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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당)

감로지변(甘露之變): 황권(皇權)과 환관세력의 대결인가?

by 중은우시 2019. 4. 24.

글: 동현자(洞玄子)


역사상 소위 감로지변은 당문종 태화9년(835년) 환관세력이 일으킨 정변으로 최종결과는 조정의 수백명 관리가 도륙을 당하게 된다. 이번 정변이 발생한 후, 환관집단은 당나라의 군정대권을 더욱 확실히 장악하여, 군주의 폐립(廢立), 생살(生殺)까지도 환관의 손에 장악된다. 중국역사상 동한 한화제, 한영제 이후 제2차 환관시대가 시작되는 것이다. 소위 "천하의 일이 모조리 북사(北司)에서 결정되고, 재상은 그저 문서를 작성할 뿐이었다." 환관은 "천자를 협박하고, 재상을 아래로 내려다보며, 조정의 관리를 초개처럼 여겼다."


보편적인 인식범위내에서 내지 일부 교과서에서는 감로지변을 모두 이렇게 얘기한다. 당나라때 감로지변은 황제와 조정신하측이 환관집단에 대항하여 벌인 결전이라는 것이다. 먼저, 필자는 그런 견해에 동의할 수 없다. 당연히 대다수는 안사의 난 이후 당나라역사에 대하여 잘 알지 못하고 그저 남들이 하는 말을 따라할 뿐이다.


이 중요한 역사사건을 되돌아보려면, 반드시 먼저 감로지변의 배경을 이해해야 한다. 즉, 안사의 난 이후, 환관세력이 점차 커져서, 당덕종은 환관에게 금군을 장악하게 하고, 이를 제도화 했다. 그리하여 환관세력은 더욱 힘이 커져서 억제하기 어려워졌다. 필자는 소위 "황권과 환관세력의 대결"이라는 것은 아무런 근거없는 말이라고 본다. 먼저, 한가지 중요한 사실을 확실히 해야 한다: 당나라때 소위 환관은 계속하여 황권의 부속품, 연장, 이목이었고,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대단하지 않았다. 도대체 무슨 정치적 이유때문에 당나라때의 환관에 대하여 그렇게 대단하다고들 말하는지 모르겠다.


소위 "환(宦)"은 원래 정부에서 일처리를 배우는 사람을 말한다. 전국시대에 귀족들은 대다수가 '문객'을 길렀다. '환'은 문객이라는 뜻도 지닌다. 이들 문객은 단순히 귀족만 가진 것이 아니라, 국군도 가졌다. 그래서 그들을 '환관'이라고 부른 것이다. 그래서, 환관은 원래 신체가 불완전한 '내시'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었다. 다만 국군의 수행인원, 근신이 되면 수시로 궁궐을 드나들게 되기 때문에, 잘못하면 후비들과 부정한 관계를 맺게 될 수 있다. 그래서 차라리 거세를 하는 것이 더 안전하게 된다. 마침 고대에 남성전쟁포로에 대하여는 '궁형'을 가했다. 즉, 거세한 후에 궁안으로 데려가서 일을 시키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환관도 이런 자들 중에 고르게 된 것이다.


그래서, 환관은 유래에서 알 수 있듯이 주인과 어느 정도 의존관계에 있게 된다. 환관제도로 발전한 후, 그들은 모조리 노예신분이 된다. 당나라말기 당소종(唐昭宗)은 환관을 주살하라는 조서에서 이렇게 말한다: "이들은 모두 짐의 가신들이다. 신하들 집안으로 말하자면 노예같은 자들이다."


환관과 황제의 관계는 단지 가노와 주인의 관계이다. 중당,만당때 일부 황제는 환관이 옹립했다. 어떤 때는 어느 일파의 환관이 재위하고 있는 황제를 죽이고, 자신에게 의존하는 황자를 황제로 옹립하기도 했다. 혹은 황제가 유언으로 어느 황자를 세우라고 했는데, 그들이 동의하지 않고 다른 황자를 황제로 세우기도 했다. 이런 것들은 모두 가노가 황실의 내부투쟁에 관여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비교하자면, 옛날에 대가족 내에서 각 방의 노비들은 각각 자신의 소주인을 위하여 싸운 것과 같다. 그렇다고 하여 노비의 권력이 정말로 커서 전체 가족을 좌지우지할 정도는 아니었던 것이다.(황영년, <당사십이강>)


즉, 대당천자가 환관에게 꼼짝못한다든지, 무슨 당나라때 환관이 마음대로 황제를 폐립했다든지 하는 것은 그저 단면일 뿐이다. 당헌종은 적나라하게 말한 바 있다. 태감은 바로 나의 가노이다. 너희가 내 말을 들으면 권력을 가질 수 있다. 너희가 감히 말을 듣지 않으면, 너희를 없앨 수 있다. 그것은 몸에서 터럭 하나를 뽑는 것만큼 쉬운 일이다.


