 약은 양진(兩晋) 사족(士族)의 유행이었고, 풍류였다. 양진때 술, 약에 대하여 각각 치중을 했다. 대체적으로 말하자면, 서진때는 술을 숭상했고, 동진때는 약을 숭상했다.


서진시대에 황제도 술을 마시고, 대신도 술을 마셨다. 관직에 있을 때도 술을 마셨고, 야인이 되어서도 술을 마셨다. 연회자리에는 술이 있고, 시에도 술이 있다. 조정에도 술이 있고, 죽림에도 술이 있다.


모두 잘 알고 있는 시인묵객들 예를 들어, 건안칠자(建安七子), 죽림칠현(竹林七賢)은 대부분 담불논도(談佛論道)를 즐기지만, 이런 장면에서도 빠질 수 없는 것이 술이다. 이문회우(以文會友), 이주회우(以酒會友)는 당시의 유행이었다.


동진의 사족들 중에는 약을 먹는 것이 보편적이었다. 약은 많은 경우 오식산(五食散)이다. 장생불로를 추구하기 위하여 관직을 버리고, 가족을 버리고, 은일(隱逸)하는 경우가 많았다.


<진서.애제기>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황제가 황로지학을 좋아하여, 곡기를 끊고, 장생약을 지나치게 많이 먹어서, 중독되어, 정무를 돌볼 수가 없었다. 숭덕태후가 다시 임조하여 정무를 처리한다."


동진 갈홍(葛洪)의 <포박자. 내편>에는 계통적으로 약을 먹는 것이 장생에 이를 수 있다는 이치를 설명한다. 이를 보면, 갈홍의 장생이론은 심후한 사회적 기초가 있었던 것이다.


술과 약, 보기에 그다지 어울릴 것같지 않은 두 사물의 배후에는 생명에 대한 일종의 인식도 있고, 생명에 대한 일종의 미망(迷妄)도 있다.


종정방의(縱情放意)의 인생관


양진때의 <열자(列子)>에는 인생에 대한 태도과 견해가 담겨 있다. 많은 정도에서 귀족자제의 퇴폐하고 방종적인 정서를 엿볼 수 있다.


위진때의 사인(士人)들은 전체적으로 자각하는 시대였다. 완적(阮籍), 혜강(嵇康) 및 '죽림칠현'은 이 운동의 선구자이다.


사서 기록에 따르면, 혜강은 키가 칠척팔촌(지금으로 보면 180센티미터 이상)이고, 잘생기고 시원시원한 상남자였다.


당시 상류사회의 기풍은 남자들의 음유(陰柔)한 기운을 숭상했다. 혜강은 스스로를 꾸미는 법이 없었다. 거의 씻지도 않고, 어렸들 때 부친을 잃어서, 방종하는 마음이 계속되었다.


같은 시기의 사람들은 여러가지 괴이한 행위를 한다. 이는 당시 허식적인 의례에 불만을 가지고, 멸시하고 항쟁하는 것을 보여준다. 그들이 추구하는 것은 일종의 '전진(全眞)'이다. 그후 원강(元康)시기의 귀족자제의 행위는 바로 완전한 '방종'이 된다.


<양주(楊朱)>는 사람들이 그저 "풍옥미복(豊屋美服), 후미교색(厚味姣色)" 즉 큰 집과 좋은 옷, 맛있는 음식과 예쁜 여자만을 좋아한다고 했다. 이는 전형적인 방종이고, 소극적인 인생이다. 개인의 감각기관만을 만족시키는 가치관과 인생관이다. <앙주>는 인생이 짧다고 탄식한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백년을 사는 사람이 천에 한 명도 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인생이 짧다고 탄식하면서, 사람들에게 욕정이 시키는대로 하라고 한다. 이는 조조가 말한 것처럼 시간을 아껴서 공업을 세우라는 진취적인 사고와는 전혀 다른 것이다.


은유둔세(隱遊遁世)의 추구


은유둔세는 위진때 시작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위진때의 은일둔세는 다른 때와 다르다. 양진의 많은 은일자들은 대부분 정치적으로 성공한 인물들이다. 그들의 은일은 "축어조림초(逐魚鳥林草)"하여 조신양색(調神養色)하기 위함이다.


정사에 단독으로 은일자열전을 두었는데, 이는 <후한서>때부터 시작된다. <후한서>에는 <일민전(逸民傳)>이 있다. 전에 열거된 은일자는 혹은 정치적으로 실패한 인물이거나, 혹은 그 지조를 표명한 사람들이다. 그래서 일민으로 있으면서 천하의 명망을 얻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동진때 대규가 원강을 욕할 때 둔일지인은 "호둔적이불구기본(好遁迹而不求其本)"이라고 욕한다. 


"유전시구(唯錢是求)"의 전신관(錢神觀)


 위진이래 상층이 사족귀족은 욕심이 끝이 없었고, 돈을 목숨처럼 아낀다. 이것은 또 다른 인생관이다. 진나라 사람들이 재산을 비교하고 부를 다투고, 매행착핵(賣杏鑿核)하는 현상이 나타난 것은 바로 그런 무리들을 보여주는 것이다.


진무제때 성공수(成公綏)의 <전신론>이 나온다. 이런 인생관에 대하여 아주 생생하게 묘사하고 폭로했다.


<전신론>에는 이렇게 쓰고 있다: "노중분분(路中紛紛), 행인유유(行人悠悠), 재치재구(載馳載驅), 유전시구(唯錢是求)"


노포(魯褒)도 <전신론>을 썼다. "친지여형(親之如兄), 자왈공방(字曰孔方)"


불교의 허환세계


불경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보리수 아래에서 깨달음을 얻은 석가모니는 이 세상의 일체 중생이 모두 육도윤회의 생사의 바다에서 부침을 거듭하고 있다. 그래서 그지없는 대비심(大悲心)이 일어났다.


진,송의 시인인 도연명(陶淵明)은 <신석(神釋)>이라는 시에서 이렇게 썼다: "입선상소흔(立善常所欣), 수당위여예(誰當爲汝譽). 심념상오생(甚念傷吾生), 정의위운거(正宜委運去). 종랑대화중(縱浪大化中), 불희역불구(不喜亦不懼). 응진갱수진(應盡更修盡), 무부아사려(無復我思慮)"


심지어 유학색채가 짙은 안지추(顔之推)도 <안씨가훈>에서 그의 자손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만일 출가할 수 없으면, "계행을 겸수하여야 하고, 신경써서 읽어야 한다. 그렇게 하여 내세의 진량(津梁)으로 삼아야 한다." 이는 불교가 당시 사람들의 인생관에 널리 영향을 주었음을 말해준다.


불교가 사람들에게 말하는 것은 극락세계인데, 현실 생활에서 전쟁의 두려움, 빈곤, 기아로 시달리는 중하층 인민들이 보기에 아주 유혹적인 세계이다. 그런 곤혹과 미망에 빠진 사인들은 여기에서 정신적인 위자를 얻는다.


위에서 말한 여러가지 인생관은 개체의식으로 말하자면, 어느 시대에서건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집단의식으로 나타나는 것은 다른 어느 시대에서도 없었던 일이다. "오로지 술만 마시겠다"는 것도 좋고, "오로지 돈만 쫓겠다"는 것도 좋다. 아니면 내세를 기대하는 것도 좋다. 모두 사회를 반영하는 것이고, 생명에 대한 의미를 재정립하는 것이다. 즉 인생의 가치를 재인식하는 과정에서의 곤혹과 이태(異態)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