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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문학/문학일반

'백사(白蛇)'는 어떻게 온유하고 다정한 '백낭자(白娘子)'로 변신하였는가?

by 중은우시 2018. 12. 26.

글: 장영화(張永和)


천여년동안 <백사전(白蛇傳)>의 이야기는 필기(筆記), 소품(小品), 평화(評話), 희곡(戱曲)등의 형식으로 널리 중국의 민간에 전해져 내려왔다. 지금까지도 사람들은 이 전설을 계속하여 고쳐가고 있다. 예를 들어, 자오야즈(趙雅之), 예통(葉童) 주연의 TV드라마 <신백낭자전기(新白娘子傳奇)>라든지, 장만옥, 왕조현, 이연걸등이 주연한 영화 <청사(靑蛇)>등의 영화드라마작품이 있다. 이들은 모두 사람들의 마음 속에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러나, <백사전>과 관련있는 작품을 본 관중이라면, 대부분 그 온유하고 선량한 사선(蛇仙)에 대하여 안타깝고 좋아하는 마음이 들게 될 것이다. 심지어 숙연하게 존경스럽기까지 하다. 그러나, 백낭자가 아름다운 선녀의 이미지로 사람들의 앞에 나타난 것은 최근 1,2백년의 일이다. 역사를 돌아보면, 백낭자의 최초 이미지는 큰 입을 벌려서 피를 내뿜는 사요(蛇妖)였다. 개략 4,5백년전에 비로소 사람의 형태와 성정을 갖기 시작했으며, 그녀가 완전히 인성을 부여받은 것은 기나긴 변신과정을 거쳐야 했다.


백사이야기가 탄생한 것은 당나라때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송나라때의 단편소설집 <태평광기>에 수록된 당나라의 전기 <박이지(博異誌). 백사기(白蛇記)>가 최초의 백사이야기라고 알려져 있다. 이 기록에 따르면, 백사전설의 내용은 이러하다. 젊은 남자가 아름다운 백의미소녀로 변신한 거대한 흰색 뱀과 만났고, 마지막에는 비명횡사한다는 것이다. 이를 보면, 백사는 당,송 사람들의 눈에 무서운 요괴였다.


명나라 가정연간 홍편(洪楩)이 편찬인쇄한 <육십가소설>에는 <송청평산당화본(宋淸平山堂話本). 서호삼탑기(西湖三塔記)>가 있는데 더욱 상세한 백사이야기가 실려 있다: 송효종 연간, 악비 휘하의 해(奚)통제관의 아들인 해선찬(奚宣贊)이 임안(臨安)에서 3명의 여자를 만난다. 그중에는 백의의 아름다운 부인도 있었다. 그녀는 해선찬과 두번 결혼하는데, 그녀는 사람의 심장과 간을 먹는 백사요괴였다. 나중에 해선찬의 숙부인 해진인(奚眞人)이 조카를 구하기 위해, 신선을 모셔서 백사와 다른 두 요괴를 제압하고, 서호의 석탑에 가둔다.


오늘날 <백사전>을 얘기하려면, 반드시 명나라말기 풍몽룡(馮夢龍)이 편저한 단편소설집 <경세통언(警世通言)>을 얘기해야 한다. 그 28권에 실린 <백낭자영진뇌봉탑(白娘子永鎭雷峰塔)>의 이야기내용은 지금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백사전에 아주 접근해 있다. 이 소설에서는 송나라때 천년동안 수련한 사정(蛇精)이 사람의 모습으로 변신하여 이름을 백낭자라고 하고, 서호에서 천년간 수련한 청어정(靑魚精, 아직은 청사가 아니다)이 시녀인 소청(小靑)으로 변신하여 같이 다녔다. 서호에서 놀다가 우연히 약상(藥商) 허선(許宣)을 만난다. 두 사람은 첫눈에 반했고, 서로 사랑하여 결혼까지 한다. 나중에 여러 위난과 시비를 겪으면서 허선은 두 여자가 모두 요정(妖精)이라는 것을 알게 되어 매우 두려워한다. 그래서 법해선사(法海禪師)를 스승으로 모신다. 법해는 두 요정을 발(鉢) 안으로 거두어, 뇌봉탑의 아래에 영원히 가둔다. 수년후에 허선은 좌화(坐化)한다. 이것은 후세인들에게 인과응보를 선전하는 불교이야기이다. 그러나 마침내 완전한 이야기내용을 갖추게 된다. 그리고 백사에 칠정육욕을 부여하여, 일정한 인성을 갖게 했다.