"황상이 말하기를, '이들 가노는 지금까지 내가 부린지 오래 되었따. 그래서 은혜를 베풀어 주었다. 만일 잘못을 범ㅁ하게 되면 짐이 그들을 제거하는 것은 터럭 하나칸큼 가볍다."


그리고 그가 환관들에게 독살당했다는 것은 그저 추측일 뿐이다. 설사 정말 그러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그저 대표환관들이 이 주인은 안되겠다고 하여 새 주인을 찾은 것에 불과하지, 그것만으로 환관의 권력이 크다는 것을 말하지는 않는다.


만일 감로지변이 황권과 환관집단의 대결이 아니라면, 진정한 배경은 무엇일까? 많은 사람들은 당시 양파가 투쟁을 벌이고 있다고 말한다. 일파는 황제+대신, 다른 일파는 태감. 이것은 큰 오류이다. '대신'이라는 것은 너무 범위가 넓다. 당문종의 조정에서 대신들은 복잡하기 그지없었다.


1. 우당(牛黨): 우승유(牛僧孺0, 이종민(李宗閔)을 대표로 함.

2. 이당(李黨): 이덕유(李德裕)를 대표로 함


이 양당은 항상 서로를 공격해서 당문종을 골치아프게 했다. 그리하여 당문종은 이런 탄식을 한다: "하북의 도적을 없애는 것은 쉬우나, 조정의 붕당을 없애는 것은 어렵구나(去河北賊易, 去朝中朋黨難)"


3. 엄당(閹黨): 정주(鄭注), 이훈(李訓)을 대표로 함. 이들 둘은 대태감 왕수징(王守澄)이 추천한 사람들이다.


'대신'중에도 파벌이 다양하다. 그리고 '환관'도 모두 한편은 아니다. 신책좌군과 신책우군은 자주 서로 다투었다.


"왕수징은 정주를 우군에 숨겼다. 좌군의 중위 위원소, 추밀사 양승화, 왕천언은 모두 정주를 미워했다."


아래에서는 편의를 위하여 이들 환관을 "좌엄"과 "우엄"이라고 부르기로 하자.


이런 상황하에서, 만일 당문종이 원한다면, 누구를 치든 그것은 쉬운 일이다. 왜냐하면  전설에 따르면, 당헌종은 왕수징이 해친 것이다. 당문종은 그가 여전히 자신의 곁에 있으면서, 기세등등한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그를 처리하고자 한다. 그는 먼저 송신석(宋申錫)을 찾아서 상의한다. 그 결과 '엄당'인 정주가 이를 알고 당문종에게 송신석이 모반을 꾀한다고 고발한다. 당문종은 그 말을 듣고는 송신석을 버린다. 이렇게 하여 우승유등은 아무런 성과를 얻지 못한다. 이번 제1차 투쟁을 보면, 우당이 엄당+우엄에게 패한 것이다. 왕수징은 없애지 못했으니, 당문종은 여전히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래서 제2차투쟁이 시작된다. 이번에는 엄당이 오히려 당문종의 편에 선다. 그리고 왕수징의 부하인 구사량(仇士良)을 끌어들여, 그를 '좌엄'의 우두머리가 되게 한다.  


이훈, 정주는 총애를 받고, 황상의 뜻을 잘 헤아렸다. 그리하여 이훈은 여러번 그의 뜻에 맞추어 간언하여 황상을 움직인 바 있다. 황상은 그가 말재주를 지녔다고 보아, 이훈과 대사를 논의할 수 있겠다고 여긴다. 그리고, 이훈, 정주는 모두 왕수진이 천거하여 관직이 올랐기 때문에 환관들이 그들능 의심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에게 마음 속에 있는 말을 한 것이다.


황상이 즉위하는데 우령군장군 흥녕 구사량이 공이 있었다. 왕수징은 그를 억눌렀다. 그리하여 두 사람 사이에는 틈이 있었다. 이훈과 정주는 황상과 논의하여, 구사량으로 하여금 왕수징의 권한을 나누어갖게 하게 한다. 오월, 을축일, 구사량을 좌신책중위로 임명하니, 왕수징이 기분나빠 한다.


이런 내외협공을 맞이하여, 왕수징에게 무슨 기회가 있겠는가. 그는 금방 정리되고 축출당한다.


이훈, 정주는 황상에게 밀고하여 왕수징을 제거하도록 청한다. 신사일 중사 이호고를 왕수징의 집으로 보내어 독약을 내려, 죽인다. 그 후에 양주대도독으로 추증한다.


