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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건륭제)

건륭의 후손과 북경의 왕부

by 중은우시 2018. 11. 22.

글: 장월(張月)


건륭제는 자녀가 아주 많았다. 제왕가에서 태어난 이들 황자와 공주들은 서로 다른 운명을 지녔다. 그리고 황실 구성원으로서 그들은 북경성 내에 많은 왕부(王府)를 건설한다. 수백년의 풍운과 변화를 거쳐 어떤 왕부는 지금까지도 보존되어 있다. 수백년의 지난 이야기를 담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영황(永璜)은 건륭제의 황장자(皇長子)이다. 그는 건륭제가 즉위하기 전에 태어났고, 부찰씨(富察氏) 소생이다. 장남으로서, 건륭제는 즉위후 그를 아주 중시한다. 그러나, 몇년이 지나지 않아, 그는 '경쟁상대'를 만나게 된다. 건륭제와 효현순황후(孝賢純皇后) 즉 부찰황후(富察皇后, 영황의 모친인 부찰씨와는 다른 사람이다) 소생의 황이자(皇二子) 영련(永璉)이다. 그러나 영련은 겨우 9살의 나이로 요절하고 만다.


건륭13년, 영황은 인생 최대의 좌절을 맞이한다. 그 해에 부찰황후가 사망하였는데, 황후의 장례식때 비통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는 이유로 건륭제가 분노하여, 공개적으로 영황에게는 황위를 넘기지 않겠다고 말한 것이다. 같은 처벌을 받은 황삼자(皇三子) 영장(永璋)도 있다. 영장의 생모는 순혜황귀비(純惠皇貴妃) 소가씨(蘇佳氏)이다. 10년후, 두 황자는 연이어 우울하게 사망한다. 영장이 사망한 후, 순군왕(循郡王)에 봉해진다. 나중에 성친왕(成親王) 영성(永瑆)과 부찰씨(富察氏, 傅恒의 딸)와의 사이에 낳은 아들 면의(綿懿)가 순군왕의 작위를 승계하고, 순군왕부를 짓는다. 이 왕부의 일부 건축은 지금도 보존되어 있다. 방가후통소학교(方家胡同)가 사용하고 있다.


이 몇몇 황자들이 연이어 황위와 멀어질 때, 황사자(皇四子) 영성(永珹)이 한때 가장 유력한 후보로 떠오른다. 영성의 생모는 조선(朝鮮)의 미녀인 숙가황귀비(淑嘉皇貴妃)이다. 그러나, 그에게는 경쟁력이 아주 강한 동생이 있었다. 그는 바로 황오자(皇五子) 영기(永琪)이다. 영기의 생모는 유귀비(愉貴妃) 가리엽특씨(珂里葉特氏)이다. 영기는 각 방면에서 아주 뛰어난 모습을 보인다. 그리고 건륭황제의 '각수조제(恪守祖制)'이 훈계를 잘 따랐다. 그리하여 건륭제는 한때 영기를 황위후계자로 생각한다. 아쉽게도 영기는 젊은 나이로 요절한다. 건륭30년(1765년) 십일월 영친왕(榮親王)의 작위를 받았지만, 영기는 골결핵의 고통을 심하게 받다가 다음 해 삼월에 사망하고 만다. 영기의 왕부는 나중에 순친왕부(醇親王府)의 남부(南府)가 된다. 순친왕은 도광제의 일곱째아들 혁현(奕譞)이다. 광서황제도 이곳에서 태어난다. 지금도 이 왕부의 일부건축은 중앙음악학원이 사용하고 있다.


황육자(皇六子) 질친왕(質親王) 영용(永瑢)은 생모가 순혜황귀비 소가씨이다. 그는 다재다능한 왕야이다. 일찌기 <사고전서>의 정총재(正總裁)를 맡기도 했다. 기효람(紀曉嵐)은 당시 영용의 휘하에서 일했다.


황팔자(皇八子) 의친왕(儀親王) 영선(永璇)은 청나라때 가장 장수한 황자이다. 도광12년(1832년)에 87세의 고령으로 사망한다. 그는 청나라때 모든 왕야들 중에서 가장 장수한 인물이다.


황십일자(皇十一子) 영성(永瑆)도 아주 재주가 뛰어났다. 지금, 청나라 4대서예가를 꼽으라고 하면, 유용(劉墉), 철보(鐵保), 옹방강(翁方綱)과 함께 성친왕 영성을 꼽는다. 그의 적푸진(정실무인)도 마찬가지로 명문출신이다. 대학사 부항의 딸인 부찰씨이다. 즉 건륭황제의 효현황후의 친조카딸이다.


