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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사회/중국의 민족

선비족(鮮卑族)의 유래와 현재의 분포

by 중은우시 2019. 3. 13.

글: 전위장(錢偉長)


북위(北魏)는 선비족이 건립했다. 선비족의 탁발씨족(拓跋氏族)은 일찌기 북위의 왕족이었고, 중국역사상 아주 중요한 지위를 차지한다. 개략 3세기말때, 선비족은 평성(平城, 지금의 大同)을 점령하고 이곳을 수도로 삼는다. 당시 북방의 여러 민족이 중원을 침입할 때, 모두 대동을 거쳤다. 다만 선비족만이 성공적으로 대동을 점령한다. 중원민족(염황민족)은 북방에서 침범하는 민족을 상대하는데 큰 힘을 쏟는다. 그때 쟁탈의 촛점은 바로 대동이었다. 어떤 때는 대동이 중원민족의 손에 들어왔고, 어떤 때는 대동이 북방민족의 손에 들어갔다. 옛날에, 하남(河南)을 중심으로 한 지역을 중국이라고 불렀다. 사방은 사방국(四方國)이었따. 동쪽은 동이(東夷), 남쪽은 남만(南蠻), 서쪽은 서융(西戎), 북쪽은 북적(北狄)이라고 불렀다. 중간에 거주하는 염황민족은 사방국에 대하여 동화시키는 과정에 힘쓴다. 대동의 뜻도 동화(同化)라는 것이다.


선비족은 원래 대흥안령 북록의 석동(石洞)에서 발원했다. 알선동(嘎仙洞) 부근에 현재도 유적지가 있다. 그중 척발부는 흑룡강, 눈강(嫩江)유역에 거주했다. 선비족의 인원이 늘어난 후, 만주리의 후룬베이얼(呼倫貝爾)초원을 점령한다. 초원에는 목초가 풍성했고, 이 민족은 후룬베이얼초원에서 급속히 성장한다. 7대도 내려가지 않아서, 이 지역만으로는 선비족의 수요를 만족시킬 수 없게 된다. 그리하여 선비족의 한 갈래는 남하한다. 열하(熱河, 승덕일대)를 지나 현재의 연경(延慶)으로 들어온다. 나아가 장가구(張家口)와 대동(大同)까지 차지해 버린다. 대동에서 수십년간 머물렀다. 처음에는 문관무관의 구분이 없었다. 모두 무관이었다.


나중에 우두머리가 대동에 온 후에, 선진문화를 흡수하는데 주의했고, '이민족'의 중원문화를 호의적으로 대했다. 그리고 일부 중원의 학문이 있는 자들을 관리로 기용했다. 그리고 동족인이 한족여인과 결혼하는 것을 장려한다. 문성제(文成帝)에 이르러, 그 자신이 한족인 풍(馮)씨성의 여인과 결혼한다. 그녀가 나중의 풍태후(馮太后)이다. 그녀는 북위의 첫번째 한족 황후였다. 풍황후는 불교를 믿었고, 그래서 문성제도 불교를 믿기 시작한다. 이때부터 원래 중시되던 도교가 뒤로 물러나게 된다. 그리고 원래 경시되던 불교가 해금되며 신속히 발전한다. 풍황후는 일찍 과부가 된다. 개략 26세때 태후가 되었다. 개략 37살이 되었을 때, 태황태후가 된다. 이때는 효문제(孝文帝) 시기이다. 불교는 중국북방에서 유례없이 발전하고, 각지에서 앞다투어 절을 짖고 불상을 만든다. 그리고 석굴을 대거 조성하고, 비석을 세운다. 이리하여 중국역사상 독특한 석굴예술과 비각예술이 발전하게 된다.


서진(西晋) 말기, 선비족이 내몽고의 시린궈러(錫林郭勒)지구에 거주하고 있을 때, 탁발규(拓跋圭)는 '대왕(代王)'이라 칭한다. 나중에 다시 '위왕(魏王)'이라 칭한다. 역사상 그를 도무제(道武帝)라 부른다. 도무제는 '남진'의 큰 뜻을 품었을 뿐아니라, 중원문화를 흠모했다. 그리하여 극력 한족문화를 배운다. 그러나 전쟁이 빈번하여, 전면적으로 한화정책을 실행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도무제로부터 헌문제(獻文帝)에 이르는 기간동안 북위의 강역은 더욱 확장되어, 동으로는 발해에 이르고, 남으로는 위수(渭水), 황하(黃河) 일선에 이르며, 서로는 진주(秦州), 하주(河州)와 양주(梁州) 일선에 이른다. 효문제에 이르러, 사회는 전체적으로 안정되었다. 그리고 선비족이 중원에 들어온지 이미 100년이 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많은 문제를 안고 있었다.