이번 결말은 우엄이 엄당+좌엄에 패배한 것이다.


이 두 차례의 공방전을 보면 알 수 있다. 정주, 이훈 이 두 명이 엄당이 아주 대단하다. 그들이 어느 편에 서면 그들이 이겼다. 그뿐 아니라, 당문종은 그들을 이용하여 당쟁에 타격을 가한다. 우당, 이당의 대표인물이 속속 배제되기 시작한다.


그때 이훈, 정주는 연이어 3명의 재상을 축출하고 천하에 위명을 떨친다. 그리하여 평상시에 조그마한 원한이라도 있던 사람은 모조리 그에게 고한다.


"3명의 재상'은 이덕유, 송신석과 이종민이다. 이때, 정주, 이훈은 욕심이 팽창한다. 어떻게 보더라도 이 둘은 대단했다. 누구든지 마음만 먹으면 없애버렸다. 그래서 둘이 아예 "정리당(鄭李黨)"을 만들어 대권을 독단하고자 한다. 이제 '정리당'의 반대편에 설 수 있는 집단은 태감 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감로지변'이 시작된다. 그러므로, 이번 정변에서 환관과 싸운 대신은 단지 '정리당'이다. 이 두 사람은 역사에서 부정적으로 그려지는 인물들이다.


당시 정주와 이훈이 미워하는 조정의 대신들은 모두 '이이당(二李黨)으로 지목해서, 좌천을 보내는데 쉬는 날이 없었다. 관직이 빈 자리가 많고, 조정의 인심이 흉흉해진다. 황상도 이를 알게 된다.


소위 당문종이 환관을 주살했다는 것은 문자유희일 뿐이다. 왕수징은 환관중 1인인데, 모든 환관인 것처럼 얘기하는 것이다. 환관이 신책군을 지휘하는 것은 당나라의 일관된 방식이다. 당덕종은 일찌기 대신들에게 속아서, 신책군을 사인(士人) 백수정(白秀貞)에게 관장하게 한 적이 있다. 그 결과 황제는 후회막급이었다. 그는 부임하자마자 '청렴'을 강조했고, 경원병변때 당덕종이 '호가(護駕)'를 여러번 외쳤지만 아무도 와주지 않았다. 그후, 당덕종은 더더욱 환관들로 하여금 신책군을 관장하게 했고, 당헌종, 당목종, 당경종도 마찬가지였다. 당문종도 에외는 아니었다. 그는 왕수징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그를 없앴다. 그러나 여전히 또 다른 태감인 어홍지(魚弘志)로 하여금 우신책군을 관장하게 한다. 그리고 여전이 구사량으로 하여금 좌신책군을 관장하게 한다. 그가 환관을 타격하는 것은 왕수징이 죽은 후 끝이 난다. 뒤의 "감로지변"은 완전히 정주, 이훈 두 야심가가 스스로 만든 뉴스인 것이다.


심지어 이 두명은 서로를 속이기까지 한다. 이훈은 태감을 죽인 후에 다음 목표를 정주로 삼았다. 당연히 이런 밀모는 그의 심복들만이 알았고, 정주는 몰랐다. 당문종은 더더욱 몰랐다. 그 결과 태감들은 이런 큰 위기를 맞이하여, 좌,우 신책군이 적극 협력하여, 당문종을 데리고 도망친다. 당연히 <자치통감>에도 이 장면은 기록되어 있고, 많은 사람들은 이를 당문종도 '감로지변'의 모의에 참여한 증거라고 얘기한다.


구사량등은 황상도 그 모의를 미리 알고 있었다고 생각하여 울분과 원한을 품었고, 황상에 대한 말이 불손했다. 황상은 두려워 더 이상 말을 하지 못한다.


필자의 생각에 정주, 이훈은 모의를 할 때, 분명히 자신의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황제가 우리를 지지하니, 여러분은 두려워할 것이 없다고. 이런 말이 아마도 구사량의 귀로 들어갔을 것이다. 그것은 아주 정상적인 일이다. 당문종은 왜 변명하지 않았을까? 왜냐하면 명확하게 증명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당문종은 이전에 확실히 정주, 이훈과 협력하여 왕수징을 제거한 바 있다. 정주, 이훈이 모의하는 과정을 보더라도 당문종이 관여했다는 흔적은 전혀 없다. 마지막으로, 어홍지, 구사량이 신책군을 이끌고 반격하여 이훈은 끝난다. 이어서 외부에서 병사를 모으던 정주도 끝이 난다. 당연히 이번 도살에는 나머지 사람들에게도 피해가 미쳤다. 그래서 인심이 흉흉하게 된다. 그러나, "사악한 세력이 정의의 세력에 승리하였다"라고 감로지변을 묘사하는 것은 너무나 터무니없다.


