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주균도(周鈞韜)
금병매의 저자에 관한 논쟁은 <금병매>연구에서 가장 촛점이 되는 문제이다. 어떤 사람은 '금학(金學)'의 "골드바흐의 추측"이다. 국내외 연구자들이 관심을 가지고, 많은 학자들이 1,2백편의 논문을 발표하였고, 여러가지 설을 내놓았다. 그중 영향력이 비교적 큰 설은 다음과 같다:
1. 왕세정(王世貞)
도본준(屠本峻)의 <산림경제적>에 나오는 안어(按語)와 <만력야획편. 보유>의 '위화치화(僞畵致禍)'조에서는 최초로 함죽척으로 왕세정이 <금병매>를 지었다는 소식을 실었다. 송기풍(宋起風)이 강희12년에 쓴 <비설>과 청나라초기의 <옥교리연기>는 모두 왕세정이라고 말한다. 그후 <제일기서사이서> 및 청나라사람의 여러 필기에서도 같은 견해가 나와서 일시에 왕세정이 아닐 수 없다는 여론이 형성된다. 그리하여 '고효설(苦孝說)'의 공안까지 나온다(<한화합수필>) 이 설은 1930년대에 노신, 오함, 정진탁, 왕채석, 요령서, 조경심등으로부터 심하게 공격받는다.
1979년에 주성(朱星)은 10가지 이유를 들어, 다시 이 설을 주장한다. 주균도등이 이 설을 지지했다. 그러나 황림, 서삭방, 조경심, 장원분, 오홍, 호방위등은 금방 글을 써서 반박한다. "왕세정설'은 다시 각설이 분분한 미망에 빠진다.
허건평의 <'금학'고론>은 주성, 주균도를 이어 다시 한번 '왕세정설'을 들고 나온다. 외증(外證), 내증(內證)의 두 가지 방면에서 완전히 새롭게 전면적으로 논증한다. 허건평은 심지어 '신시기의 후보자로 왕세정으 지위를 대체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21세기 <금병매>연구는 왕세정연구를 새로운 돌파구와 기점으로 삼아야 한다"고까지 말한다.
그리고, 왕세정문인설(王世貞門人說)도 있다. <옥리교연기>, <제일기서사이서>를 보라.
또한 왕세정, 왕세무(王世懋) 공저설이 있다. 주성 <금병매고증>을 보라. 주균도의 <금병매신탐>은 나아가 왕세정과 문인이 공동으로 창작했다고 주장한다. 노남(盧楠), 도륭(屠隆)등은 모두 왕세정의 문인이므로, 이 설은 사실상 이미 하나로 합쳐졌다고 볼 수 있다. 곽현준(霍現俊)의 <금병매발미>는 왕세정설과 왕세정 및 그 문인의 공저설을 합쳐서 "분명히 여러 사람이 공동으로 창작했다. 주필자는 왕세정이다. 왕세정은 문단의 맹주로 20년간 있었다...여러 사람의 역량을 모아서, 이 '백과전서'를 만들었다. 다만 '저작권'은 왕세정에 속한다고 해야 한다.
2. 가삼근(賈三近)
이는 1980년대에 나온 <금병매> 작자에 대한 새로운 학설이다. 장원분(張遠芬)이 제기했다.
<금병매신증>은 아래의 10가지 방면에서 논증을 진행한다; 첫째, '난릉'은 산동성 역현이다. '명현리(明賢里)'도 역현을 가리킨다. '금화주(金華酒)'는 즉 난릉주이다. 가삼근은 역현 사람이다. 둘째, 그는 '가정연간 대명사'라고 할 수 있다. 셋째, 소설의 성서연대와 가삼근의 생활시대가 들어맞는다. 넷째, 그는 간관(諫官)으로 '지척시사(指斥時事)'를 업으로 삼았다. 관직이 정삼품까지 올랐으니, 그 경력으로 소설을 창작할 수 있다. 다섯째, 소설에는 역현, 북경, 화북 방언이 많다. 가삼근은 각각 이들 지역에서 장기간 거주한 바 았다. 여섯째, 소설의 몇편의 문장수준이 높은 상소문이 있는데, 가삼근은 이에 정통하다. 일곱째, 소설에 어떤 인물과 사건은 가삼근과 유사하다. 여덟째, 소설에는 희곡묘사가 많은데, 가삼근은 이 분야의 생활경험이 있다. 아홉째, 그는 전후로 3번에 걸쳐 모두 10년간 집에서 한거했는데, 소설을 창작할 충분한 시간적 여유가 있었다. 열째, 그는 소설을 쓴 적이 있다.
