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사회/중국의 민족

보르네오왕실은 중국혈통인가?

중은우시 2019. 1. 5. 21:08

글: 노토역사(老土歷史)


동남아를 얘기하면 우리는 바로 해수욕장, 섬, 해산물, 해풍과 비키니를 떠올린다. 동남아국가들 중에서 중국인에게 비교적 익숙한 나라는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싱가포르등이다. 마찬가지로 동남아국가이면서 보르네오(중국에서는 文萊라고 부른다)의 존재감은 확실히 떨어진다.


다만 보르네오는 석유자원이 풍부하여 중동국가에 버금가서 국가가 매우 부유하다. 1인당 GDP로 따지면 보르네오는 동남아의 최부국이다. 이렇게 돈많은 나라가 아마도 중국과 가강 가까운 친척일 수 있다. 왜냐하면 국내에서 널리 알려진 하나의 이야기가 있기 때문이다. 보르네오왕실은 중국인의 후예라는 것이다.


전해지는 바로는 원나라말기, 주원장의 부하중에 황원수(黃元壽)라는 사람이 있었다고 한다.그는 복건성 천주 사람이다. 일찌기 몽골과의 전투에서 용맹하게 싸웠기 때문에, 주원장으로부터 인정을 받았고, 황삼병(黃森屛)이라는 이름을 하사받는다. 명나라가 건립된 후, 황삼병은 동남연해에서 왜구와 싸웠고, 나중에 운남의 등충으로 가서 변방을 수비한다.


황삼병은 전공이 탁월하여 총병이 된다. 그러나 운남변방의 변란으로 황삼병은 일가족과 부하를 데리고 남으로 도망친다. 그는 보르네오로 갔고, 당시 보르네오국왕은 지금 보르네오국왕의 세계(世系)에 기재된 제1대국왕 '술탄 모하메드 샤'였다.


황삼병의 군대는 실력이 약하지 않았으므로, 국왕을 도와 강적을 물리친다. 국왕은 기뻐하며 딸을 황삼병에게 시집보낸다. 황삼병도 자신의 여동생을 국왕의 동생에게 시집보낸다. 그뿐아니라, 국왕은 기쁜 나머지 왕위를 황삼병에게 넘겨주기로 약속한다. 그리하여 국왕이 죽자, 황삼병이 제2대 보르네오 국왕이 되었다.


이 황삼병은 나이가 많이 든 후에 고향을 그리워하게 된다. 그는 친히 보르네오 사절단을 이끌고 명나라로 간다. 당시 황제 영락제 주체를 만난다. 그때 명나라는 아직 북경으로 천도하기 전이었다. 황삼병은 남경에 도착한 후, 주체가 아주 기뻐한다. 누가 알았으랴 황삼병은 나이가 많이 들어서, 장거리여행에 그의 마지막 정력을 다 쏟아부었는지, 얼마후 남경에서 병사한다. 죽기 전에 주체에게 보르네오를 중국판도에 넣어달라는 부탁을 한다.


황삼병이 죽은 후, 그의 보르네오에 남은 딸이 왕위를 승계하여, 보르네오의 제3대국왕이 된다. 보르네오 국왕은 이후 지금까지 모두 황씨가족의 후손들 에게 전해진다. 그러므로, 현재의 보르네오 왕실은 모두 중국인 황삼병의 후손들이다.


이런 이야기가 중국에 널리 알려졌고, 여러가지 서로 다른 버전이 있다. 다만 대동소이하다. 기본적으로는 위에서 말한 내용이다. 한 중국인이 보르네오에 가서 왕이 되고, 영광스럽게 고향으로 돌아왔다가 고향에서 죽는다. 이 이야기를 들을 때 아주 흥분했었다. 중국인이 해외에서도 이렇게 대단한 일을 했다니. 그러나, 아쉽게도 이 이야기는 사실이 아니다. 사실로 보기에는 헛점이 너무 많다. 이 이야기는 날조한 것이다.


황삼병의 이야기는 기실 보르네오 왕실 세계표(世系表)에서 나온다. 그중 제1대국왕 술탄 무하마드 샤에게는 사위가 한 명 있는데, 이름이 ong Sum Ping"이다. 이 이름이 바로 모든 황삼병 이야기의 시작점이다. 중국의 정사에는 황삼병이나 황원수라는 이름이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이 ong Sum Ping"이 황삼병인지, 황삼평(黃三平)인지, 왕삼평(王三平)인지, 왕삼병(王森甁)인지 아니면 황성평(黃聲平)인지 아무도 알 수가 없다. 황삼병과 그의 딸이 모두 보르네오에서 왕이 되었다는 것은 순전히 헛소리이다. 왜냐하면 보르네오왕실이 확정한 관방사서에 보르네오 역대국왕중 황삼병 혹은 ong Sum Ping이라는 이름은 나오지 않는다. 그리고 역대국왕은 모두 남성이고, 황삼병의 딸이 국왕에 오른 적도 없다.


