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연의적서자호(漣漪的西子湖)
중국고대의 수천년 역사상 수백명의 황제가 나타났다. 그중 재위기간이 가장 길었던 황제는 강희제(康熙帝)이다. 그의 재위기간은 61년에 달한다. 강희제 본인도 자부심이 컸다. 그는 일찌기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진한이래 황제를 칭한 자는 일백 구십하고도 셋이다. 재위기간이 짐만큼 오래인 경우는 없었다." 강희제는 이를 축하할 일이라고 여겼다. 그래서 그는 60세생일이 되는 해에, 천수연을 연다. 천하의 모든 65세이상의 노인을 모셔서 연회를 펼친 것이다.
역사상 강희제는 무슨 '호대희공(好大喜功)'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8살에 등극했고, 아오바이(鰲拜)를 체포하고, 삼번(三藩)을 평정하였으며, 정성공을 격패시키고, 갈단을 토벌했다. 그는 여러 곤란을 겪으며 극복해왔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 고대의 그 어느 제왕도 강희제와 같은 상황에 처했다면 그보다 잘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래서 강희제는 '천고일제'라고 불러도 전혀 손색이 없다. 청나라는 그의 통치하에 번영하는 광경이 펼쳐진다. 백성들도 안거낙업(安居樂業)했다. 그래서, 강희제가 말년에 천수연을 열어 보천동경(普天同慶)하려는 생각을 품은 것도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강희52년 삼월 이십오일, 이 날은 마침 꽃이 피는 따스한 봄날로 날씨도 좋았다. 강희제는 창춘원(暢春園)의 정문 앞에서 융중한 천수연을 연다. 천수연에 참가한 노인은 모두 강희제가 사전에 마차를 보내어 전국각지에서 모셔왔다. 그중 90세이상은 33명, 80세이상은 538명, 70세이상은 1,823명, 65세이상은 1,846명이었다. 명실상부한 '천수연'이라 할 수 있다.
강희제는 이 천수연을 아주 중시했다. 모든 10살이상 20살이하의 황자, 황손들에게 직접 이들 노인들을 위해 차를 따르고, 물을 건네며, 술잔을 들어 바치게 했다. 이를 통해 노인을 존경하는 마음을 보이려 한 것이다. 그 외에 강희제는 직접 나이 80세이상의 노인들과 마주보고 같이 술을 마셨다. 이들 노인에 있어서, '천고일제'와 마주하고 술을 마신다는 것은 인생에서 잊기 어려운 경력이었을 것이다.
나중에 강희제가 69세가 되었을 때, 자신에게 남은 날이 얼마 되지 않는다고 예감하고, 다시 한번 천수연을 연다. 첫번째 천수연과 마찬가지로, 천수연에 참가한 노인들은 아주 높은 예우를 받았다. 그리고 천수연이 끝난 후에는 먼 외성에서 온 노인들이 돌아가는 길까지도 안배해주었고, 그들에게는 은량을 하사하여 황은을 표시했다. 그리하여 강희제가 개최한 두번의 천수연은 천고의 가화(佳話)로 전해졌다. 각지에서도 속속 경로의 기풍이 나타난다.
강희제가 69세때 열었던 천수연때는 나이 겨우 12살의 건륭도 참가했었다. 천수연의 군신동락(君臣同樂)의 장면은 어린 건륭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리고, 건륭제가 평생 가장 숭배한 인물이 바로 할아버지 강희제였다. 그래서 나중에 건륭제도 강희제를 본받아, 건륭50년과 건륭60년 두 번의 천수연을 개최하게 된다.
건륭제가 천수연을 열려고 했든 뜻은 좋았다. 천하의 노인들과 함께 태평성세를 경축하는 것이다. 그러나, 건륭제의 천수연에 참가했던 노인들은 연회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자마자 연이어 사망하는 사태가 벌어진다. 건륭제는 좋은 뜻으로 했지만, 나쁜 결과로 나타났다고 할 수 있다.
건륭제가 거행한 천수연은 규격에서는 강희제때의 천수연에 비하여 전혀 못하지 않았지만, 그러나 세부적인 점에서는 부족한 점이 많았다.
먼저, 연회시기이다. 강희제는 음력 삼월이십오일로 정했다. 그때는 기후가 가장 온난한 때였다. 고대인들은 이런 말을 했다: "천유사시(天有四時), 왕유사정(王有四政)" 이 사정은 각각 춘경(春慶), 하상(夏賞), 추벌(秋罰), 동형(冬刑)이다. 그래서 봄날은 경축행사를 열기에 좋은 때이다. 그런데, 건륭제가 천수연을 개최한 시기는 정월 초육일이었다. 가장 추울 때였다. 겨축행사를 열기에는 적절한 날이 아니었다.
고개는 지금보다 여건이 좋지 않았다. 나이 많은 노인들에게 천리먼길을 와서 천수연에 참가하는 것은 오가는 길에서의 고생도 말할 것이 없고, 연회에서 먹는 냉채냉반(冷菜冷飯)도 젊은 사람이라면 모르겠지만, 노인들에게는 힘든 일이었다. 다. 한겨울에 번잡한 절차를 따지는 경전에 참석하는 것은 그들에게 목숨을 앞당기는 일이라 할 수 있다.
<소정속록(嘯亭續錄). 천수연(千叟宴)>의 기록에 따르면, 건륭50년의 천수연에서 적지 않은 노인들이 기절해 쓰러졌다고 한다. 기실, 이들 노인들은 오는 길에 피로가 겹치고, 정신도 없는 상황이니 기절해 쓰러지는 것도 정상적인 현상이다. 그러나, 건륭제는 이것을 보면서 노인들이 너무 즐거워서 쓰러졌다거나, 너무 많이 먹어서 쓰러졌다거나, 술에 취해서 쓰러졌다고 여기고, 만족스러워했다고 한다.
천수연은 개최시간을 잘못 고른 것 외에, 천수연에 참가한 노인들이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안배하는 것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강희제는 참가한 노인들이 귀가하는 것까지도 잘 안배해주었었다. 그러나 건륭제는 이 문제까지는 신경쓰지 않는다.
천수연에 참가한 노인들은 전구각지에서 다 왔다. 예를 들어, 복건, 광동, 광서에서 온 노인은 오가는 것만 수천킬로미터이다. 고대에 교통이 발달하지 못한 시대에 이렇게 수천킬로미터를 오게 되면, 기후도 맞지 않다보니 정상인도 견디기 힘들었을 것이다. 하물며 나이많은 노인들임에야. 그래서 많은 노인들은 천수연에 참가한 후 돌아가서는 연이어 병들어 죽는 일이 벌어진다.
전체적으로 말해서 건륭제의 원래 뜻는 강희제를 본받으려는 것이었고, 천수연을 통하여 효를 실천하려는 것이었고, 이런 생각 자체는 충분히 긍정할 말하다. 그러나, 그는 '호대희공'의 성격으로 세부적인 점은 신경쓰지 못했다. 그리하여 멀쩡한 천수연이 절명연이 되도록 만든 것이다. 그래서 이 두번의 천수연을 열고난 후 다시는 청나라에서 천수연이 열리지 않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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