<백사전>이야기의 기원에 관하여, 또 하나의 주장이 있는데, 북송때 하남 탕음(湯陰, 지금의 하남성 학벽시)의 전설이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허가구(許家溝)에 허씨성의 노인이 있는데, 검은 매의 입에서 백사를 구해주게 된다. 보은을 하기 위해 백사는 사람의 모습으로 변신하여, 허씨집안의 후손인 목동 허선(許仙)에게 시집간다. 그리고 약초를 이용하여 병을 치료해주어서, 금산사를 찾던 신도들이 줄어들게 된다. 그러자 흑응전세(黑鷹)이 전세(轉世)한 법해(法海)가 백낭자를 박해한다. 뒤의 이야기는 오늘날의 백사전 이야기와 대동소이하다. 이 이야기는 강남 일대에 퍼져 있었다. 이야기를 듣기 좋아하는 송고종 조구도 매우 좋아했다. 이것이 바로 송,원시기에 백사이야기가 항주 일대에 널리 퍼진 주요한 원인이다. 명나라때 전여성(田汝成)이라는 관리가 있었는데, 관직은 높지 않았다. 그러나 글을 잘 썼다. 그의 작품 <서호유람지>에는 상세하게 서호의 뇌봉탑역사가 기록되어 있는데, 여기에서도, "세상에 전해지기를 호수의 가운데 백사, 청사의 두 괴물이 있었는데, 진압하여 탑 아래에 가두어두었다." 이 설은 풍몽룡의 <경세통언>보다 앞선다.


백사의 요기가 점점 퇴색하고, 사람의 정의를 알게 된 것은 질적인 비약이다. 이것이 이루어진 것은 청나라초기의 몇개 전기부터이다. 가장 주요한 작품은 건륭36년(1771년) 방성배(方成培)가 창작한 전기 <뇌봉탑>이다. 모두 34출(出)로 구성되었는데, 이 극본은 수준이 아주 높다. 그리고 후인들이 가장 찬탄하는 것은 그가 백낭자를 온유하고 선량하며 애정에 충실한 심지어 자신을 희생하는 귀여운 이미지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허선은 원래의 이기적인 남자에서 아주 인정미가 넘치는 사람으로 만들고, 법해는 공연히 남의 일에 간섭하고, 아름다운 혼인을 미워하며, 마음이 비뚤어진 인물로 그렸다는 것이다. 바로 방성배본이 이 몇몇 인물의 성격을 만들어 냈고, 관중들의 심미적인 요구에 부합했다. 그래서 아주 큰 성공을 거두게 된다.


<놔봉탑>전기는 20세기중엽에 중국고전10대비극중 하나로 선정된다. <중국희곡통사>에 실린 글을 보면, "방성배본이 비로소 백사이야기를 진정한 대비극으로 만들어 냈다. 그리고 그 비극이 충돌하는 심각성과 독특성으로 당시의 극단을 관조했고, 여러 관중들을 정복했다." 바로 이 방성배본이 인기를 끌면서, 무대에 올려진 후, 조정의 고관과 회상(淮商)들이 공동으로 추천하여 북경으로 진출한다. 건륭제와 황태후가 보고난 후에 <뇌봉탑전기.는 높은 평가를 받는다.