정경산의 <금병매논고>는 이 설을 보충했다. 풍전해 <금병매작자가삼근>, 고념경 <가삼근은 금병매의 작가이다>, <가삼근설신증>, 왕관재 <가삼근과 금병매>, 마삼 <금병매의 작자를 불러내고 싶다>등에서 이 설을 지지했다. 왕관재는 그리고 이 설이 '현재 가장 완비되었다고 할 수 있다'고 말한다. 마삼은 '난릉의 가삼근은 실제로 가장 난릉소소생에 가까운 인물이다'라고 말한다. 이금산 <'금병매작가는 가삼근'이라는데 대한 이의>, 이시인 <금병매의 '금화주'는 '난릉주'가 아니라는 것의 고증>, <가삼근이 금병매를 지었다는 것은 성립될 수 없다>, 이금산,제패 <가삼근은 금병매 작자가 아니다>, 녕원위 <금병매작자가삼근질의>등에서는 이의를 내놓는다. 유휘 <금병매연구십년>, 허건평 <신시기금병매연구술평>에서도 다른 의견을 취한다. '난릉'은 두 곳이 있다는 것이다. 하나는 산동 역현이고, 다른 하나는 강소 무진이라고 한다. 지리와 방언으로 작자를 정하는 것은 과학적으로 의문이 있다는 것이다.
3. 도륭(屠隆)
황림(黃霖)이 가장 먼제 제기한다. 그는 모두 8편의 글을 발표하며 7가지 이유를 든다: 첫째, 소설56회의 <애두건시>, <제두건문>은 소화집 <개권일소>에 나오는데, 거기의 '소소선생', '하하도사'는 모두 도륭이다. 둘째, 소설에서는 절강방언이 적지 않게 나온다. 도륭의 관적과 들어맞는다. 셋째, 도륭의 조적이 무진이다. 옛날 이름은 난릉이다. 넷째, 만력20년을 전후하여 도륭은 파직되어 불도에 심취한다. 그 사상은 소설창작취지와 일치한다. 다섯째, 도륭은 '음종(淫縱)'으로 파면된다. 그리고 문학작품은 '선악병존(善惡竝存), 음아잡진(淫雅雜陳)'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정욕관은 바로 소설의 특수한 사상적 기초가 된다. 여섯째, 도륭은 <금병매>를 창작할 여러가지 생활기초와 문화소양을 갖추고 있다. 일곱째, 도륭은 유승희, 왕세정과 관계가 밀접하다. 이 두 사람은 모두 <금병매>원고본을 모두 가지고 있었는데, 마땅히 도륭이 증여한 것이라고 봐야 한다.
