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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사회/중국의 민족

여진족(女眞族)은 만주족(滿洲族)의 전신인가?

by 중은우시 2019. 1. 15.

글: 관첩(關捷)


역사상의 여진족은 바로 만주족의 핵심구성부분인 전신이다. 하나의 민족계보로서, 만주족의 전신은 이러하다: 숙신(肅愼, 서주에서 동주전반기) - 읍루(挹婁, 전국시대에 이 명칭이 나타난다) - 물길(勿吉), 말갈(靺鞨)(남북조, 수, 당시기) - 여진(女眞, 오대, 명).


청태종 홍타이시가 죽위한 후, 광범위한 통일전선을 형성하고, 각민족의 단결을 강화하기 위하여 '만주공동체'를 창건한다. 천총9년(1635년) 십월 십삼일, 그는 족명을 '여진'에서 '만주'로 개명한다. 이때부터 ,만주족의 명칭은 정식으로 세상에 나타난다.


이 중대한 정책이 나옴으로써, 중국의 동북지방에 살고있던 건주여진, 해서여진, 동해여진, 한, 몽골, 조선, 후르하, 솔론등 여러 민족은 모조리 만주족이라는 이름 아래에 들어간다. 만주족이 이렇게 형성된 것이다. 동시에 일부분 여진족 후대는 팔기에 편입되지 않는다. 그리하여 이들은 현재의 혁철족(赫哲族), 악온극족(鄂溫克族), 악륜춘족(鄂倫春族)등이 그들이다. 다만 이들은 만주족의 근친이다. 


당초, 팔기에 편입된 사람들 중에는 상당한 수량의 요동한인(遼東漢人), 몽골인, 소수의 조선인, 심지어 러시아인도 있었다. 팔기내에서 오랫동안 융합과정을 거치면서 철저히 만주족에 융합된다. 예를 들어, 조설근(曹雪芹)의 가족은 원래 한족이지만, 나중에 만주에 편입되었다. 그래서 그들 가족의 이력서를 보면 모두 '만주족'이라고 표시한다. 그들의 전체 가보는 모두 <팔기만주씨족통보(八旗滿洲氏族通譜)>라는 거대한 체제안에 들어가 있다. 공동체내에서 혈통이 가장 '순수;한 것은 건주여진인데 이들은 "불만주(佛滿洲)"(舊滿洲라는 의미임)라 불렸고, 나머지 사람들은 "이철만주(伊徹滿洲)"(新滿洲라는 의미임)라 불렸다. 다만, 기본적으로 지위는 평등했다. '혁명'에 선후는 없다. 모두가 한 형제이다. 홍타이시의 이런 조치는 그의 넓은 흉금을 보여준다. 그리고 높고 큰 이상을 드러낸다. 만주인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번의 위대한 역사적 혁명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명나라에 절망한 각지 인민들은 관내의 많은 한족동포를 포함해서, 속속 대청의 깃발아래 뭉친다. <팔기만주씨족통보>에는 모두 1,114개의 성씨(姓氏)를 수록하고 있는데, 모든 성씨의 앞에는 모두 "모모년 내귀(來歸)"라고 표시해 놓았다. 이를 보면 당시에 천하의 인심이 만주족을 향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완안(完顔) 성씨는 여진족의 저명한 성씨이다. 완안씨는 계속 존재했고, 금나라때는 황족이었다. 청나라때 이 가족은 여전히 휘황한 지위를 누렸다. 건륭51년에 편찬한 <팔기만주씨족통보>의 "씨족지"에는 완안씨를 가장 앞에 두었다. 그리고 곁에는 이렇게 주석을 달았다: "완안은 대금의 국성이다. 우리왕조는 천명을 받아, 금나라의 황족후예들도 오랫동안 팔기구족보에 있었다. 원래는 제28권에 있었다. 지금 성지를 받들어, ㅗㅇ감집람을 본받아 팔기만주의 으뜸으로 편재한다." 이는 건륭이 명을 내려 만든 책이다. 그는 특별히 옹정13년에 편찬한 <팔기만주씨족통보> 제28권에 있던 완안씨를 다시 배열하여 맨앞으로 옮겼다. 이 책의 기록에 따르면 이 당시에 완안씨는 38개의 지맥(支脈)이 있다. 그중 상홍기의 예천(葉臣), 보르진(博爾晋)등은 남작에 봉해졌다. 그외에 대신 완안홍아(完顔洪阿), 성경장군 숭실(崇實), 숭후(崇厚)는 모두 이 가족의 유명인물들이다. 청나라때, 고위관직을 지낸 완안씨는 200명에 가깝다. 


신해혁명이후, 완안씨는 보편적으로 한족성인 왕씨(王氏)로 개성한다. 필자의 몇몇 만주족친구들 중에 왕씨가 있는데 바로 저명한 완안씨에서 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