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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건륭제)

건륭제는 왜 부친 옹정제의 총신(寵臣)들을 무자비하게 탄압했는가?

by 중은우시 2018. 12. 12.

글: 용가독사(勇哥讀史)


옹정제시기는 짧은 13년간이다. 그러나 적지 않은 치세의 능신들이 나타난다. 그중 옹정제의 총애를 깊이 받은 사람은 4명이다. 각각 악이태(鄂爾泰), 이위(李衛), 장정옥(張廷玉), 전문경(田文鏡)이다. 그중 전문경의 나이가 가장 많고, 이위의 나이가 가장 어리다.


옹정제는 그들을 얼마나 총애했을까?


먼저 악이태를 보자.


악이태는 자가 의암(毅庵)이고 만주 상남기 사람이다. 1677년에 태어났다. 악이태는 20세때 거인(擧人)이 되어 관료의 길로 들어선다. 다만, 그의 전반생은 그다지 순조롭지 못했다. 42살이 되어서야 비로소 하급인 내무부(內務府) 원외랑(員外郞)이 된다. 그는 시를 써서 자신의 불운한 운명을 한탄하기도 했다: "간래사십유여차(看來四十猶如此), 편도백년이가지(便到百年已可知)"(사십이 되도록 이 지경인 것을 보니, 백년이 되면 어떨지 이미 알 수 있을 것같다). 스스로를 원망하는 마음이 그대로 드러난다.


옹정제가 즉위한 후, 악이태는 봄날을 맞이한다. 1723년 초봄, 악이태는 먼저 운남으로 가서 향시(鄕試)의 부주고(副主考)가 된다. 5개월후 그 자리에서 강소포정사(江蘇布政司)로 발탁된다. 1725년 다시 광서순무(廣西巡撫)로 임명된다. 그러나 악이태가 부임하러 가는 도중에 옹정제는 그를 운남순무(雲南巡撫)로 바꾸어 임명한다. 그후 악이태는 운귀총독(雲貴總督), 병부상서(兵部尙書), 운귀광서삼성총독(雲貴廣西三省總督)등을 지내며, 운남, 귀주, 광서 세 성을 관할한다.


1732년, 악이태는 경성으로 불려온다. 그리고 보화전대학사(保華殿大學士)의 신분으로 내각수보(內閣首輔)의 직권을 행사한다. 악이태는 출장입상(出將入相)의 인생의 꿈을 실현하게 된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옹정제의 총애와 관련이 있다. 옹정제는 악이태의 동생 악이기(鄂爾奇), 장남 악용안(鄂容安), 차남 악실(鄂實)등도 모두 중요부서의 요직으로 발탁한다.


다음으로 이위를 보자.


이위는 자가 우개(又玠)이고, 강남 동산(銅山, 지금의 강소성 서주 풍현 대사하진 이채) 사람이다. 1687년에 태어났고, 부유한 상인가정에서 태어난다. 그는 힘들게 공부하는 길을 택하지 않고, 돈을 써서 하급관리직을 사서 관료의 길로 들어선다.


당연히 이위는 돈으로 관직을 샀지만, 관리로서의 능력은 아주 뛰어났다. 옹정제가 즉위한 후, 그는 빈번하게 승진하여 짧은 10년도 안되는 기간동안 5품의 병부원외랑(兵部員外郞)에서 신속히 종일품의 절강총독(浙江總督)이 되어 봉강대리(封疆大吏)가 된다. 나중에 그는 수도의 요지를 맡는 직예총독(直隸總督)이 된다.


옹정제가 이위를 얼마나 총애했을까? 이위는 성격이 곧고 시원시원하여 자주 솔직하게 행동한다. 옹정제는 그를 잘 달래며 교육시킨다: "너는 근면하게 수양하고 함양하여 완전한 사람이 되도록 노력해라. 그래야 너를 알아봐준 사람의 뜻을 저버리지 않는 것이다." "장부가 입신양명하려면 이런 소소한 것까지도 지키지 않으면서 어찌 덕행을 쌓아 업적을 낼 수 있겠는가. 수시로 되돌아보며 조용히 수양을 쌓으라."