선비족이 직면한 것은 한족의 기층백성이 있으나, 통치자는 선비족이어서 언어가 달랐다는 것이다. 그래서 지휘할 수가 없었다. 심지어 세수도 제대로 거두지 못했다. 그리하여, 중원문화를 받아들이고 흡수할 필요가 있었다. 중원의 한민족을 단결시키고 융화시킬 필요가 있었다. 그래야 북위왕조가 굳건해질 수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효문제는 낙양으로 천도를 결정한다. 다만 선비왕실, 귀족으로부터의 반대가 만만치 않았다. 효문제는 아주 총명했고, 계모를 썼다. 전투를 한다고 하면서, 대거 정벌전쟁을 벌이는 기세를 취한다. 그러자 사람들이 동의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렇게 낙양으로 옮겨간다. 동시에 대동에서 적지 않은 선비족 백성들을 데려간다.


그러나 낙양에 도착한 후, 효문제는 일련의 정책을 제정하여 전면적인 한화를 추진한다. 먼저, 대소 칸(可汗)의 군마를 하남의 각지로 분산시켜, 통치에 편리하게 한다. 다만 중원인을 통치하려면 반드시 중원말을 알아야 했다. 그리고 많은 관리를 두어야 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그래서 효문제는 몇 가지 조치를 취하기로 결정한다.


첫째는 한어를 배워서 쓰는 것이다. 한어를 배우지 않으면 통치할 수가 없다. 아랫사람들이 알아듣지 못한다. 그래서 할 수 없이 한어를 배운다. 그리고 대소관리들에게 선비족언어를 쓰지 말도록 명한다. 이를 어기면 강급시키거나 면직시키겠다고 한다.


둘째는 한족성으로 개성한다. 그때 중원한족은 성씨의 문벌을 많이 따졌다. 그리하여 효문제는 성을 고치도록 명한다. 한편으로 황실종친과 부락대인의 한성을 확정한다. "팔씨십성(八氏十姓)"과 "삼십육족구십이성(三十六族九十二姓)"이다. 이들 성씨의 사람들은 나중에 "하남 낙양인"이라고 칭한다. 다른 한편으로 선비족의 성을 한족성으로 고친다. 동시에 더 나아가 선비족과 한족의 통혼을 장려하고 심지어 선비족의 동성결혼을 금지하기까지 한다.


셋째는 관리들에게 더 이상 대소 칸과 병마를 관할하지 않고, 행정구역을 관할하도록 한다. 구역을 나누어 하나하나 관할하는 것이다. 대칸은 황제로 칭하고, 역대 조상들도 00제(帝)로 칭한다. 이런 변혁을 통하여 양초와 세수를 거두어들일 뿐아니라, 선비족과 한족이 더욱 융합할 수 있게 되었다. 성씨를 고친 후의 선비족은 한복(漢服)을 입었고, 더 이상 호복(胡服)을 입지 않았다. 이런 변혁은 중원사회의 여러 방면에서 큰 영향을 미친다.


가장 두드러진 것은 


첫째, 언어상의 영향이다. 그들은 한어를 배우면서 평상거입(平上去入)의 4성중 겨우 3성만 발음할 수 있었다. 제2성인 입성(入聲)은 발음하지 못한다.  입성은 말등에서 말했을 때 멀리 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입성은 양평상성(陽平上聲)으로 고쳐진다. 그러나 북위의 앞 왕조인 서진의 언어는 4성이고 운(韻)이 있었다. 나중의 광운(廣韻)이다. 서진의 일부 사람들이 남으로 도망쳐서 광서광동일대에 거주한다. 나중에 양광사람들은 그들을 객가인(客家人)이라고 부른다. 객가의 언어는 바로 4성이다. 그리고 그곳에소 운(韻)이 있다. 그러나 광운은 아니다. 또 다른 운인데, 관운(官韻)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보편적으로 쓰이지는 않는 것이다.