그외에 탄사보권(彈詞寶卷)도 백사이야기의 원류이다. 청나라 건륭37년(1772년), 탄사 <의요전(義妖傳)>(일명 <백사전>)이 나중에 여러 판본으로 만들어진다. 청나라 동치연간에는 진우건(陳遇乾)의 원고, 진세기(陳世奇), 유수산(兪秀山)의 평정본이 있다. 전해지는 과정에서, 백사의 요기는 점점 약해지고, 이미 인정미가 상당히 있었다. 백낭자는 애정에 충실했고, 소청은 우의에 집착했다. 그래서 허선, 백낭자의 행복한 가정이 법해에게 파괴되자, 사람들에게 크게 동정을 받는다. 그외에 탄사는 허선이 계속하여 배신하지만, 백낭자는 시종일관 사랑하는 거에 대한 해석을 내놓는다. 그리하여 허선이 백사의 전세(前世) 은인이라는 부분을 추가한다: "원선상계(元仙上界), 예지선고(蘂芝仙姑)의 제자인 소정(素貞)은 백사가 수련하여 되었다. 왕모의 지시를 받아 인간세상에 내려와 임안으로 가서 전세 은인의 은혜에 보답하려 했다. 진강(鎭江)에서 흑어정(黑魚精) 흑풍대왕과 결의의형매(義兄妹)를 맺고, 전당강 입구에서 청사를 굴복시켜 비녀로 삼는다. 그리고 이름을 소청이라 하여 같이 다닌다. 나중에 서호에서 과연 전세은인을 만나는데 바로 허선이다." <절강항주부전당현뇌봉보권>에도 이렇게 적혀 있다: "1700년전, 여태(呂泰)가 거지의 손에서 백사를 구해준다. 여태의 지금 이름은 허한문(許漢文)이다. 백사는 생령을 해치지 않고 수련하여 도를 얻었다. 그러나 반드시 은혜에 보답하고자 하여 비로소 신선의 반열에 들어간다."


송나라때부터 명청때까지, 백사의 이야기는 모두 뇌봉탑과 관련이 있다. 나중에 다시 '뇌봉탑이 무너지는" 이야기로 발전한다. 역사상 뇌봉탑은 사요를 가두어둔 적이 없다. 그러나 확실히 여러번 재난을 겪었고, 결국은 무너졌다. 뇌봉탑은 항주서호의 남쪽 석조산의 뇌봉에 있다. 오월국왕 전초가 아들을 북송 태평흥국2년(977년)에 얻어서 건립한 것이다. 명나라 가정연간, 왜구가 탑안에 병사가 숨어있는 것으로 의심하여, 탑에 불을 질러 목조구조물은 불에 타버린다. 그리하여 5층짜리 벽돌탑만 남아서, 서호10경중 하나인 '뇌봉석조(雷峰夕照)'의 살벌한 풍경이 되었다. 더욱 불행한 것은 현지인들에게 뇌봉탑의 벽돌이 피사거병(避邪祛病)할 수 있다고 미신하여, 벽돌을 파내어 훔쳐가는 일이 잦았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뇌봉탑은 크게 손상된다. 마침내 1924년 9월, 전탑(塼塔)이 무너져버린다. 나중에 전탑의 빈공간에서 <보협인경(寶篋印經)>을 발견하는데, 거기에는 건조시기와 연유가 적혀 있었다. 2002년, 정부는 원부지에 뇌봉탑을 중건하여 옛날의 풍모를 다시 드러내게 되었다.


처음 희곡 <뇌봉탑전기>가 공연된 것은 당연히 곤곡(昆曲)이다. 1931년 상해에서 성립된 선하사(仙霞社)는 자주 이 극을 공연했고, 전(傳)자 배분의 유명배우들이 모조리 출연한다: 주전명(朱傳茗)의 백낭자, 장전방(張傳芳)의 소청, 주전영(朱傳瑛)의 허선, 정전감(鄭傳鑒)의 법해. 오랫동안, 경극에서 만일 <백사전>을 부르면, 경극과 곤곡이 공동으로 공연하곤 했다. 이미 명성을 얻은 경극예술가들이 '수만금산(水漫金山)'과 '단교(斷橋)' 두 절(折)을 부를 때는 왕왕 곤강(昆腔, 곤곡의 곡조)으로 불렀다. 1950년대, 매란방(梅蘭芳)이 유진비(兪振飛), 매보구(梅葆玖)와 합작하여 백사전중의 '수만금산'과 '단교'이 두 절을 곤강으로 공연하여, 예술의 정품(精品)이 된다. 그리고 경극영화로도 찍혀져 아주 진귀한 자료로 남는다.