세번째로 장정옥을 보자.


장정옥은 자가 형신(衡臣)이고, 안휘 동성(桐城) 사람이다. 1672년에 태어났다. 장정옥은 진사출신으로 강희제때 중용받았다. 자주 장희제를 모시고 외출하여 시찰하는 일을 했다.


옹정제가 즉위한 후, 더욱 장정옥을 중용한다. 장정옥의 부친 장영(張英)은 옹정제의 스승이었다. 그들 둘은 이런 특수한 관계도 있어서, 서로 잘 어울렸다. 장정옥은 예부상서, 호부상서, 이부상서를 지내고 보화전대학사에까지 오른다. 1729년, 옹정제가 군기처(軍機處)를 설치하며, 장정옥은 수석군기대신이 된다. 군기처의 운행제도를 제정하는 것을 책임진다. 군기처는 청나라말기까지 유지된다.


옹정제는 여러번 장정옥을 칭찬했다. 그리고 아주 친근하게 말한다: "짐이 즉위한 11년동안, 조정의 근친대신중에서 오직 너와 하루도 떨어져 본 적이 없다. 나는 너와 의리로는 군신이나 정으로는 친구이다. 지금 한달여 떨어져 있으니, 항상 생각이 나는구나." 옹정제는 심지어 공개적으로 약속하기도 한다. 장정옥이 죽은 후에는 태묘에 배향해서 공자와 함께 차가운 돼지고기를 한입 먹을 수 있게 해주겠다고, 고대에 이것은 지고무상의 영예이다.


마지막으로 전문경이다.


전문경은 자가 억광(抑光)이며, 한군 정남기(나중에 한군 정황기로 옮긴다) 사람이며, 1662년에 태어났다. 전문경은 감생(監生)출신이다. 강희제때는 중용되지 못했고, 오랫동안 하급관리로 지냈다.


옹정제가 즉위한 후, 전문경은 '탄정입지(攤丁入地)"를 실행하여 옹정제의 개혁방안과 들어맞았다. 그리하여 옹정제의 인정을 받는다. 그후 전문경은 하남순무, 하남총독, 병부상서등의 직위를 맡는다. 전문경의 공정하고 청렴함을 칭찬하기 위하여 옹정제는 '하남산동총독'이라는 직위까지 설치한다.


무슨 좋은 것이 있으면, 옹정제가 처음 떠올리는 것은 전문경과 나눠먹겠다는 것이다. 옹정제는 연단(煉丹)을 아주 좋아했는데, 전문경이 70세가 되었을 때, 옹정제는 단약(丹藥)을 약간 보내어 생일선물로 삼는다. 옹정제는 애정이 충만한 어투로 말한다: "전노애경(田老愛卿), 비록 당신의 나이가 70에 가까웠지만, 짐은 당신이 노년득자(老年得子)하기를 바란다. 이 단약은 아주 좋다. 짐도 먹어봤는데, 당신이 겁낼게 뭐 있겠느냐." 


1735년 10월 8일, 옹정제가 서거하고, 그후에 옹정제의 넷째아들 홍력이 황위를 잇는다. 그가 건륭제이다. 건륭제의 즉위와 더불어, 악이태, 장정옥등의 좋은 시절은 모두 끝나버린다.


옹정제는 유조에서 이렇게 말했다: "대학사 장정옥은 기량순전(器量純全)하고 서성공직(抒誠供職)한다; 악이태는 지병충정(志秉忠貞)하고, 재우경재(才優經濟)하니, 이 두 사람은 짐이 시종 기용해왔고, 장래 두 신하는 태묘에 배향해서, 은덕을 보여라." 아마도 이것은 건륭제를 어느 정도 불쾌하게 만든 것같다.