둘째는 문자상의 영향이다. 선비족은 한자를 쓸 때 중원인과 달랐다. 글자를 쓰는데 힘을 많이 주었다. 위비(魏碑)의 독특한 서예예술은 바로 그때 형성된 것이다.


셋째는 불교의 영향이다. 불교를 믿는 사람이 갈수록 많아진다. 그리고 불상조각을 많이 만든다. 대동의 운강석굴과 낙양의 용문석굴은 바로 북위의 서로 다른 시기에 만들어 진 것이다. 심지어 분하(汾河)유역의 하류에도 석각벽화가 있다. 홍동(洪桐)의 한 사묘에는 벽화가 있는데, 북위 헌문제가 스님이 되었던 일을 보여준다. 이것은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중국벽화이다. 이 벽화는 계속 홍동의 그 사묘에 있었는데, 나중에 카나다사람이 돈을 주고 사서 가져가 버렸다. 이것은 세계에서 가장 크고, 가장 잘 보호된 고대벽화이다. 현재는 카나다의 국보가 되어 있고,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평상시에는 등을 켜지 않고, 미약한 등광을 켜서 본다 그리고, 보고 난 후에는 등을 끈다. 빛에 노출되면 쉽게 망가지기 때문이다. 안에는 에어컨도 있어 보호를 아주 잘하고 있다. 이 벽화는 아주 유명하다.  국내에서 어떤 사람이 사진을 찍은 것이 있다. 현재, 이 벽화는 카나다 터론토의 온테리오박물관에 있다.


당시, 필자가 국외에 유학할 때 가서 참관한 적이 있다. 나는 화이트라는 목사를 알게 되었는데, 그가 200위안을 주고 매입한 것이다. 그리고 정(鄭)씨성의 목사를 데리고 갔다. 그때 나는 제1차로 중국에서 카나다로 유학한 해외유학생이었으므로 매우 중시하여, 나를 데리고 가서 본 것이다. 나는 마음 속으로 생각했다. 매국도 제대로 했구나.


그래서 북위는 중화문명이 아주 큰 역할을 한다. 북위는 두 가지 민족문화를 융합시킨 산물이다. 전체 산서성에 벽화가 상당히 많다. 석각도 아주 많다. 그러나 현존하는 석각은 이미 그다지 많지 않게 되었다. 벽화, 석각과 위비는 중화문화에 깊은 영향을 끼쳤따. 이들 역사지식은 사서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럼 묻겠다. 그렇게 많은 서비족의 부락이 한성으로 고쳤는데, 현재 그 후예는 어디에 분포되어 있는 것일까? 척발선비외에 다른 지맥의 선비족은 현재 어디로 갔을까?


필자는 서안에 간 적이 있다. 서안박물관내의 한 벽화를 보았다. 그것은 서안북쪽의 고묘에서 가져온 것이다. 젊은 해설요원이 아주 재미있게 설명해 주었다. 그녀는 서북대학 고고학과 졸업생이었다. 원래 나는 역사에 흥미가 많았고, 자연히 그녀가 잘 얘기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그녀에게 성이 무엇인지 물어보았다. 그녀는 목(穆)씨였다. 나는 다시 그녀에게 목계영(穆桂英)의 목씨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그녀는 아니라고 하면서 선비족이 한족성으로 고친 목씨라고 말했다. 목계영과는 관계가 없지만. 글자는 같다고 했다. 확실히, 그녀의 조상은 호족성인 "구목릉(邱穆陵)"에서 "목(穆)"으로 바꾼 것이다. 나는 다시 그녀에게 서안의 주위에 선비족이 얼마나 되느냐고 물었다. 그녀는 개략 3천만명은 될 것이라고 했다. 모두 현재는 한족성으로 바꾸었다는 것이다. 나는 무슨 특징이 있는지 다시 물었다. 그녀는 발음을 들으면 알 수 있다고 했다. 그렇다. 그들의 언어에는 입성이 없다. 한족의 언어에는 입성이 있다. 그러므로, 서북인들이 말할 때 어떤 사람은 입성이 있고, 어떤 사람은 입성이 없다. 소위 서북은 산서와 섬북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곳은 아주 독특한 곳이다. 나는 다시 그녀에게 물어보았다. 그들은 개략 어디에 거주하는지. 그녀는 대동의 주위에 상당히 많다고 했다. 서쪽으로는 편관(偏關)까지, 편관에서 더 서쪽으로 가면 영하(寧夏)이다.


