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중국과 문학/문학일반

<금병매(金甁梅)>와 엄세번(嚴世蕃)의 관계

by 중은우시 2020. 7. 16.

글: 소가노대(蕭家老大)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명나라때의 저명한 소설 <금병매>는 엄세번과 깊은 관계가 있다고 말한다. 소설의 주인공 이름이 "서문경(西門慶)"인데, 그는 바로 엄세번을 모델로 한 것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엄세번의 아명이 "경아(慶兒)"였고, 호는 "동루(東樓)"인데, <금병매>의 작자인 "난릉소소생(蘭陵笑笑生)"은 '동루'를 '서문'으로 바꾸고, '경'이라는 이름은 그대로 써서, 주인공의 이름으로 썼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엄세번의 황음무도한 생활을 고발하려는 것이라고 한다.

 

"서문경"이라는 이름이 엄세번을 원형으로 하였는지 아닌지는 잠시 미뤄두자. 다만, 엄세번은 성격이 탐욕스럽고 잔혹했으며, 생활이 부패방탕했다는 것은 맞다. 그래서 소설속의 서문경과 어느 정도 닮은 점은 있다. 그리고, 민간전설에 따르면, <금병매>의 작자는 당대제일의 문호 왕세정(王世貞)이라는 것인데, 그는 부친을 죽인 원수인 엄세번에 보복하기 위해 <금병매>를 썼다고 한다.

 

엄숭(嚴嵩, 엄세번의 부친)은 비록 간사하고 탐욕스러우며, 교활했으나, 부인은 오직 구양씨(歐陽氏) 한명만 두었고, 두 사람은 해로한다. 엄세번은 이 점에서 부친과 달랐다. 탐욕이 있으면 여색을 좋아하고, 여색을 좋아하면 더욱 재물을 탐한다. 이 말이 엄숭에게는 정확하지 않을 수 있지만, 엄세번에게는 아주 적절한 말이다. 엄세번의 처첩은 27명이었다. 나머지 시녀등은 더욱 그 수를 헤아리기 어렵다. 엄세번은 상아로 된 침대를 썼는데, 금사장(金絲帳)을 둘렀으며, 아침 저녁으로 노래하고 춤추며 즐겼다. 그는 자신의 호화사치스러운 생할에 아주 만족했다. 다만, 그는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백성들로부터 원성을 듣게 되는 원인중 하나가 되었다는 것을. 가정연간에 남왜북로(南倭北虜)가 날뒤고, 백성들의 생활은 도탄에 빠져 있었다. 그러나 엄세번은 호화사치스러운 생활을 즐겼으니, 백성들이 미워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엄세번의 아명은 응검(應鈐)이며, 자는 덕구(德球), 호는 동루이다. 목이 짧았고, 살이 쪘으며, 피부는 하얬다. 그는 뚱보였다. 그러나 부친 엄숭은 "수삭장신(瘦削長身)"이어서 빼빼 마르고 키가 컸다. 외모는 부자가 완전히 상반된다. 아마도 그녀는 모친으로부터 뚱뚱하고 하얀 피부를 물려받지 않았나 싶다.

 

이 '태자당'은 뛰어난 재주가 몇 가지 있었다. 그는 교활하고 기민했으며, 한번 들은 것은 잊지 않을 정도로 기억력도 좋았다. 전장제도를 꿰뚫고 있었으며, 경제시무도 잘 알았다. 그리고 정력이 왕성하여, 번잡하고 복잡한 일들도 맡아서 잘 처리했다. 게다가 황상이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에 대한 눈치도 빨랐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이런 에피소드가 있었다고 한다. 가정제가 한번은 밤에 성지를 내려, '어느 어느 일을 어떻게 처리하면 좋을 지'를 물었다. 엄숭은 또 다른 대학사인 서계(徐階), 이본(李本)과 당직실에서 자세히 논의를 했고, 각자 처리의견을 작성한 후, 셋이 돌아가며 수정하기를 반복했지만, 여전히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감히 처리의견을 올리지 못하고 있었다. 엄숭은 할 수 없이 사람을 보내 엄세번에게 어떻게 하는게 좋을지 물어보게 한다. 그때는 이미 4경(새벽1시-3시)이 지나고 있었다. 환관은 여러번 찾아와서 처리의견을 달라고 했다. "황상이 너무 늦다고 생각해서, 얼굴에 노기를 띄었다"고까지 말하며, 즉시 처리의견을 올리라고 말한다. 그래서 세 사람은 그때까지 논의된 내용대로 처리의견을 건네 주었다. 태감은 3명이 적은 처리의견을 가지고 돌아갔다. 그런데 황제는 주필(朱筆)로 여러 곳을 지운 다음에 다시 작성해서 올리라고 하였다.