1921년에는 상해의 주신방(周信芳)이 처음 시작하여 전체 경극 <백사전>을 공연하며, 큰소시로 소생(小生)을 부른다. 백낭자는 그의 오랜 파트너인 왕령주(王靈珠)가 맡았다. 1943년, 전한(田漢)은 사유평극사(四維評劇社) 이자귀(李紫貴)의 요청을 받아 <백사전>을 새로 개편하며, 이름을 <금발기(金鉢記)>라 한다. 이 판본은 큰 성공을 거두어 국내외에 명성을 떨친다. 개편후에 이 극의 주제는 비록 여전히 뱀과 인간의 사랑이지만, 다만 전한은 백사이야기에서 남아있던 사악한 공포분위기를 모조리 없애버린다. 그리하여, 백사, 청사 두 뱀을 아름답고 순진하며, 선량하고 진정한 사랑을 하는 인간적인 내면을 부여한다. 그리고 허선에게도 온유하고 유아한 인문정회를 부여한다.


1950년, 전한은 다시 수정하여 이름을 다시 <백사전>으로 고친다. 중국희곡학교에서 연출하고, 희극학교 교장 왕요경(王瑤卿)이 총감독, 총기획을 맡는다. 교장의 지도하에, 학교에서 최고의 진용을 배치한다. 이것이 '왕파(王派)'의 <백사전>이다. 그 특징은 문무를 모두 갖추고, 창과 작품이 모두 뛰어나다는 것이다. 그리고 특히 인물의 성격을 잘 그린다. 유수영(劉秀榮)이 연기한 백사는 청의(靑衣), 화삼(花衫), 도마단(刀馬旦), 심지어 무단(武旦)의 기교까지 한 몸에 갖추어서 선명하게 백사의 전형적인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전체 교사와 학생이 힘을 합쳐서 완성한 가작으로 관중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는다. 그 후, 중국경극원(즉, 국가경극원의 전신)이 다시  <백사전>을 만들어 낸다. 두근방(杜近芳)이 백사를 맡고, 섭성란(葉盛蘭)이 허선을 맡는다. 당시 두근방은 전성기였고, 왕파 <백사전>의 문무겸비를 나타내기 위하여, 그녀는 저명한 무단 배우인 이금홍(李金鴻)에게 무술연기를 배운다. '수투(水鬪)' 장면에서 백사와 신장(神將)의 격렬한 싸움장면을 보여주어 관중들의 찬사를 받는다. 그리고 소생의 태두인 섭성란은 더욱 허선이라는 이 복잡한 인물을 잘 표현해냈다. 나중에 이 역할은 다시 문무노생(文武老生) 이소춘(李少春)이 맡는다.


그후, 장군추(張君秋)와 유설도(劉雪濤), 기운란(冀韵蘭)이 합작하여 다시 이 극을 연출한다. 이름을 <금(金), 단(斷), 뢰(雷)>(즉 <금산사, 단교정, 뇌봉탑>)로 바꾼다. '뇌봉탑'이라는 대목에서는 38구의 반조(反調)를 불러서, 장파(張派)의 특색을 잘 드러낸다. 그외에 <백사전>을 특색있게 공연한 사람으로는 조연협(趙燕俠)이 있다. 그녀가 맡은 백사는 아주 풍부한 생활의 분위기가 있다. 전한은 그녀를 위하여 아주 감동적인 휘조삼안(徽調三眼) "소괴괴(小乖乖)"를 썼고, 명금사(名琴師) 이모량(李慕良)이 악보를 써서 노래하는데 아주 애완비최(哀婉悲催)하여, 사람들의 눈물을 자아냈다. 현재의 경극 <백사전>은 각 경극단에 모두 각 유파의 전인들이 있다. 계승하면서 발전시킨다. 그리하여 이 문무겸비, 심정후애의 경국 <백사전>은 관중들이 아주 좋아하는 전통프로그램으로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