더욱 재미있는 일은, 정이당의 왕애(王涯)가 피살되자, 장안의 백성들이 모두 좋아했다는 것이다. "네 놈에게도 오늘같은 날이 있구나!"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만일 태감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정주, 이훈이 성공했을 것이고, 그랬다면 당문종은 더욱 골치아팠을 것이다. "감로지변"후, 전통적인 견해에 따르면, 당문종은 구사량에게 통제받아 허수아비가 되었다고 본다. 주로는 이 구절 때문이다: "을해일, 황상은 병이 약간 나아서, 정전에 앉아서, 당직학사 주서를 부른다. 술을 하사하고, 묻는다; '짐을 전대의 군주중 누구에 비유할 수 있겠는가?' 주서가 대답하기를, "폐하는 요, 순과 같은 군주입니다." 그러자 황상이 말한다: "짐이 어찌, 요, 순에 비교될 수 있겠는가. 경에게 묻고 싶은 것은 주난왕, 한헌제와 같지 않느냐는 것이다." 주서가 놀라서 대답한다: "그들은 망국지주입니다. 어찌 성덕과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황상이 말하기를 "주난왕, 한헌제는 강한 제후의 통제를 받았는데, 짐은 가노의 통제를 받고 있다. 이렇게 보면 짐은 그들보다 못하구나!" 그리고는 눈물이 흘러 소매를 적신다. 주서는 바닥에 엎드려 눈물을 흘린다. 이때부터 더이상 조회를 보지 않았다."  


당문종이 스스로 태감에게 통제를 받는다고 말하며, 한헌제보다도 못하다고 했다. 기실, 이것은 그저 당문종이 화가 나서 한 말일 뿐이다. 한헌제가 감히 조조를 '가노'라고 부를 수 있었는가? 웃기는 말이다. 감로지변 이후, 소의절도사 유종간이 들고 일어나 구사량을 공격한다. 당문종은 즉시 이를 이용하여 정담(鄭覃), 이석(李石) 두 사람을 발탁한다.


당시 구사량이 방자하고 횡행하여, 조성신하들이 매일 멸문당할까 두려워했다. 유종간이 상소를 올리자, 구사량등이 겁을 낸다. 그리하여 정담, 이석이 정무를 볼 수 있었고, 천자는 이들에 의지하여 스스로 강해질 수 있었다.


이전에 절도사의 대다수는 신책군에서 나왔다. 좋은 지방에 가서 절도사를 지내려면 반드시 권력을 잡은 태감에게 뇌물을 바쳐야 했다. 그런데, 정담, 이석은 구사량을 거치지 않고 절도사로 임명된다.


태감집단에서 당문종은 유홍일, 설계릉 두 사람을 발탁하여 구사량을 견제한다. 구사량은 기분이 좋지 않았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당문종이 죽고 나서야 이 둘을 제거할 수 있었다.


이를 보면, 당문종과 한헌제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더욱 아이러니한 일은 당문종이 죽은 후, 당무종은 구사량에 의하여 옹립되었는데, 얼마 후 구사량을 밀어냈다는 것이다. 그 후에는 그의 집안을 몰수한다. 만일 한헌제를 꼼짝 못하게 했던 조조라면 이런 지경에 이르렀을까? 그럴 리가 없다.


이상을 종합하면, "감로지변"은 '사악한 환관이 정의의 대신을 친 것'이 아니라, '사악한 대신의 음모가 정의의 환관에 의해 좌절된 것'이다. 그후 당문종은 구사량의 허수아비가 되지도 않았고, 대당은 여전히 정상궤도를 굴러갔다. 당무종이 즉위한 후, 금방 태감들을 눌러버렸고, 이덕유를 중용하여, '회창중흥'을 가져온다.


한 마디를 더 하자면, 만보를 양보하여, 이훈, 정주의 도박이 성공했다면, 아마도 당나라천하는 더욱 빨리 혼란에 빠졌을 것이다. 신책군은 환관의 손에 확실히 장악되어 있었고, 더욱 관건적인 것은 각지에도 적지 않은 감군이 있다는 것이다. 지방의 환관세력도 무시할 수가 없다. 그들이 반발하면 지방의 절도사들이 반란을 일으킬 핑계가 생기는 것이고, 각 세력이 엉켜서 엉망이 되었을 것이다.


당나라말기는 별개의 문제이다. 중앙은 명존실망(名存實亡)했고, 조정의 신하나 환관은 지방의 세력들이 보기에 손가락 하나로 눌러주기만 해도 죽일 수 있는 개미같은 존재에 지나지 않았다.


2019년 4월 21일

터론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