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남북조)

남조(南朝) 진(陳)의 4명 황제는 모두 선종(善終)했다.

by 중은우시 2020. 7. 10.

글: 풍현일(馮玄一)

 

남북조시대를 얘기하자면 처음 받는 인상은 동탕불안(動蕩不安)하고 살륙이 무수히 벌어지고, 왕조교체가 빈번했으며 황제도 주마등처럼 계속 교체되었으며, 매번 왕조교체마다 혈우성풍이 불었고, 사방에서 살륙이 일어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건강(지금의 남경)에 도읍을 정했던 진왕조는 완전히 예외이다. 진왕조의 4명 황제는 모두 선종했다. 마지막황제인 진후주조차도 선종한다. 아래에서 하나하나 살펴보기로 하자.

 

1. 진무제(陳武帝) 진패선(陳覇先)

 

진패선은 자가 흥국(興國)이다. 이름 자체가 패기넘친다. 그는 어렸을 때 집안이 가난하였으나 뜻은 크게 품었다. 그는 진취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군대에 들어가서 전공을 세워 양(梁)나라에서 자리를 잡는다. 양무제는 불교를 독실히 믿어, 후경(侯景)의 난을 불러왔다. 진패선은 대군을 이끌고 552년 후경의 난을 진압한다. 554년, 양원제(梁元帝)는 진패선에게 대군을 이끌고 왕승변(王僧辯)의 난을 진압하도록 명한다. 같은 해, 진패선은 양원제를 폐위시키고, 소방지(蕭方智)를 황제에 앉힌다. 그후, 진패선은 전후로 군대를 이끌고 여러 반란세력을 진압하고, 반대파를 주살한다. 기본적으로 정적들은 모두 없앤다. 557년 십월, 소방지는 진패선에게 황제위를 넘겨준다. 진패선은 먼저 연호를 영정(永定)이라 하고, 국호를 진(陳)이라 한다. 그가 바로 진무제이다. 진패선은 3년간 재위하고 559년 육월 병사한다. 향년 57세였다.

 

2. 진문제(陳文帝) 진천(陳蒨)

 

진문제의 이름은 요즘 인싸의 이름과 같은 느낌이 있다. 진패선이 죽은 후, 유조에 따라, 진패선의 조카인 진천이 황제위를 계승한다. 그는 559년 부터 566년까지 재위한다. 짧은 황제생애에서 그는 여정도치(勵精圖治)하고, 관리들을 정돈했으며, 농업과 잠업을 보급하고, 수리공사를 했다. 그리하여 강남의 경제가 어느 정도 회복된다. 그의 재위기간은 진왕조 역사상 정치가 깨끗하고, 백성은 부유하고, 국세도 비교적 강성했다. 역사에서는 이 시기를 "천가지치(天嘉之治)"라 부를 정도이다.

 

진천은 566년 사월 병사한다. 향년 45세이다. 비록 수명이 길지는 않았지만, 그는 정치투쟁으로 죽은 것도 아니고, 황음무도했던 것도 아니다. 정치적으로 업적이 상당했다. 그래도 수종정침(壽終正寢)했다고 할 수 있다.

 

3. 진선제(陳宣帝) 진욱(陳頊)

 

진욱도 진패선의 조카이고, 진천의 동생이다. 진문제는 그의 아들 진백종(陳伯宗)을 후계자로 삼아 즉위하게 하고, 진욱을 보좌대신으로 삼는다. 그러나 진욱은 568년 진백종을 폐위시키고, 스스로 황제에 오른다. 570년 사월, 나이 19세의 진백종은 사망한다. 구체적인 원인은 기록되어 있지 않다. 당시의 정국을 고려하면, 진욱이 죽였을 가능성이 크다.

 

진욱은 재위기간동안 계속하여 수리사업을 벌이고, 농민의 생산을 장려한다. 진나라의 사회경제는 지속적으로 발전했고, 국세는 날로 강성해졌다. 573년, 진욱은 북제가 대란에 빠진 틈을 타서 대장 오명철(吳明徹)을 시켜 북벌을 진행하여 북제의 일부 성을 점령한다. 582년, 진선제는 병사한다. 향년 53세이다.

 

4. 진후주(陳後主) 진숙보(陳叔寶)

 

진숙보의 자는 원수(元秀)이며, 아명은 황노(黃奴)이다. 그는 적장자였다. 진선제가 죽은 후, 황위를 계승한다. 그는 재위기간동안 조정을 돌보지 않고, 주색에 빠져 시문과 음악에 심취한다. 그의 부친과 백부가 여정도치하여 회복시킨 국력은 그의 손에서 완전히 바닥난다. 589년 수나라군대가 진나라도성을 함락시키고, 진왕조는 멸망한다. 진숙보는 수나라군대에 의해 압송된다. 수문제 양견(楊堅)은 그를 죽이지 않고, 공(公)으로 봉해주었다. 그리고 그에게 저택도 하사하여, 그가 마음놓고 문예창작을 할 수 있게 놔둔다. 국사에 얽히지 않으니 진후주는 가벼운 마음으로 계속 주색에 탐닉하고, 취생몽사한다. 604년, 진숙보는 낙양에서 병사한다. 향년 52세이다. 수문제는 그를 대장군으로 추증하고, 그의 시호를 양(煬)이라 한다. 이 시호는 당나라의 이연(李淵)이 수문제의 아들 양광(楊廣)에게 준 시호와 같다. 이것도 아이러니라면 아이러니이다.

 

진숙보의 최후는 여러 마지막황제들 중에서 비교적 좋은 편이었다. 그 본인은 말년에도 여전히 쾌락의 생활을 즐겼고, 마지막에 병사한다. 역시 수종정침했다고 할 수 있다. 그의 아들 중에서도 왕조교체과정에서 죽은 자는 없고, 그중 여럿은 수나라에서 관리를 지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