영하는 또 다른 민족이다. 북방민족이 황토고원의 서쪽을 점령한 것이다. 징기스칸이 돌아온 후, 영하족은 모조리 죽임을 당한다. 나중에 북송은 영하족과 1백여년간 싸웠다. 둘은 서로 비겼다. 원래 서북의 고원은 삼림지대였다. 그때는 수목이 아주 많았다. 오랫동안 전쟁을 벌이는 바람에, 나무들이 모조리 물타 버린다. 현재는 나무가 전혀 없다. 회족은 나중에 들어왔다. 징기스칸이 서방에서 돌아올 때, 난주 남쪽의 임도(臨洮)에 도착한다. 다섯 종류의 병마를 이끌고 왔는데, 중간의 몽골족이 위주였고, 중앙아시아에서 온 것이다. 서하족은 징기스칸에게 패배하여 모조리 죽임을 당한다. 나중에 서하 일대의 사람은 징기스칸이 떠난 이후 들어가서 사는 것이다. 징기스칸이 서하를 공격할 때는 요,금이 있던 시기이다. 원나라는 아직 세워지지 않았다. 금은 거란족이 만들었고, 적봉(赤峰)에 있었다. 중원에서 요에 대항하던 것은 양가장(楊家將)이다. 금나라의 침입에 대항한 것은 악비(岳飛)이다. 그러나 원나라에 대항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그때는 원나라가 아직 돌아오지 않았을 때이다. 징기스칸은 임도에서 죽는다. 나중에 몽고로 데려가서 묻었다. 나도 임도에 가서 징기스칸의 영구를 놓아두었던 곳을 가본 적이 있다.


편관일대에서 대동까지는 이백여킬로미터가 된다. 적지 않은 도시가 있다. 나는 그 중의 두 개 도시에 가보았다. 거기의 언어는 아주 특별했다. 입성이 없다. 거주하는 대부분은 모두 선비족의 후예이다.


두번째 문제는 바로 현재 어느 곳에 선비족이 거주하고 있느냐는 것이다. 현재 척발선비가 남하할 때, 일부분은 따라가지 않았던 선비족은 동북지방에 남아 있다. 흑룡강의 남북에 모두 있다. 외흥안령의 서쪽에도 있다. 우수리강의 양안에도 있다. 블라디보스톡일대를 포함하여. 모두 선비족이 살고 있다. 그중 대부분은 네르친스크조약으로 러시아에 편입된다. 자무쓰에는 경박호(鏡泊湖)가 있는데, 거기에는 일찌기 발해국이 있었다. 역시 선비족이 거주하던 지역이다. 다시 나중에 일부 선비족은 심양의 서북쪽으로 간다. 이곳은 십여개의 마을에 모두 선비족이 살고 있다. 이 일대의 선비족은 나중에 역사상 두 가지 사건을 일으킨다.


하나는 바로 발해국이 일찌기 사신을 보내어 당나라의 수도인 장안으로 간 것이다. 국서는 선비족 문자로 썼다. 위에는 반드시 선비족 문자로 회신하라고 쓰여 있었다. 회신이 없으면 출병하겠다는 것이다. 어투가 아주 강경했다. 이는 안록산이전의 일이다. 당나라는 이백을 찾아서 회신하도록 한다. 왜냐하면 이백이 선비족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는 완전히 쓸 수 있었다. 곽말약 선생은 일찌기 이백이 쇄엽성(碎葉城, 지금의 키르키즈스탄의 토크마크, 당나라때 서안도호부)에서 태어났다고 고증한 바 있다. 이곳은 중소우의봉의 남쪽에 있고, 이곳은 선비족이 거주하던 곳이다. 그기의 사람들이 중원으로 오려면 반드시 북강(北疆)의 어얼페이스강과 어얼페이스호수를 따라 계속 동쪽으로 가서 바르진(巴爾津)에 도착하고, 거기에서 강을 건너야 한다. 중국의 또 다른 세개의 유명한 진(津)인 천진, 하진, 맹진은 그때 모두 강을 건너던 곳이었다. 


