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정문(鄭文)
모순은 현대의 저명한 작가일 뿐아니라, 그는 초기 공산당원중 하나이며, 저명한 문화및사회활동가이고, 신중국의 초대문화부장을 지냈다. 그리하여 모택동과 많은 교류가 있었다.
1920년 7월 중국최초의 공산주의소조인 상하이공산주의소조가 성립된다. 1920년 10월 모순은 이달(李達), 이한준(李漢俊)의 소개로 입당했다. 당시 공산당간행물 <공산당> 잡지에 그는 <공산주의는 무슨 뜻인가?> <미국공산당강령><미국공산당선언>등 번역문을 발표했다. 1921년 7월 중국공산당이 성립되고, 모순은 상하이공산주의소조 구성원에서 정식 당원이 된다. 그리고 당중앙 직속의 연락원이 된다. 나중에 중공 상하이지방겸구 집행위원회 위원 및 국민운동위원회 위원장이 된다.
1923년 8월 5일, 상하이지방겸구집행위원회 제6차회의에서 모순은 처음 중앙위원 모택동을 만난다. 모택동은 당중앙을 대표하여 회의에 출석하여 지도했다. 모택동은 회의에서 당시 절강성 경무처장을 맡고 있던 김불장(金佛莊)에게 기회를 보아 반전선언을 하도록 밀명했다. 만일 전투에 나서야 한다면 실력을 보존해야한다고 말했다. 모순은 나중에 회고록에서 이렇게 썼다: "이를 보면, 모택동은 일찌감치 공산당이 총부리를 장악해야한다는 문제를 주목하고 있었다."
1925년 12월 모순은 국민당 상해특별시당부 선전부장이 된다. 상해시당원을 대표하여 광주로 국민당 제2차대표대회에 참가한다. 대회참가를 마친 후, 모순은 국민당 중앙선전부 비서로 임명된다. 당시 모택동은 국민당 대리선전부장이었다. 당시 부장의 아래에 비서가 있었고, 모탣동은 초초녀(肖楚女)에게 모순의 선전부업무를 돕게 했다. 그리고 모순에게 모택동을 대신하여 <정치주보>를 편집하게 한다. 모순은 모택동의 영도하에 선전부의 업무를 했는데, 아주 바빴고 비교적 순조로웠다. 두 사람은 업무처리가 잘 맞았다. 모택동이 휴가를 냈을 때는 모순이 선전부장업무를 대리했다. 다만 얼마 지나지 않아 당중앙은 모순에게 상하이로 돌아오도록 한다. 모택동과 헤어질 때, 모택동은 이렇게 당부한다: "상하이의 민국일보는 일찌감치 우파가 장악했다. 이곳의 국민당중앙은 상해에 후설(喉舌)이 없다. 네가 상해에 간 후 당보를 창간해라. 어느 정도 성과가 나타나면 나에게 편지를 보내달라." 모순은 전력을 다하겠다고 약속한다. 상해로 돌아ㅗㄴ 후 그는 <중화신보>를 접수하여 상해의 당보로 삼는다. 그리고 국민당 상해교통국 대리국장이 된다. 그리고 모택동이 계획한 국민운동총서를 편집출판한다.
1927년 1월, 모순은 당중앙에 의해 무한에 파견나간다. 거기서 중앙군사정치학교 무한분교 교관이 된다. 같은 해 4월, 당중앙은 다시 모순을 한구 <민국일보> 총편집에 임명한다. 모순은 <민국일보>에 <혁명세력정리>등 모택동의 농민운동에 대한 의견에 찬동하는 글을 발표한다. 장사의 '마일사변(馬日事變)'이 발생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모순은 <민국일보>를 사직하고, 모택동의 동생 모택민(毛澤民)과 함께 지하활동을 시작한다. 반개월간 숨어 있다가,모순은 당의 명령을 받아 남창으로 간다. 그러나 도중에 저지를 당해 그후 당조직과의 연락이 끊어진다.
대혁명이 실패하자, 모순은 한동안 어찌할 바를 모른다. "공산주의의 이론을 나는 믿어 의심치 않는다. 소련의 선례는 확실하다. 다만 중국혁명의 도로는 어떻게 가야 하는가? 이전에 나는 이미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1927년 여름, 나는 스스로 잘 모른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리하여, 모순은 혁명청연의 인생의 길을 반영하는 소설 <환멸> <동요> <추구> 및 중국사회현실을 반영하는 소설 <자야>등을 창작하여 저명한 작가, 문학평론가가 되고, '좌련'에 가입하여 노신과 어깨를 나란히 한다.