18세기에 이르러, 중국인이 보르네오에 정착하는 수가 점점 많아졌다. 황삼병에 관한 이야기는 이때부터 시작되었을 것이다. 최초의 이야기에서 보르네오의 제1대국왕의 동생이 중국의 공주와 결혼했다는 것이고, 소위 ong Sum Ping은 바로 이 공주의 이름이라고 했다.


19세기에 이르러, 이 이야기는 두번째 버전으로 진화한다. 이때 황삼병은 중국에서 온 탐험가가 되고, 그에게는 동료가 있었다. 이름은 황강(黃剛)이다. 그들은 함께 보르네오로 왔고, 당시의 악룡(惡龍)에게 도전한다. 그리고 악룡이 지키는 보물을 빼앗아 온다. 아주 형편없는 이야기이다. 그리고 두 사람은 악룡을 격패시킨 후, 황강이 보물을 가지고 혼자 떠나버린다. 황삼병은 놀란 나머지 그냥 보르네오에 남는다.


20세기초기, 황탁여(黃卓如)라는 상인이 보르네오로 온다. 그의 기록에 따르면, 당시 보르네오국왕은 친히 그를 접견했다. 그러나 그는 이 보르네오국왕의 이름을 밝히지는 않았다. 이 보르네오국왕은 그를 산 하나로 데려가서, 산위에 있는 묘 하나를 보여준다. 묘비에는 한자로 "황총병지묘(黃總兵之墓)"라고 쓰여 있었다고 한다. 국왕은 이 묘에는 그의 조상이 묻혀 있다고 했다. 중국에서 온 황씨성의 무관이라는 것이다.


1929년에 이르러, 광동에서 온 온웅비(溫雄飛)는 <남양화교통사>를 쓴다. 확인되지 않은 이런 소재와 민간전설도 책에 실린다. 그리하여 황삼병은 원말명초의 장령이 되고, 보르네오로 흘러들어와 황실과 통혼하고 한때 보르네오에서 지방추장이 되었다고 적었다.


1991년, 중국과 보르네오가 수교를 하고, 두 나라는 공통점을 찾기 시작한다. 황삼병의 이야기가 발굴된다. 그것은 양국우의의 상징이 되었다. 그리하여 이 이야기는 도처에 전파된다. 그리하여, 온웅비가 편찬한 황삼병 이야기가 나중에 중국에서 널리 전파된 이야기의 전반부가 된다.


황삼병이 금의환향한 이야기는 기실 <명사>에서 나온다. 이것이 이화접목(移花接木)식으로 황삼병에게 옮겨진 것이다. <명사.외국전6>의 기록에 따르면, 처음에, 보르네오 국왕 마하무사(즉, 보르네오의 제1대국왕 술탄 모하마드 샤)는 명나라에서 파견한 사신에게 아주 무례했다. 그러나 그의 아들 마야르자나(痲耶惹加那)가 즉위한 후에 중국에 아주 공손했다.


이 국왕은 영락6년 대규모의 사절단을 이끌고 친히 남경으로 가서 영락제를 배알한다. 다만 국왕은 몇달 후 전염병으로 남경에서 사망한다. 영락제는 그에게 "공순왕(恭順王)"이라는 시호를 내린다. 그리고 "발니국공순왕묘(渤泥國恭順王墓)"를 만들게 한다. 이 묘는 지금도 남경에 있다. 그리고 <황명문형.권81.발니국공순왕묘비문>의 기록에 따르면, 이 국왕은 사망시에 나이가 겨우 28살이다. 황삼병 이야기에 나오는 67세가 아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주 분명히 알 수 있다. 황삼병도 좋고, 황원수도 좋고, 모두 두찬(杜撰)된 가공의 인물이다. 그의 이야기는 보르네오의 민간전설과 중국, 보르네오 양국의 사료를 결합하여 최종적으로 이것도 저것도 아닌 이야기로 만들어 졌다.


하고 싶은 말은 이것이다. 중화문명은 그 자체로 찬란하다. 이런 거짓말로 스스로의 조상의 얼굴에 금칠을 할 필요는 정말 없다. 정말 창피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