또 다른 사건은 얘기하자면 길다. 현재 중국의 56개 민족 중에서 선비족은 없다. 다만 한 민족의 명칭발음이 선비족과 아주 유사하다. 석백족(錫伯族)이 그것이다. 이닝(伊寧)에서 이리(伊犁)의 사이에 석백족자치현이라고 부르는 곳이 있다. 개략 8만명이 살고 있다. 그들은 스스로 Sibe(錫伯)이라고 부른다. 나는 그곳에 가본 적이 있다. 그들에게 어떻게 그곳으로 오게 되었는지 물었더니, 그들의 대답은 청나라때 강희제가 준가르분지를 점령할 때, 그들 선비족의 조상을 데리고 거기로 갔다고 한다. 그훼 그들을 남겨두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척발선비족이 아니라, 동북에 남아 있던 또 다른 갈래의 선비족 후예이다. 16세기때, 동북의 석백족은 몽골에 의해 '팔기'로 편입된다.


18세기 중엽, 청나라정부는 영토를 보전하고, 제정러시아의 침입을 막아내기 위하여, 동북의 석백족중에서 4천여명과 가족을 뽑아서, 멀리 신강 이리지역으로 보내어 변방을 지키게 한다. 이들 선비족 후손들은 이닝에 남게 된다. 그들은 이리하(伊犁河)를 따라 개간해서 도랑을 만들고 집을 지었으며, 후손을 낳았다. 현재의 석백족은 말을 잘 타고 활을 잘 쏜다. 많은 양궁의 메달리스트가 여기서 나왔다. 그러나 그들은 확실히 벼를 심고, 쌀을 먹는다. 그들중 어떤 사람들은 아직도 동북에서 가지고 온 깃발을 가지고 있다. 당시 청나라황제는 그들은 남겨두기 위하여, 그들에게 적지 않은 돈을 주어 수리관개사업을 하도록 했다. 그리하여 이리하의 물을 그들이 사는 곳으로 끌어왔다. 현재 그 차부차르 도랑은 여전히 사용되고 있다. 해방후에 일찌기 정부에 수리를 요청했으며, 공사량이 아주 많았고, 돌도 큰 것들이었다. 석백족은 언어상의 재능이 있다. 그들은 여러 언어를 말할 줄 안다. 석백어, 카자흐어, 한어와 러시아어등이다. 그들은 현재 세계에서 유일하게 만주문자를 사용하는 민족일 것이다. 그들은 장사를 잘 하고, 변방무역이 발달했다. 이렇게 보면, 민족명칭을 번역할 때, 번역자 자신이 역사적지식부족으로 석백족이 실제로는 선비족이라는 것을 몰랐던 것같다.


나중에 필자가 심양에 갔는데, 동북대학이 회복될 때, 심양시의 시장을 만났다. 그는 모(慕)씨인데, 나는 그에게 성씨로 봐서는 한족이 아닌 것같다고 했다. 당시에 그가 선비족이라고 말하지는 않았다. 그저 그에게 '모용(慕容)'씨에서 '모(慕)'시로 고친 것인지를 물어보았다. 나중에 그는 나에게 현재 그의 이력서에는 '한족'이라고 쓰여 있다고 말해준다. 내가 그건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아마도 선비족일 것이라고. 왜냐하면 선비족 내에는 '모용'이라는 성씨가 있기 때문이다. 북위의 도무제 척발규의 외삼촌이 모용수(慕容垂)인데, 그의 성이 바로 모용이다. 그는 후연의 제1대 군주이고, 역시 가장 먼저 중화민족에 융합된 선비족(모용선비)이다. 나중에, 이 시장은 내 말에 반박을 하지 못했고 마침내 이렇게 말한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확실히 선비족이다. 그리고 조상은 상황기이다. 만주족은 성씨를 아주 따진다. 그리고 '팔기'로 군대를 편제했다. 다만 정사기(正四旗)는 정종의 만주족이다. 우리는 만주족이 아니라 선비족이다. 그러나 일찌감치 만주족과 협력했다." 그는 또한 심양고궁의 아주 높은 대(臺)가 있다고 소개해주었다. 예전에 홍타이시(청태종)이 그 대 위에 있었다고 한다. 대의 앞에 매 10미터마다 네모조각이 하나씩 있는데 모두 8개이다. 좌우 양쪽에 각각 4개찍이다. 이것이 바로 대신들이 황상을 모시는 곳이다. 그러나 대에 올라가는 것은 허용되지 않았다. 그리고 일부 네모조각은 앞쪽의 네모조각과 약 30미터 떨어져 있는데, 이것은 바로 선비족의 우두머리가 있던 곳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일찌감치 만주족에 신복(臣服)했기 때문에, 그들이 황궁에 오면, 반드시 먼저 칼과 검을 내려놓고, 빈 손으로 앞의 네모조각까지 가야 한다. 황제의 동의를 받은 후에 비로소 대에 오를 수 있다. 법도가 아주 엄했다.


