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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당)

사타집단(沙陀集團): 당나라말기이후 국면을 주도한 집단

by 중은우시 2019. 1. 2.

글: 흥체경(興替鏡)


중국 고대역사상 거의 모든 중원왕조는 북방으로부터의 압력에 시달렸다. 수,당시기 돌궐정권이 북방에 웅거하고 있었고, 중원왕조의 안전을 위협했다. 사타인(沙陀人)은 돌궐부락의 일부이고, 돌궐군대전투의 스타일을 그대로 계승했다. 돌궐군대는 경기병(輕騎兵)을 위주로 하여, 단거리전투와 원거리기사(騎射)에 능하다. 중원왕조의 타격에 돌궐내부의 분쟁이 겹치면서 불가일세하던 돌궐정권이 해체된다. 그후 사타인집단은 끈떨어진 연과 같이 막 굴기하던 토번제국에 의탁할 수밖에 없었다. 토번의 군대는 중기병(重騎兵)을 위주로 한다. 사타인이 토번에 의탁한 후, 토번군대의 전투스타일도 배운다. 그리하여 돌궐, 토번 두 서로 다른 방식의 전투방식을 익히면서 둘을 잘 융합한다. 이것은 사타인들이 스스로를 지키는 바탕이 된다. 토번정권은 사타인을 신임하지 않았고, 사타인들을 최북단에 배치하여, 주로 초원의 회흘인(回紇人)과의 전투에 투입했다. 대치과저에서 사타인과 회흘인이 서로 결탁할까봐 토번정권은 의심하기 시작한다.


토번정권은 사타인들에게 이주를 요구한다. 그리고 반드시 토번의 각 부락으로 분산되어야 한다고 했다. 이것은 사타인들이 받아들이기 어려운 요구였다. 강대한 토번정권 앞에서 사타인들은 동으로 도망치는 것을 선택한다. 그리하여 토번의 숙적인 당나라에 의탁한다. 이때의 당나라는 이미 당년의 기상을 잃었고, 안사의 난 이후에 당나라는 더 이상 원기를 회복하지 못하고 있었다. 번진할거세력이 존재하면서, 더더욱 당나라중앙정부의 생존공간은 줄어든다. 당나라중앙정부의 군대전투력은 약화되었기 때문에 외부의 지원이 절실했다. 사타인들이 당나라에 의탁한 후, 즉시 중용된다. 이들은 경기병과 중기병의 두 가지 장점을 겸비하고 있어서 주원지역의 각 번진들을 충분히 상대할 수 있었다. 사타집단은 당나라중앙정부의 지지하에, 각지의 번진들과 싸우고, 스스로의 지위는 수창선고(水漲船高)로 점점 올라간다. 당나라통치말기에 이르러, 사타집단의 우두머리인 이극용(李克用)은 하동절도사에 봉해진다. 이때부터 역사상 저명한 강골의 하동집단이 출현하게 된다.


당나라통치말기, 황소의 난을 시작으로 대규모 농민반란이 일어난다. 반란군은 유구(流寇)식의 전술을 사용하였으므로, 각지의 번진은 반란군을 막을 수가 없었다. 황소가 이끄는 농민군은 장안성으로 진입하고, 당나라황제는 옛날의 당현종처럼 사천 성도로 도망친다. 전국의 각 번진들 중에서, 전투력이 제일 강한 곳은 이극용의 군대였다. 당나라황제가 계속 요구하자, 이극용은 5000기병과 1만보병을 이끌고 남하한다. 농민군의 전투력은 아주 형편없었다. 기본적으로 수량에 의존하여 승리를 거두는 방식이었다. 장비가 뛰어나고, 전투력이 강한 사타기병을 만나자, 농민군은 일패도지한다. 농민반란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전공으로 따지든 무엇으로 따지든 이극용이 최고였다. 그러므로, 당나라황제는 이극용을 진왕(晋王)에 봉한다. 농민반란을 거치면서, 당나라의 중앙정부의 권위는 더욱 떨어지고, 세력이 비교적 큰 번진들이 서로 싸우기 시작한다. 동시에 중앙정권에 위협을 가한다.


기실, 가장 강대한 번진은 이극용집단과 주온(朱溫)집단이었다. 이극용은 산서지방을 장악하고, 주온은 중원지역을 장악하고 있었다. 쌍방은 하북의 지배권을 차지하기 위하여 장기간에 걸친 전쟁을 벌인다. 전쟁의 발전으로 보면, 양대집단은 비록 여러번 전투를 벌였지만, 서로 이기고 지기를 반복했고 누구도 상대방을 어떻게 하지 못했다. 그러나, 사타기병의 강대한 전투력은 주온집단으로서 무서웠다. 그리하여 사타기병이 남하하는 것을 막고자, 2번에 걸쳐 주온은 황하의 제방을 무너뜨렸다. 주우정(朱友貞)의 시대에 접어들면서, 사타집단은 점차 전략적인 주도권을 장악하고, 하북지역을 모두 탈취한다. 이리하여 중원지역에 대한 큰 위협이 된다. 마지막에는 사타집단이 중원집단을 소멸시키고, 저명한 후당(後唐)정권을 건립한다. 후당정권은 전촉(前蜀)정권을 소멸시키고, 천하통일의 기세를 드러낸다. 후당정권이후 후진(後晋)의 석경당(石敬瑭), 후한(後漢)의 유지원(劉知遠)등은 모두 사타집단에서 나왔다.


오대십국시기의 후당, 후진과 후한이 모두 사타집단에서 나왔고, 후주(後周)정권과 북송(北宋)앙조도 사타집단과 깊은 관계가 있다. 처음에 모든 할거정권은 남방지구에 있었다. 다만 후주가 후한을 대체한 후, 후한의 황족구성원이 북한(北漢)정권을 건립하여 중원정권과 대치하기 시작한다. 처음에, 북한정권은 하동지구와 사타군대의 장점에 의지하여, 심지어 주도권을 장악하기까지 했었다. 고평(高平)전투에서, 후주정권이 비로소 주도권을 장악한다. 북한정권은 비록 지배하는 지역이 넓지는 않았지만, 군대의 전투력은 아주 강했다. 게다가 역대 지도자들이 모두 국가운영에 힘을 쓴다. 후주와 북송이 모두 여러번 북한을 공격했지만, 모두 성공하지 못한다. 북송은 점차 남방의 각 정권을 평정했고, 나중에 온 나라의 힘을 모아서 비로소 북한정권을 소멸시킬 수 있었다. 최초의 사타집단에서 최후의 북한정권까지, 사타인과 산서는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고, 역사의 발전궤적에 크게 영향을 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