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건륭제)

건륭제 후궁의 여섯 장문인(掌門人)

중은우시 2019. 1. 13. 00:39

글: 명청사화(明淸史話)


얼마전에 TV드라마 <연희공략(延禧攻略)>과 <후궁(后宮) 여의전(如懿傳)>이 인기리에 방영도었다. 사람들은 그리하여 건륭제의 후궁에 관심을 갖게 된다. 확실히 건륭제의 후궁은 청나라 역대 후궁중 가장 다채로왔던 때이고, 여러 미인들이 총애를 다투었다. 하나가 올라왔다 내려가면 다른 하나가 올라오는 형국이었다. 그렇다면, 건륭제가 대청국을 통치한 60여년동안 도대체 몇 몇의 여인이 육궁을 통령(統領)했을까?


첫번째는 효현황후(孝賢皇后) 푸차씨(富察氏)이다. 기간은 옹정13년 구월부터 건륭13년 삼월까지 모두 13년간이다.


효현황후 푸차씨는 건륭제의 원배(原配)이다. 일찌기 옹정5년에 건륭에게 시집간다. 푸차씨는 명문출신일 뿐아니라, 용모와 품행에서도 뛰어났다. 그녀는 육궁을 통솔하며 건륭후궁에 검소한 기풍을 만들었다. 이렇게 하여 건롱초기에는 성세의 국면이 나타난다.


비록 효현황후는 청나라의 유명한 현명한 황후이지만, 일생이 즐겁지만은 않았다. 주로 그녀가 낳은 두 적자인 영련(永璉)과 영종(永琮)이 모두 요절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남편 건륭이 동경하던 적자계위의 꿈이 깨지게 된다. 효현황후 본인은 이로 인하여 심신이 초췌해지고, 결국은 한을 품고 세상을 떠난다. 나이 겨우 37살이었다.


두번째는 계후(繼后) 휘파나라씨(輝發那拉氏)이다. 기간은 건륭13년 칠월부터 건륭30년 오월까지 모두 17년간이다.


계후 휘파나라씨는 건륭제가 잠저(潛邸)에 있을 때 측푸진(側福晋)이다. 비록 강희,옹정,건륭년간에 집안이 몰락하기는 했지만, 그녀는 어쨌뜬 휘파국(輝發國) 군주의 후손이다. 건륭13년 삼월, 효현황후가 산동 덕주에서 병사하고, 같은 해 칠월 초하루 휘파나라씨는 섭육궁사황귀비(攝六宮事皇貴妃)가 되어, 건륭의 후궁을 통솔하기 시작한다.


2년후인 건륭15년 팔월 초이틀, 휘파나라씨는 정식으로 중궁황후에 책봉된다. 건륭후궁은 정식으로 계후시기로 접어든다. 건륭30년초의 남순때까지 계후인 휘파나라씨는 계속 하여 후궁이 장문인이었고, 황귀비에 오른 때까지 합치면 계후 휘파나라씨가 동서육궁을 장악했던 기간은 17년에 달한다. 건륭후궁중 통솔기간이 가장 길었던 여인이다.


세번째는 황귀비 위씨(魏氏)이다. 나중에 효의황후(孝儀皇后)로 추봉된다  기간은 건륭30년 오월부터 건륭40년 정월까지 10년간이다.


황귀비 위씨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영비(令妃)이다. 그녀는 원래 건륭초기에는 일개 궁녀에 불과했다. 운좋게 건륭제의 눈에 들어 비(妃)에 봉해진다. 생각지도 못하게 이 출신이 미천한 여인(辛者庫출신)이 건륭제와의 사이에 6명의 아들을 낳았고, 그 중 15아거 영염(永琰, 황위에 오른 후 顒琰으로 개명함)이 황위를 계승하니 그가 바로 가경제(嘉慶帝)이다.


유감스러운 점이라면, 위씨는 장기간 자식을 낳으면서 몸이 많이 상해서, 건륭40년 정월에 사망한다. 나이 겨우 49살이었다. 20년후, 건륭제는 15아거 영염을 황태자로 세우고, 동시에 위씨를 효의황후로 추봉한다. 아쉽게도 그녀는 아들이 황위에 오르는 것을 직접 보지도 못했고, 자신이 황후에 추봉될 줄도 몰랐다.


네번쨰는 서비(舒妃) 예허나라씨(葉赫那拉氏)이다 기간은 건륭40년 정월에서 건륭42년 오월까지 2년간이다.


서비 예허나라씨는 건륭6년 팔기선수(八旗選秀)로 입궁한 비(妃)이다. 출신으로 보면 예허나라씨는 절대로 황후급의 인물이다. 그녀는 예허국의 군주의 후손이고, 강희제의 권신인 나란밍주(納蘭明珠)의 증손녀이다. 그리고 예허나라씨는 한때 후궁중 아주 총애를 받았다. 이런 것들이 그녀로 하여금 육궁을 통령하게 만드는 기초임이 틀림없다.


건륭40년 정월, 육궁지주인 황귀비 위씨가 병사하고, 당시 후궁에는 이미 황후, 황귀비와 귀비가 없었다. 그래서 서비가 서열상 여러 비빈들 중 으뜸이었다. 귀비 위씨가 사망한 후, 건륭제가 조정과 후궁을 모두 장악하게 되니, 서비이후의 비빈들도 상당한 발언권이 있었다.


다섯째는 유비(愉妃) 커리예트씨(珂里葉特氏)이다. 기간은 건륭42년 오월부터 건륭57년 오월까지 모두 15년간이다.


유비 커리예트씨는 건륭제가 잠저에 있을 때는 시첩(侍妾)이었다. 비록 출신이 미천했고(아마도 包衣출신), 오랫동안 총애를 못받았지만, 그녀는 건륭초기에는 한때 총애를 받았던 기간도 있었다. 그리고 건륭제의 가장 우수한 아들인 황오자 영기(永琪)를 낳았다. 유감스럽게도 영기가 25살의 젊은 나이로 사망했다는 것이다.


건륭42년 서비가 병사한 후, 후궁의 서열에 따라, 유비가 가장 지위가 높은 비였다. 그녀는 건륭의 후궁중 상당히 큰 발언권이 있었고, 건륭57년 병사할 때까지 유비가 건륭의 후궁사무를 15년간이나 장악했었다.


여섯째는 영비(潁妃, 나중의 潁貴太妃) 바린씨(巴林氏)이다. 기간은 건륭57년부터 가경4년 정월까지 모두 7년간이다.


영비 바린씨는 건륭초기 팔기선수를 통해 입궁한 비이다. 혈통으로 보면 몽골여자이다(몽골상홍기). 건륭후궁의 관련사료를 보면, 바린씨는 확실힌 영비당(令妃黨)으로 영비와의 관계가 아주 좋았다. 그녀는 일생동안 자식을 낳지 못했지만, 영비의 막내아들인 십칠아거 영린(永璘)을 기른다. 영린은 건륭제가 가장 예뻐한 아들이다.


건륭57년 오월 유비가 병사한 후, 영비 바린씨가 후궁중 가장 지위가 높은 비였다. 그래서 건륭말기의 마지막 기간동안 그녀가 후궁을 통령했다. 비록 가경제가 즉위한 후 중궁황후가 있었지만, 당시 태상황 건륭이 여전히 권력을 쥐고 있었고, 가경제의 원배 효숙예황후(孝淑睿皇后)는 일찌감치 사망하고, 황후의 자리를 이어받은 효화예황후(孝和睿皇后)는 확실히 너무 어려서, 바린씨가 여전히 육궁을 통솔한다. 가경4년 정월 태상황 건륭이 사망할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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