 

바로 그때, 엄세번이 작성한 처리의견이 도착했다. 세 사람은 그것을 그대로 올렸다. 그랬더니 황상은 대만족하며 그대로 처리하라고 명한다. 서계, 이본 두 사람은 그제서야 엄세번에 진정으로 탄복한다. 이때부터 황상이 난제를 내려, 엄숭등 내각대신들이 의견을 정리하기 곤란할 때면, 바로 엄세번에게 물어보곤 하게 된다. 그러면 언세번은 경전의 근거를 대면서, 줄줄이 해결방안을 제시했다. 그러면, 매번 황제로부터 칭찬을 받곤 했었다.

 

가정제는 책읽기를 좋아했다. 가끔 무슨 뜻인지 모르는게 있으면, 주필로 종이에 적어서 태감을 시켜 엄숭등 내각대신들에게 물어보곤 했다. 하루는 저녁에 유사하게 묻는 성지가 내려왔다. 그러나, 엄숭, 서개등 각신들도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모두 어찌할 바를 모르고 당황해하고 있었는데, 엄숭이 사람들을 다독이며 이렇게 말한다. "걱정하지 마시오!" 그리고 황제가 물은 내용을 적어서 사람을 시켜 서원(西苑)의 궁문(宮門) 문틈으로 내보내 바로 재상부로 달려가게 하여 엄세번에게 답안을 쓰도록 시킨다. 엄세번은 즉석에서 이 말은 어느 책 몇권 몇쪽에 있고, 어떻게 해석해야한다고 적어서 보낸다. 엄숭등이 그 책을 찾아서 뒤져보니 과연 그러했다. 그래서 그대로 해석하여 황상에게 올렸더니 가정제가 아주 기뻐했다.

 

엄세번은 정력이 왕성했다. 그래서 전설적인 일들도 일어난다. 그는 공무에 시달렸지만, 여전히 먹고 마시고 여자와 즐기는 일은 계속했다. 매일 밤 끊이지 않고 계속했다. 한번은 술에 대취해 있었는데, 엄숭이 사람을 보내 중요한 일을 물었다. 그는 큰 세숫대야에 끓인 물을 가득 채우고, 수건을 그 안에 넣어서 뜨거워지면 꺼내서 머리에 세번 감고, 조금 식으면 다시 이를 반복했다. 몇번 그러고 나니 술이 깨었다. 그는 붓을 들어 답을 적어 보냈는데, 일처리가 주도면밀하여, 사람들이 모두 놀란다. 그래서 엄숭이 재상으로 있는 동안에 북경성의 내외에는 '대승상, 소승상"이라는 말이 떠돌았다. "소승상'이란 바로 엄세번을 가리키는 말이다.

 

엄세번은 용모에 특징이 있었다. 뚱뚱하며 귀가 컸다. 그리고 눈 하나가 보이지 않았다. 반맹인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확실히 뛰어난 인물이었다. 다른 사람들과 대화할 때, 상대방이 앞의 말을 꺼내면, 뒤에 무슨 말을 할지를 알았다. 그리고 그는 사람을 아주 정확하게 보았다. 간사하고 교활한 자인지, 아니면 천진난만한 자인지, 모두 그의 눈을 벗어나지 못했다.

 

가정44년(1565년), 삼월 신유일, 엄세번과 나용문(羅龍文)은 처형장으로 끌려가서 참형을 당한다. 이 재능이 출중하고, 학식이 뛰어났으면서도 온갖 나쁜 짓은 다 벌였으며 잔혹하고 악독했던 천재는 이렇게 죄많은 일생을 마감한다. 악이 가득차면 결국 넘치는 법이다.

 

엄세번이 처형되는 그 날, 경성의 사람들은 뛰어다니며 서로 알렸고, 속속 형장으로 가서 구경한다. 술과 음식등을 들고 가서 웃고 떠들면서 먹고 마셨다. 마치 무슨 관광을 온 것처럼. 사람들에게 이렇게 미움을 받기도 참 쉽지 않은 일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