추가로 알아본 바에 따르면, 당시 심양고궁의 정북과 서북에는 7개의 마을이 있었는데, 모두 선비족이 살았다. 심하(瀋河)의 북쪽에는 군인이 있엇다. 현재는 고궁북쪽과 서쪽에 선비족의 후손이 산다. 심양의 철서지구에도 선비족이 있다. 이 시장은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다음에 심양에 오면, 나를 데리고 구경하게 해주겠다고. 확실히, 선비족은 동북에서 많이 살고 있었다. 특히 길림의 동쪽, 장백산의 북쪽 연길등지는 모두 선비족이 거주하던 지역이다. 나중에 점점 사방으로 확산된다. 러시아의 저명한 항구인 블라디보스톡은 원래 선비족이 거주하던 곳이다. 흑룡강의 양양안에서 계속하여 몰골북쪽의 바이칼호 및 호수주변까지 모두 선비족이 살았다. 그리고 선비족은 몽골북쪽의 엽강(葉羌), 시베리아까지 확장한다. 선비족의 거주지역은 모두 거기에 있었다. 혀재 몽고는 우랄에 가까운 한 마을을 신시베리아라고 부른다. 그들의 과학원의 많은 학자들이 모두 가보았다 .이 지역도 원래 선비족의 거주지였다.


그러므로, 선비족의 거주지역은 널리 분포되어 있다. 후연때 한족에 융합된 모용선비, 북위때 대동과 낙양의 주위에 남은 탁발선비, 탁발선비가 원정갈 때 동북에 남은 선비족(현재의 석백족), 18세기 중엽 이리까지 서정을 갔던 선비족(현재 석백족)을 제외하고, 하나는 바로 4세기때 탁발선비를 따라 원정갔던 선비족 토혼(吐渾)부락이다. 1600여년의 비바람을 거치면서 현재는 양주(凉州), 기련산(祁連山) 일대와 호문하(浩門河)유역 과 하황지구(河湟地區)에 거주하는 토족(土族)이 있는데, 이들도 선비족의 후예이다. 또 다른 것은 바로 러시아 동부 대부분 지역에 살고 있는 선비족들이다.


뒤의 결론에 대한 나의 해석은 이렇다. 러시아의 시베리아는 러시아인에게는 이치에 맞지 않는다. 만일 지명으로 본다면, 러시아는 이곳을 '동(東)'베리아라고 불러야 한다. 지명으로 보면 Manchuria는 만주인이 사는 곳이다. 그렇다면 Siberia는 Sibe인 즉 선비족이 사는 곳이다. 확실히 시베리아는 선비족이 살던 곳이다. 왜냐하면 석백족의 영문명칭이 바로 Sibe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석백족은 기실 선비족이다. 이렇게 보면 많은 점이 해석된다.


이를 보면 선비족은 지금도 여전히 아주 큰 민족이다. 단지 대부분 러시아의 시베리아지구에 살고 있을 뿐이다. 러시아인들은 그곳을 선비족이 사는 곳이라고 부른다. 우리도 서베리아를 신비족거주지역이라고 불러야 한다. 필자는 믿는다. 석백족의 명칭도 선비족으로 고쳐야 한다고. 그렇게 해야 중국역사상의 연원관계를 분명히 할 수 있다고 본다. 왜냐한 원래 그랬기 때문이다. 번역상의 흠결로 인하여 석백족은 이름이 잘못 번역되었다. 시베리아의 명칭도 잘못 번역되었다. 그렇다면 역사의 원래 면목을 되살려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