나중에 건륭제는 더어욱 악이태, 장정옥등이 조정내에서 너무 세력이 크다고 여긴다. 그래서 억제해야겠다고 느낀다. 그는 이렇게 쓴 바도 있다: "만주족은 악이태에 붙고, 한족은 장정옥에 붙는다. 이는 말단관리들만이 아니라, 시랑, 상서중에서도 역시 그렇다." 즉, 조정의 만,한관리들은 모두 악이태와 장정옥이 어떻게 하는지를 보고 따른다는 것이다.


악이태가 가장 먼저 건륭제의 총부리에 쓰러진다.


이전에 옹정제는 유언을 남겨서, 자신이 친왕으로 있을 때 거주한 옹왕부(雍王府)를 묘우(廟宇)로 고치라고 하였다. 악이태는 건륭제의 동생인 화친왕(和親王) 홍주(弘晝)에게 잘 보이기 위하여, 옹왕부를 홍주에게 하사하자고 주장한다. 건륭제는 그 자리에서 그의 건의를 묵살하고, 옹왕부를 옹화궁(雍和宮)으로 만든다.


이때, 악이태의 장남 악용안과 제자 중영단(仲永檀)이 장정옥을 상대하는 방법을 밀모하다가 일이 들통난다. 건륭제는 대노한다. 건륭제가 비록 악이태의 체면을 봐서 악용안, 중영단등에 경한 처분을 내리긴 했지만, 악이태에게는 엄중하게 경고한다.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된다고.


1745년, 악이태가 병사한다. 건륭제는 그를 태묘에 배향하고, 경사의 현량사에 입사하도록 윤허한다. 1755년, 다시 조카 악창(鄂昌), 제자 호중조(胡中藻)사건에 연루되어 그는 현량사에서 쫓겨난다.


악이태가 건륭제에게 탄압을 받으면서, 장정옥도 좋지 않은 예감을 느낀다. 장정옥은 스스로 나서서 관직을 사임하고, 건륭제는 윤허한다. 그러나, 장정옥은 떠나기 전에 건륭제에게 보증서를 하나 써달라고 요구한다. 자신의 사후에 태묘에 배향되도록 해달라고. 건륭제는 아주 불쾌해 하지만, 그가 요구하는대로 해준다. 다음 날, 장정옥은 친히 조정으로 나와서 감사인사를 하지 않고, 아들을 대신 보낸다. 이에 건륭제는 크게 화를 낸다.


1750년, 장정옥의 제자인 황장자 영황(永璜)이 사망한다. 장정옥은 다시 한번 고로환향(告老還鄕)할 것을 청하여, 건륭제를 격노하게 한다. 건륭제는 태묘에 배향된 명단을 장정옥에게 들이밀며 보라고 했다. 스스로 태묘에 배향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지. 그후 건륭제는 대학사구경회의(大學士九卿會議)를 소집하여 장정옥의 태묘배향자격을 박탈하고, 처벌을 면하게 해준다.


1755년 장정옥이 병사한 후, 건륭제는 은혜를 베풀어 태묘에 배향하도록 윤허한다.


이위는 건륭제가 즉위한 후, 겨우 2년여만인 1738년에 병사한다. 다만, 그렇다고 건륭제의 그에 대한 미움이 사라진 것이 아니다. 


한 해는 건륭제가 남하하여 시찰하는데, 서호 화신묘에서 현지백성이 자발적으로 모신 이위의 신상을 발견한다. 그러자 크게 화를 내며 말했다: "이위는 선황의 은총을 받아 교만하고 방종하여, 공정하고 순수한 신하가 아닌데, 그의 이름으로 묘를 만들다니 정말 이상한 일이다." 그리고 명을 내려 이위의 신상을 철거하고 불태워버리게 한다.


옹정제때의 4대중신들 중에 유일하게 건륭제의 무자비한 탄압을 비켜간 인물이 전문경이다. 전문경에게는 무슨 뛰어난 수완이 있었기에 건륭제의 무자비한 타격을 피해갈 수 있었을까?


원인은 아주 간단하다. 그는 일찍 죽었기 때문이다. 전문경은 옹정10년(1732년)에 병사했다. 건륭제가 타격을 가하고 싶어도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