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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당)

당나라는 왜 백만대군을 가지고 돌궐을 어쩌지 못했을까?

by 중은우시 2018. 7. 13.

글: 천지사화(天地史話)


당나라는 강역이 넓었다. 5,6천킬로미터에 걸친 돌궐칸국을 정복하여, 역사상 처음으로 장성남북을 아우르는 대제국을 건설한다. 50여년후 후돌궐칸국이 건립되면서, 당나라는 다시 장성이남으로 축소된다. 당나라는 백만의 병사를 가지고 있고, 정치, 경제, 군사 및 문화실력이 강대했음에도 왜 돌궐을 어쩌지 못했을까?


중국은 역대이래로, 진, 한의 통일시대를 거쳐, 동한말기 천하는 분열된다. 이 시기에 소수민족이 서서히 굴기한다. 서진이 짧은 기간동안 통일하였다가, 흉노, 선비, 저, 갈, 강이 속속 국가를 건립함에 따라 혼란의 남북조시대로 접어든다.


나중에 선비족 척발씨가 북방을 통일하여 북위 정권을 건립한다. 북위의 효문제가 추진한 한화(漢化)는 실패하고, 북위는 결국 분열되어 동위와 서위로 나뉜다. 나중에 다시 북주(北周)와 북제(北齊)로 대립한다. 다만 한화는 선비족으로 하여금 한족과 융합하게 만들었고, 서위는 호한통일(胡漢統一)의 "관농집단(關隴集團)"을 형성한다. 관농집단은 한족의 선진문화도 보유하고, 유목민족의 영용선전(英勇善戰)도 보유했다. 그리하여 당시 가장 중요한 정치역량이 된다. 수나라의 양씨, 당나라의 이씨는 모두 관농집단 출신이다.


관농집단의 호한통일의 배경하에, 당나라황제는 장성을 수리하는 것을 거절하고, 농경,유목문명을 포괄하고 장성남북을 아우러는 대통일제국을 건립하기로 결심한다. 당나라초기 몇 황제의 계속된 노력으로 마침내 돌궐등 소수민족정권을 정복하여 방대한 제국을 건립할 수 있었다.


그러나, 50여년이 지난 후, 후돌궐이 건립되며, 당나라는 다시 장성아래로 물러난다. 강대한 실력을 지닌 당나라가 왜 돌궐은 어찌하지 못했을까?


영국역사학자인 Finer는 "제국의 면적이 지나치게 넓어서, 여하한 감독,제약매커니즘이 효과를 내지 못했다."고 한다. 당나라는 무력으로 돌궐을 정복한 후, 일련의 수단을 취한다. 예를 들어, 기미주부(羈縻州府, 호인을 총사령관에 임명하고 유목민족의 생산습속을 유보하며 통치하였다)와 도호부(都護府, 행군감독순찰제도)를 두어, 비교적 느슨한 통치질서를 건립했다.


다만, 유목민족은 중원농경왕조에 대하여 진정으로 동질감을 느끼지 않았다. 국가내부에 두 가지 생활방식과 문화관념이 존재했고, 두 가지 문화는 융합되지 못했다. 그래서 일단 중원왕조의 통치가 약화되면, 금방 유목민족은 반항하고 새로 정권을 건립하는 것이다.


원나라도 동일한 문제에 부닥쳤다. 몰골인은 강대한 군사력으로 농경과 유목 두 문명을 포괄하는 대제국을 건립한다. 그러나 원나라는 중원한인지구를 정복지역으로 인식했다. 원나라는 여전히 천하무적의 몽골기병에 의존하였다. 원나라는 4개의 칸국과 몽골연맹을 유지하고 있었고, 중원을 통치하지만 한화를 거부한다. 한화정도가 가장 약한 왕조였다.


중국은 상,주시대부터 시작하여 강력한 '정통관념'이 있었다. 주나라가 상나라를 정벌했다. 상나라는 '천명'을 잃었다는 것을 구호로 삼았다. 정권을 취득한 후, 주나라는 자신을 '천명'의 계승자로 자처한다. 진,한이후의 왕조는 모두 자신이 정통이라고 선전했다. 그래야 오래갔다.


원나라는 한화를 거절하니, 자연히 정통에 부합하지 않았다. 그래서 원나라는 건립된지 98년만에 무너진다.


당나라는 중원민족으로부터 법통을 인정받았다. 그러나 돌궐등 초원민족으로부터 인정을 받지는 못했다; 원나라는 유목민족의 법통이 되었지만, 중원민족의 인정은 받지 못하였다. 그래서 이 두 개의 왕조는 비록 강대했지만, 금방 와해된 것이다.


청나라는 역사상 한화가 가장 철저한 소수민족정권이다. 그래서 중원민족의 법통과 아주 잘 결합했다. 다른 한편으로, 만주족은 유목민족이어서 몽골을 회유하는 정책을 썼고, 초원민족의 인정도 받는다. 청나라가 근 300년간 통일을 유지한 것은 농경과 유목민족의 진정한 융합을 실현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