위자운 <도륭이 금병매의 작자이다>, <금병매작자도륭보고증>등이 먼저 호응한다. 그리고 다시 <도륭파관 및 그 조충죄우>에서 '아마도 도륭이 <금병매>를 쓴 동기일 것이다'라고 토론한다. 나아가 고증을 거친 후 다시 <위금병매작자화구점>을 쓴다. 유공복, 반량치 <금병매초본의 유전상황을 작자문제를 논한다>, 이연청 <금병매작자도륭설고석>, 여각 <도운과 도본: 소소생과 흔흔자>, 이연청등 <도륭과 문인해방사조>도 이어서 지지한다. 정윤은 <금병매와 도륭>이라는 책을 발표하여 도륭이 청하현령을 지내고 <정파주첩전>등 소설을 쓴 적이 있다는 데서 출발하여, 난릉소소생이 바로 도륭이며, 도륭이 <금병매>전서를 쓴 시간은 만력17년여름이라고 보았다. 다른 점이라면 그가 '하하도사'는 도본준이라고 본다. 그가 쓴 <소사> 즉 <개권일소>에는 '흔자'라고 자서한 도본은 <금병매>의 서문을 쓴 '흔흔자'라고 보았다. 정윤은 황림이 도륭설을 제창한 후, 전력을 다하여 이 설을 고취하는 인물이 된다.
서삭방은 <금병매작자도륭고 질의>, <금병매작자도륭고 질의지이>, <별두건문은 금병매작자가 도륭이라는 것을 증명하지 못한다>등 글을 써서 <개권일소> 즉 <산중일석화>는 청나라초기의 작품이라고 본다. 작자는 서술기로 본다. 이런 류의 소화집은 여기저기서 모으기 때문에 신뢰할만한 사료라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도륭설에 대한 부저추신이다. 당연히 황림과의 논쟁이 벌어진다. 서삭방은 또한 '소소선생'과 '소소생'은 같은 사람이 아니라고 본다. '참열자(參閱者)'는 편자가 아니고 더구나 작자는 아니라고 본다. 장원분 <금병매의 일시일문을 또 논한다>에서 소설56회는 '누유보이입각'한 53-57회에 속한다며, 도륭은 기껏해야 이 5회의 작자라는 것이다. 유휘 <금병매연구십년>은 도본준과 도륭이 같은 마을의 같은 일족이라고 본다. 관계가 밀접하여, 도륭이 만일 <금병매>를 지었다면, 도본사가 모를 리 없다고 본다. 그가 금단 왕우태의 집으로 가서 초본을 봐야할 필요가 없다. 더더구나 <산림경제적>에서는 '전해지기로 가정때 어떤 사람이 <금병매>를 맡겼다"는 말이 나올 수 없는 것이다. 정경산 <금병매신고>는 소설에 인용된 소위 도륭작품은 53-57회를 보완하여 만들어 넣으면서 집어넣은 것이라고 본다. 장경선 <난릉소소생과 소소선생 - 금병매작자도륭고질의>등에서도 이견을 내놓는다. 이 설을 둘러싼 논쟁은 아주 뜨겁다. 그러나 이 설은 여전히 논거가 비교적 유력하고, 추단이 비교적 합리적이며 영향이 비교적 큰 견해라고 할 수 가 있다.
그리고 도대년(屠大年)설도 있다. 정윤 <흔흔자도본준고석>을 보라. 노가 <흔흔자는 도분준이 아니고, 소소생은 도륭, 도대년이 아니다>에서 이에 대하여 의문을 표시한다.
4. 이개선(李開先)
이 설은 중국사회과학원 문학연구소에서 1962년 출판한 <중국문학사>의 각주로 의문을 표시하는 어투로 적어넣었다. 1979년 재판을 인쇄할 때는 '이개선의 가능성이 비교적 크다'는 구절이 삭제된다. 전해지는 바로는 이 각주는 오효령(吳曉鈴)이 넣었다고 한다. 오효령은 1982년 6월 미국에서 <금병매작자신고>를 발표하며 강연때 이 설을 다시 주장한다. 그는 일본, 인도, 카나다, 요녕대학, 중국문화서원에서 강연할 때도 같은 말을 한다. 서삭방은 이개선이 <금병배>의 사정자(寫定者)라고 주장한다. 조경심 <금병매고증과연구서>에서는 서삭방의 주장을 지지한다. 두유말 <금병매사화>성서 및 기타를 논하다>에서 오효령의 설을 지지한다. 일하취(日下翠) <금병매작자고증>에서는 이대선설에 대하여 2가지 새로운 견해를 제시한다(이개선과 금병매의 관계에 관한 3가지 보충, 서문경 신상에 이개선의 '자아투영').
