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당)

당나라때의 역법(曆法) 표절사건

중은우시 2018. 7. 14. 00:01

글: 냉포역사(冷砲歷史)


오늘은 당나라때 발생한 역법 표절사건을 얘기하면서, 원나라이전에 인도역법이 중국에 미친 영향을 논해보기로 하자.


721년, 당나라조정은 구역법이 너무나 부정확하다고 여겨, 신역법을 제정하여 대체하려 했다. 승려 일행(一行)이 편찬한 <대연력(大衍曆)이 여러 방안중에서 가장 뛰어났다. 일행화상은 신역법을 제정하기 위하여, 북방의 철륵(鐵勒)에서 남방의 교주(交州)까지 다니면서 많은 현지측량을 했다.


729년, <대연력>은 정식으로 대당왕조가 공식역법으로 정한다. 이 신역법은 중국역법체계상의 이정표라고 할 수 있다. "당력지관(唐曆之冠)"으로 불렸다.


다만, <대연력>이 반포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인도에서 온 구담선(瞿曇譔)의 고발을 받는다. 구담선은 신역법이 인도역법을 번역한 <구집력(九執曆)>을 표절했다는 것이다. 게다가 '기술미진(其術未盡)'하다고 평가한다. 그의 뜻은 <대연력>이 <구집력>을 표절했는데 완전히 베끼지 못해서 수준이 많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표절사건은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일까? 우선 고발인인 구담가족에 대하여 먼저 알아보기로 하자.


기원전부터, 그리스천문학지식이 계속하여 인도로 유입된다. 인도문명이 번성한 4,5세기에 천문학도 급속히 발전한다. 그리하여 많은 천문학자와 역법저작이 출현한다. 그리스의 영향을 받아, 인도인들은 이미 지구가 하나의 구체(球體)라는 것을 인식하고 있었다. 중국고대의 "천원지방(天圓地方)"의 인식보다 훨씬 선진적이었다.


당나라가 비단길을 열면서, 인도인들은 이들 선진 천문학지식을 가지고 중국으로 온다. 그리고 당나라의 천문기구에서 요직을 맡는다. 그중 구담일족이 가장 유명하다. 당나라의 천문기구에서 근 백년간 요직을 맡아서, "구담감(瞿曇監)"으로 불린다.


이번 표절사건의 촛점인 <구집력>은 바로 구담선의 조부인 구담실달(瞿曇悉達)이 범어 천문저작 <오종역산전서회편>을 번역하여 만든 것이다. 당시 그리스-인도천문학성과의 집대성이라 할 수 있다.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1. 구담실달은 처음으로 용점부호를 사용하여 0을 표시한다. 중국산주(算籌)체계에서 영(零)의 기호가 없던 공백을 메워준다.

2. 바빌로니아, 그리스천문학중 원주분도체계를 중국에 도입한다. 중국전통의 원주분도는 365.25도인데, 새로 도입한 원주분도는 360도로 더욱 운용하기 편했다.

3. 360도분도체계와 구면삼각법이 기초하여, 월식시 월구가 황도에서 떨어진 도수를 추산했고, 중국역사상 최초의 삼각(정현)함수표를 제정한다.

4. 일식월식을 계산할 때, 일월과 지구간의 거리의 변화를 고려하여, 목측으로 일,월의 직경을 추산하는 방법을 추가했다.


그러나, 이들 선진적인 서방천문학 성과에 대하여, 당나라사람들은 받아들이지 않았을 뿐아니라, 오히려 혹평했다. <신당서>에 따르면, 중국인들은 산주(算籌)를 사용하는데 익숙하여, 인도숫자를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다음으로, <구집력>의 각종계산법은 그냥 공식이다. 구체적인 계산과정이 없었다. 번역한 언어도 낯설고 읽고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대중들이 이해하기 힘들었다. 읽어도 알아보지 못하다보니, 자연히 널리 보급될 수 없었다.


말은 이렇게 했지만, 당나라의 천문기구내에서는 인도역법을 공부하는 학자가 있었다. 일부 인도천문학의 성과를 여전히 받아들였다. 예를 들어, <대연력>의 달의 황위를 측량하는 표는 보기 드물게 360분도체계를 사용했다. 다만 당시 인도역법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여, 비판을 피하기 위해서 일행화상등은 할 수 없이 엄이도령(掩耳盜鈴)해야 했다. 역서에서 "주천도삼백육십오"라고 강조해야 했다. 이 표에서 사용한 것이 중국전통의 365.25도체게인 것처럼 위장했다.


그 외에, 철륵에서 교주까지 대규모로 자오선을 측량하는 과정에서, 얻은 "보귀루술(步晷漏術)"은 0도에서 80도의 1도당 그림자길이와 태영천정거리의 대응숫자표도 <구집력>의 정현함수지식의 영햐을 받았다.


이 고발사건 자체로 돌아가보면, <대연력>은 확실히 선진적인 일부 인도역법의 성과를 흡수했다. 다만 당시의 강대한 수구세력의 영향으로, 역법 자체의 인도천문학 흡수정도에 한계가 많았다.


구담선의 고발은 표절때문이 아니라, 표절을 제대로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인도의 선진내용을 완전히 담고 있지 못했기 때문이다. <신당서>에서 고발원인이 구담선이 역법제정에 참여하지 못해서 한을 품고 고발한 것이라고 하고 있는데, 이는 순전히 송나라사람들이 실제를 잘 모르고 잘못 뒤집어 씌운 것이다. 왜냐하면 구담선의 묘지명을 보면, 그는 712년에 태어났다. 일행화상이 721년 <대연력>을 편찬했을 때 그는 겨우 9살이다. 아예 역법제정에 참가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신역법의 반포로 과학문제는 점점 정치문제로 바뀐다. 당현종은 신역법에 편향된 해결방안을 채택한다. 명을 내려 태사령으로 하여금 두 개의 역서와 천문대의 기록을 비교하도록 한다. 이렇게 되니, 문제는 역법의 윈리를 비교하는 것에서, 어느 역법이 더 정확한지를 비교하는 것으로 바뀌게 된다. <대연력>은 수치를 갱신하였으므로, 결국 승리한다. 구담선은 엄중한 처벌을 받아, 20여년간 외지로 쫓겨난다. 758년이 되어서야 다시 천문대로 되돌아올 수 있었다.


신역법이 승리하면서, 구담가족이 가져온 각종 선진적인 인도역산개념은 찬밥신세가 되고, 중국에서 널리 보급되지 못한다. 그 결과 500여년이후, 원나라의 아랍 천문가가 다시 360도분도를 가져오고, 더욱 정확한 일식,월식계산방법을 가져온다. 그리고 삼각학은 더욱 늦어서 명나라말기에 비로소 서방선교사에 의하여 다시 유입된다.


당송 두 왕조느 당시 선진적이던 서방천문학과 수학분야의 성과를 무시했다. 그것은 중국천문학 역산의 진보에 심각한 걸림돌로 작용한다. 그리고 글로벌추세의 오늘날, 여전히 어떤 사람은 서양역법과 서양명절을 금지해야한다고 주장한다. 이렇게 외래문화를 반대하는 수구파에 대하여 필자는 그들이 하려면 더욱 철저히 하기를 권한다. 서방에서 온 전자제품도 다 부숴버리고, 고대의 '전통'으로 돌아가는게 더 통쾌하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