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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문학/문학일반

우문사급(宇文士及): 당태종은 왜 그를 중용했는가

by 중은우시 2018. 5. 10.

글: 모운서(慕雲舒)


정관연간, 한번은 당태종 이세민이 궁중을 거닐다가 나무 한 그루를 가리키며 이렇게 말한다: "이건 가목(嘉木)이구나!" 그러자, 곁에 있던 우문사급이 그 말을 듣고, 이세민의 뜻에 맞추어 그 나무를 한참 칭송한다. 그러자 이세민은 바로 정색을 하고 말한다: "위징이 항상 나에게 간신소인을 멀리하라고 말했댜. 누구를 가리키는 말인지 몰랐었는데, 이제 알겠구나!"


일반 사람이라면 황제가 직접 간신소인이라고 하는 말을 듣게 되면 놀라서 어쩔 줄을 모를텐데, 우문사급은 보통내기가 아니었다. 이세민이 화를 내는 것을 보자 즉시 사죄하며 말한다: "재상들이 자주 황상의 뜻에 거슬리는 말을 해서, 폐하가 어쩔 줄 모르는 난감한 경우를 당하는 경우를 보았습니다. 다행히 오늘은 제가 곁에 있는 바람에 폐하의 뜻에 맞추어 드린 것입니다. 폐하는 천자의 귀한 몸이지만 무슨 즐기는게 있습니까." 대단하다. 정말 고수이다. 이런 심각한 문제를 우문사급은 이렇게 슬쩍 넘어가다니. 그렇다면 이 우문사급은 어떤 사람인가.


우문사급은 수나라의 좌위대장군 우문술(宇文述)의 아들이며, 우문화급(宇文化及)의 동생이다.


618년, 우문화급은 강도지변을 일으켜 수양제를 시해하고, 진왕 양호(楊浩)를 황제로 옹립한다. 우문사급은 이때 내사령(內史令)에 봉해진다. 같은 해, 당고조 이연(李淵)이 당왕조를 건립한다. 이연은 원래 우문사급과 교분이 있어, 사람을 여양(黎陽)으로 보내 우문사급을 만나게 한다. 우문사급은 자신에게 나중에 살 길을 마련하기 위하여, 암중으로 집안사람을 장안으로 보내어 금환(金環)을 이연에게 바친다. 이연은 이를 보고 크게 기뻐하며 말했다: "나는 일찌기 (우문)사급과 같이 조정의 관리로 있었는데, 이제 그가 나에게 금환을 보냈으니, 이건 나에게 투신하겠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618년 9월 우문화급은 시세가 불리해지자 위현(魏縣)으로 도망친다. 우문사급은 우문화급의 세력이 오래가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직감하고, 형인 우문화급에게 당왕조에 투항할 것을 권한다. 그러나 우문화급은 거절한다. 그리하여 우문사급은 봉덕이(封德彛)와 함께 핑계를 대고 제북(濟北)으로 가서 양식을 조달하러 떠난다. 이렇게 하여 시비의 땅에서 멀리 벗어난 것이다. 얼마후, 우문화급은 죽기 전에 양호를 독살하고 스스로 황제에 오르며, 우문사급을 촉왕(蜀王)에 봉한다.


다음 해인 619년, 두건덕(竇建德)이 우문화급을 물리치고, 우문씨 일가를 몰살한다. 이때 바깥에 있던 우문사급은 즉시 봉덕이와 함께 이연에게 투항한다. 이연은 우문사급을 보자 바로 책망한다: "너희 형제는 당초 관중으로 진격하려는 계획을 세웠는데, 만일 우리 부자를 물리쳤다면 우리를 그냥 놔뒀겠는가?" 우문사급은 즉시 죄를 칭하며 말한다: "신의 죄는 만번 죽어 마땅합니다. 다만 신이 이전에 탁군, 분음궁에 있을 때 일찌기 폐하와 시국을 비밀리에 논의한 바 있습니다. 폐하가 황제를 칭한 후에, 신은 투신하고자 했고, 금환을 바친 바 있습니다."


여기에 우문사급의 여동생은 이연의 소의(昭儀)로 이연의 총애를 많이 받고 있었고, 우문사급의 처가 수양제의 장녀인 남양공주(南陽公主)인데, 두건덕이 우문화급을 붙잡아 죽일 때, 남양공주는 부친의 복수를 위하여, 우문사급과 결별하고, 두 사람의 아들인 우문선사도 연좌된다. 그리하여 이연은 다시 종실의 여자인 수광현주(壽光縣主)를 우문사급의 후처로 주고, 관직을 내린다. 이때부터 그는 당나라에서 중용된다.


그 후에는 이세민을 따라서 전쟁에 나섰고, 관직은 중서시랑으로 승진하고, 영국공(郢國公)에 봉해진다.


625년, 우문사급은 시중(侍中) 대리 겸 천책부사마(天策府司馬)가 된다.


현무문사변후인 627년 우문사급은 검교양주도독(檢校凉州都督)이 된다. 당시 돌궐이 여러차례 침입하는데, 우문사급은 강온양책을 쓰면서 변방을 안정시켜 민심을 얻는다. 구월, 우문사급은 전중감이 되고, 얼마후 병으로 다시 포주자사(蒲州刺史)의 외직을 맡는다.


나중에 이세민은 우문사급을 조정으로 불러들여 우위대장군에 명한다. 그리고 그를 자주 내궁으로 불러서 한밤중이 되어서야 돌려보내곤 했다. 그는 성격이 조심스러워, 궁중에서 일어난 일은 집으로 돌아와서도 처에게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이를 보면 알 수 있다. 비록 우문사급이 아부를 잘하지만, 절대로 형편없는 관리는 아니었다는 것을. 이세민은 비록 한때 그를 간신소인이라고 하였지만 그래도 그를 중용했었다.


642년, 우문사급이 병으로 죽는다. 이세민은 그를 좌위대장군,양주도독에 추증하고, 소릉에 배장하도록 하며, 시호를 "공(恭)"으로 내린다. '정기접물왈공(正己接物曰恭)"이므로 좋은 시호이다. 그러나 다른 대신들이 가만히 있지 않았다. 황문시랑 유계(劉洎)는 상소를 올려, "(우문)사급은 생활이 사치하여 '공'이라는 시호에 어울리지 않습니다."라고 한다. 결국 대신들의 통일된 의견에 따라 우문사급의 시호는 "종(縱)"으로 한다. "약이입지왈종(蒻而立志曰縱); 패란백도왈종(敗亂百度曰縱); 망덕패례왈종(忘德敗禮曰縱)" 결국 우문사급의 일생은 이렇게 개관정론(蓋棺定論)되고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