주성, 정경산, 왕휘빈등은 이개선설을 배척한다. 이시인등은 집체누적설을 반박한다. 복건(卜鍵)은 종적을 찾아서 남도를 방문하고 <이씨족보>를 찾아낸다. 이개선의 행적을 고찰하고, 나아가 <금병매> 작자를 조사한 후 <금병매작자이개선고>라는 책을 쓴다. <보검기>와 <금병매>, 이개선과 서문경, 청하우의, 난릉의 의미등 여러 소설내증의 방면에서 그리고 개인소질, 작품풍격, 교제범위등 작자자질문제등을 다루며 이개선설을 집대성한다. 유휘는 이 책의 서문에서 이렇게 적었다 "이는 내가 근년들어 읽은 가장 설득력있는 <금병매>작자를 논증하는 글이다." 그러나 그러나 지나치게 세밀하여 억지로 끌어붙인 혐의도 있다고 하면서, '청하'는 바로 장구(章丘)라는 것이 하나의 사례라고 적었다. 허건평 <신시기금병매연구술평>에서는 이 설에 의문을 표시한다; "<금병매>가 인용한 문자작품은 희곡만이 아니라, 대량의 화본, 시문도 있다. 이개선의 작품만이 아니라, 많은 다른 사람의 작품도 있다. 만일 작자가 이개선이라고 증명하려면, 반드시 다른 작품의 작자도 <금병매>를 창작하여 사정할 가능성을 배제해서는 안된다."
5. 서위(徐謂)
최초로 이 설을 내놓은 것은 원중도 <유거시록>이다. 아더 웨일리의 영역본 <금병매. 도언>에서 이 설을 처음 주장하나 음이 비슷해서 잘못하고 장관이대의 웃음거리가 된다. 예상치 못하게 60년후, 반승옥 <금병매신증>은 이 설을 완성하고, 비교적 전면적으로 학술적 논증을 한다. 이 책은 먼저 소설의 불,도의 묘사를 분석하여 <금병매>의 작자는 '가정, 융경, 만력 삼조를 살고, 주로 가정연간에 활동한 인물"이라고 했다. 그리고 이어서 "소설작자는 동시에 자료가 풍부한 희곡작가, 기교가 익숙한 희곡작가, 소양이 전면적인 화가와 응용문을 쓰는데 뛰어난 막료이다"라고 했다. "작자는 분명 변방에서 적을 방어하는 생활경험이 있는 인물이다." "비교적 강열한 민족우환의식과 방어국방의식이 있는 사람이다" "작자는 강렿한 방언, 속어애호가이다." "작자는 반드시 각 방언구(소흥, 산동, 북경, 소주, 산서, 복건, 광동등)의 생활경험이 있어야 한다." "책을 쓰면서 저자의 이름을 숨기는 기호가 있는 사람이다." 그리고 <금병매지리원형고>, <금병매중의 소흥주와 기타 소흥풍물>, <금병매중의 소흥민속>, <금병매중의 소흥방언>등 고증을 통하여, '소설작자는 반드시 소흥인이어야 한다" 그 후에 하나하나 논증한다. "서위는 ,금병매작자의 일체 조건에 들어맞는다." 반승옥은 소설의 여러 수수께깨, "입공(廿公)" "서성관원(徐姓官員)", "청하현(淸河縣)", "난릉(蘭陵)", "소소생(笑笑生)"등을 풀어서 "절동 소흥부 산음현 서위"라고 했다. 그리하여 '소흥노유설'로 귀결된다. 반승옥은 또한 <금병매> 초본을 연구하여, 동기창이 유전단서의 중심인물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도망령은 초분을 전달한 핵심인물이라고 보았다. "도망령이 가지고 있는 <금병매>는 서위에게서 왔고, 서위의 원고일 가능성이 아주 높다." 반승옥은 또한 <금병매문본과 서위문자의 관련성 비교>엣 "간단한 하나의 결론을 내렸다. 