황십오자(皇十五子) 영염(永琰)은 나중의 가경제(嘉慶帝)이고, 생모는 효의순황후(孝儀純皇后)이다.


그의 친동생인 황십칠자(皇十七子) 경친왕(慶親王) 영린(永璘)은 건륭제의 막내아들이다. 그는 개성이 확실한 '어린왕자'였다. 영린은 어려서부터 황위에는 거의 흥미가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자신은 평생 크게 바라는 것이 없고, 가장 큰 바램은 어느 형이 황제가 되든지간에 화신(和珅)의 집을 자기에게 하사해주면 된다고 했다. 결국 그의 친형인 가경제는 즉위한 후 화신의 집을 그에게 하사한다.


황자들에 대한 이야기를 끝냈으니, 건륭제의 공주에 대하여 얘기해보기로 하자.


황삼녀(皇三女) 고륜화경공주(固倫和敬公主)는 건륭제와 그가 사랑한 부찰황후 사이에 남은 유일한 골육이다. 그리하여 건륭제는 공주를 장상명주로 아낀다. 공주는 몽골왕공 색부등파륵주이(色布騰巴勒珠爾)에게 시집간다. 그러나 건륭제는 공주를 차마 멀리 시집보내지 못하고, 북경성내에 그녀를 위하여 고륜공주부(固倫公主府)를 지어준다. 이것은 북경에서 유일한 '고륜급'(황후소생의 공주에게 내리는 봉호. 친왕과 같은 급이다)의 공주부이다. 화경공주가 사망한 후, 건륭제는 그녀를 부마의 봉지에 묻지 않고, 북경의 동쪽교외 동파향(東壩鄕)에 묻는다. 지금 이곳은 북경경공기사학교(北京輕工技師學校)가 있고, 능은 보존되어 있지 않고, 단지 고수(古樹)와 문앞을 지키는 석사자(石獅子)만 남아 있다.


황사녀(皇四女) 화석화가공주(和碩和嘉公主)의 저택은 지금 사람들이 잘 아는 곳이다. 그것은 바로 청나라말기 경사대학당의 소재지이다. 화석화가공주의 생모는 순혜황귀비 소가씨이고, 화가공주는 대학사 부항의 차남인 복륭안(福隆安)에게 시집간다. 공주가 사망한 후, 지금의 대망교 동남쪽에 묻힌다. 공주분(公主墳)은 지금 사라졌고, 단지 석패루(石牌樓0만 하나 남아 있다.


황칠녀(皇七女) 고륜화정공주(固倫和靜公主)는 가경제의 친누나이다. 사료에 공주에 대한 기록이 많지 않다. 그러나 그는 라왕다르지(拉旺多爾濟)에게 시집갔고, 여러번 위기의 순간에 가경제의 목숨을 구해주었다.


황구녀(皇九女) 화석화각공주(和碩和恪公主), 가경제의 둘째누나이다. 건륭37년(1772년) 찰란태(札蘭泰)에게 시집간다. 찰란태는 청나라때 대소화탁(和卓)의 반란을 진압했던 장군 조혜(兆惠)의 아들이다. 건륭45년(1780년), 공주는 병사하니, 향년 23살이다. 화각공주와 찰란태의 합장묘는 조혜의 가족묘중 하나이다. 지금 이 일대는 올림픽공원의 핵심지역이 되었다.


황십녀(皇十女) 고륜화효공주(固倫和孝公主), 건륭40년(1775년)에 태어났다. 당시 건륭의 나이 이미 65세이다. 늙어서 얻은 딸이고, 게다가 화효공주는 자란 후 용모가 건륭제를 쏙 빼닮았다. 그리고 성격도 그와 비슷했다. 그리하여 황제는 그녀에게 은총을 많이 내린다. 나중에 건륭제는 그녀를 권신 화신의 아들 풍신은덕(豊紳殷德)에게 시집보낸다. 풍신은덕은 부친의 권세가 큰 것을 믿고 평소에 아주 교만했다. 화효공주는 항상 그에게 겸손하게 행동하라고 권했고, 명확하게 풍신은덕에게 말한다. 그들이 나중에 아마도 화신에게 연루될 것이라고. 과연 화신은 가경제에 의하여 가산몰수당한다. 가경제는 자신의 여동생 체면을 봐주어서, 원래 화부(和府)이 동쪽에 그녀와 풍신은덕이 거주하도록 남겨준다. 이것이 바로 공왕부(恭王府)의 동로건축에 많은 봉황문양이 있는 유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