서위의 문자는 서위가 쓴 것이다. <사화>도 서위가 쓴 것이다." 반승옥은 나아가 '소승사인과 엄숭' '심련과 엄숭부자', '서위와 심련'을 논증한다. <연하설분위수원>이라는 데서 "서위는 향풍의 영향을 받아 심련의 죽음에 흥분하여 <금병매>를 썼다. 그리고 그는 붓을 들고 동시에 그의 일생의 모든 불행을 적었다." 엄격하게 말해서, 반승옥이야말로 서위설의 창립자이다. 엄숭수 <금병매신증고>에서 말하듯이 "당신이 작자의 논단을 받아들이든 만들, 너는 그가 제기한 대량의 문본자료와 관련자료에 끌릴 것이다. 그리고 크게 느끼는 바가 있을 것이다." <금병매신증>은 모든 <금병매>작가연구성과중 논리가 가장 엄밀하고, 추론이 가장 정치하며, 글이 가장 교훈적이며, 구조가 가장 면밀한 것이다. 반승옥의 서위설, 황림의 도륭설, 복건의 이개선설, 허건평의 왕세정설은 당금 <금병매>작자의 연구성과중 4대학설이라고 할 만하다.
6. 왕치등(王稚登)
노가. 마징 <금병매 및 그 작자 탐비>에서 주장했다. 주요 증거는 13개이다: 첫째, 왕치등은 가장 먼저 <금병매>초본을 가지고 또한 초본을 가진 자들 중에서 가장 작가의 자격이 있는 사람이다. 둘째, 그는 고칭 '난릉'의 무진 사람이다. 셋째, 그는 도륭의 인품에 불만을 품고, 그의 <애두건시> <제두건문>을 소설에 넣었다. 이를 통해 풍자한 것이다. 넷째, 소설의 시사곡은 왕치등의 소위 <오소집>어구, 의경과 같거나 비슷하다. 다섯째, 왕치등의 <전덕기>의 일부 내용은 <금병매>의 일부 수법과 같거나 비슷하다. 여섯째, 그의 시문과 소설의 쓰는 방식이 일맥상통한다. 일곱째,소설의 오어, 북경화, 산동화, 산서화, 왕치증의 경력은 그로 하여금 이들 지방방언에 익숙하게 했다. 여덟째, 그와 소설은 모두 남방인을 멸시하고 중원정통관념을 가지고 있다. 아홉째, 그는 '가정연간대명사' '세묘시일거공'에 부합한다. 열째, 그는 왕세정의 문객이고, 그래서 소설로 '지척시사'하여 왕세정의 부친의 복수를 했다. 열한째, 왕초선 일가는 왕치등가의 추악한 원형을 예술적으로 재현한 것이다. 열두째, 소설에서 크게 감동받은 싯구인 "후문일입심여해(侯門一入深如海), 종차소랑시로인(從此蕭郞是路人)"을 세번 인용한다. 열셋째, 소설에서 반영된 작자의 모양은 그이 상황과 들어맞는다. 손손 <만화금병매>는 이 설이 영향력이 비교적 큰 5대설 중 하나라고 적었다. '그 가능성은 가삼근, 도륭설보다 낮지 않다."
7. 탕현조(湯顯祖)
예효위 <탕현조창작금병매고>에서 주장했다. 예효위는 30건의 소설원문을 인용하여, 탕현조와의 관계를 논술한다. 그리고 <금병매>의 초기유전상황과 탕현조의 평생행적을 조사하여 탕현조가 수창지현으로 있을 때 그 임기내에 <금병매>를 창작했다는 결론을 내놓는다.
서삭방은 <당현조창작금병매고의 간개와 질의>에서 예효위의 30건 인용문구중에서 10개문구에 대한 반박론을 내놓는다. '어떤 사람과 일에 관한 서술과 판단은 왕왕 사실을 벗어나고, 원의에 어긋난다'고 적었다. 에효위는 <탕현조창작금병매의 비평에 대한 답변>에서 '그는 비록 내가 세운 설의 부당한 저을 지적했지만, 나는 나의 건축에 대체로 안전하게 서 있다고 본다.'고 했다.
8. 풍몽룡(馮夢龍)
진육비(陳毓羆) <금병매초본의 유전부신과 작자문제신탐>과 위자운 <풍몽룡과 금병매>는 이 설의 선구라고 할 수 있다. 이 전에 요령서의 <병외치언>, 소야인 <금병매해설>등에서 금병에에 서문을 쓴 '동오농주객(東吳弄珠客)'이 풍몽룡이 아닌가 의심을 했었다. 그후 진창항 <금병매작자풍몽룡고술>, <금병매작자풍몽룡고보>, <풍몽룡.금병매.장죽파>에서 나아가 "금병매의 작자는 풍몽룡이다"라고 주장한다. 위자운은 <개권일소>의 편자는 풍몽룡이고, 그는 진창항과 모두 '동오농주객' '난릉소소생', '흔흔자'가 모두 풍몽룡의 필명이라고 본다. 진창항은 구체적으로 풍몽룡이 <금병매>를 창작한 생활기초, 사상기초, 문학기초를 3단계로 논증한다. 조백영 <풍몽룡은 금병매사화의 보족자>에서 풍몽룡의 작용을 축소한다. 왕휘빈 <풍몽룡이 금병매작자가 아니라는 변설>, 노가.마징 <금병매및 작자탐비>에서는 의문을 나타낸다.
그외에도 <금병매>의 작자로 지목되는 사람은 많다: 이선방(李先芳), 심덕부(沈德符), 이어(李漁), 조남성(趙南星), 노남(盧楠), 이지(李贄), 풍유지(馮惟踬), 사진(謝榛), 가몽룡(賈夢龍), 설응기(薛應旗), 유구(劉九), 장진숙(臧晋叔), 정요항(丁耀亢)/구지충(丘志充)/구석상(丘石常), 김성탄(金聖嘆), 전예형(田藝蘅), 왕채(王采), 당인(唐寅), 이반룡(李攀龍), 소명봉(蕭鳴鳳), 호충(胡忠), 정유녕(丁惟寧), 김오척리문객설(金吾戚里門客說), 가정간대명사설(嘉靖間大名士說), 난릉소소생설, 소흥노유설, 세묘시일거공설(世廟時一巨公說), 모효렴설(某孝廉說), 육병(陸炳)에게 모함당한 피해자설, 당형천(唐荊川)에게 해를 입어 죽은 사람의 아들설, 재인설(才人說), 명계부랑문인설(明季浮浪文人說), 관해도인설(觀海道人說), 전겸익배설(錢謙益輩說), 오농설(吳儂說), 서회재인(書會才人)류의 중하층지식분자설, 동로락락생설(東魯落落生說), 나여방(羅汝芳)을 쫓아다니던 문사 혹은 나여방을 잘알고 그 영향을 받은 사람설, 하북적인설(河北籍人說), 회간인(淮間人)혹은 회간에서 생활한 사람이 썼다는 설, 유승희문객(劉承禧門客), 유승희, 풍몽룡등이 전후로 완성했다는 설, 하북의 모 장공자(張公子)설, 청하현사설(淸河縣士說), 사무재설(謝茂才說), 청하의 모 공(孔)선생이 초고를 쓰고 모 낙백서생이 가지와 이파리를 더해서 완성했다는 설, 산동난릉소소생설(山東蘭陵蕭笑生說), 난릉재자소소생설(蘭陵才子) 소소생(蕭蕭生)설, 만력때 소주 모 대문인이 두아복(杜阿福)이 부른 <반금련>을 듣고 가공정리하여 완성했다는 설, 호남 평강 향인설, 일찌기 산동에서 장사를 한 휘주문화인설 등 5,6십가지가 넘는 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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