항전이 발발한 후, 모순은 중화전국문예계항적협회 이사가 되어 <문예진지> <입보.언림>등 간행물의 총편집인이 된다. 1938년 12월, 모순은 요청을 받아 신강으로 간다. 신강학원에서 교편을 잡고 신강문화협회 위원장이 된다. 다만 금방 신강의 당시 일인자 성세재(盛世才)의 진면목을 알아차리고 1940년 4월 신강을 떠난다. 도중에 연안을 지날 때, 모순은 다시 모택동을 만난다. "그는 여전히 똑같았다. 담소풍생(談笑風生)했다. 십여년전과 똑같았다." 모택동은 모순에게 금방 출판한 <신민주주의론>을 주고, 함께 식사를 하면서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눈다. 중국고전문학등을 얘기했다. 모택동은 모순에게 노신예술문학원으로 갈 것을 건의했다. "노신은 일면기치(一面旗幟)가 필요하다. 네가 가서 기치가 되어라." 나는 말했다. "기치가 되기에는 자격이 부족하다. 그러나 가는 것은 기꺼이 가겠다. 나는 문학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모순은 모택동의 의견대로 노신예술문학원으로 간다. 그리고 노신예술문화원, 섬감녕변구문화협회등에서 강연을 한다. 얼마 후, 주은래의 요청을 받아, 모순은 중경으로 가서 곽말약이 주재하는 문화공작위원회 상무위원이 된다. 떠날 때 장문천(張聞天)은 모순에게 중앙서기처에서 모순의 당적회복요구를 연구했는데, 현재 당밖에 남아 있는 것이 이후의 업무나 인민의 시야로 보는데 더욱 유리할 것이라고 생각했다며 나에게 양해해달라고 했다. 모택동은 모순이 두 아이를 연안에 남기고 떠날 때, "너는 두 짐을 여기에 놔두었으니, 가볍게 떠나라."고 말했다.
중경에 있을 때, 주은래의 영도하에 모순은 문화계인사들을 단결시켜 항일업무에 많이 종사했다. 자신은 잡문을 쓰고 소설 <부식>을 쓰고, 신문잡지의 편집을 맡았다. 1945년 6월 24일, 주은래의 의견에 따라, 중경문예계는 모순 오십세생일 및 창작생활 이십오주년 기념 다회(茶會)를 연다. 같은 날 <신화일보> 제3면에 모순의 생일을 축하하는 사설 <중국문예공작자의 노정>을 싣는다. 그리고 제2면에 왕약비(王若飛)가 쓴 <중국문에게의 영광, 중국지식인의 영광 -모순선생 오십세생일을 축하합니다>를 실어, 공산당을 대표하여 모순을 높이 평가했다. 모순을 "중국민죽과 중국인민중 가장 우수한 지식분자이다. 모순선생은 중국의 신문예를 위하여 현실주의의 도로를 탐색했다...모순선생의 최대의 성공은 바로 그의 창작이 중국현실을 반영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그가 창작하는 중심내용이 중국인민해방운동과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1945년 중경에서 국공회담을 벌일 때, 모택동이 중경으로 온다. 모순은 먼저 부인 공덕지(孔德沚)와 모택동을 예의상 방문한다. 나중에 마인초(馬寅初)와 함께 모택동과 두 시간동안 얘기를 나눈다. 그후 모순은 대량의 시정폐해를 쓴 잡문과 전국해방이후의 이야기를 그린 소설 <춘천(春天)>을 쓴다. 1949년 원단, <화상보>에는 모순이 쓴 글 <영접신년, 영접신중국>을 싣는다. 거기에는 "신중국이 탄생했다. 이는 오천년만에 중국민족의 가장 큰 경사이다. 이는 아시아민족의 유사이래 가장 큰 경사이다. 이는 인민역량이 반드시 부패폭력의 특권집단에 이긴다는 유력한 증거이다. 이는 민주역량이 반드시 반민주역량을 이긴다는 유력한 증거이다. 신민주주의의 신중국은 독립, 자주, 평화의 대국이 될 것이고, 평등, 자유, 번영강락의 대가정이 될 것이다."
1949년 7월 모순은 중국문학예술계연합회 부주석과 중국문학공작자협회(나중에 중국작가협회로 고침) 주석이 된다. 10월, 모순은 중앙인민정부 문화부장이 되고, <인민문학>잡지의 편집인이 된다. 모순은 원래 완곡하게 문화부장의 직위를 거절했지만, 모택동이 직접 모순에게 말했다: "듣기에 너는 관직을 맡고 싶지 않다면서. 그건 쉽게 해결할 수 있다. 너는 그먕 이름만 걸어놓아라. 우리가 일잘하는 조수를 붙여주겠다. 실제업무는 그들에게 하라고 하면 된다." 이 일잘하는 조수는 바로 주양(周揚)이다. 주양은 문화부 제1부부장이 된다.
모순은 비록 '이름만 걸어놓은' 문화부장이지만, 작가를 배양하고, 문예활동을 전개하고, 국가문화유산을 보호하고, 대외문화교류를 하는 등의 방면에서 많은 일을 했다. 그리고 문화계에서 빈번하게 전개되는 정치운동에서 의견을 발표했다. 모순은 <반드시 철저하고 전면적으로 호풍문예사상에 대한 비판을 전개해야 한다> <반드시 문예공작에서 공산당영도를 강화해야 한다> <대시대비(大是大非)를 명확히 판별하고, 사상개조를 계속한다> <세심혁면(洗心革面), 과사회주의(過社會主義)>등의 글을 발표한다. 다만 그의 내심은 아주 모순, 곤혹과 고통을 느꼈다. 예를 들어, 그는 자신이 아주 잘 아는 정령(丁玲)을 비판할 때 아주 고통스럽게 말했다: "나는 잘모르겠다. 정령이 왜 철저하게 자백하려고 하지 않는지. 당의 품으로 돌아오지 않는지. 세심혁면하지 않는지. 오히려 이렇게 침중한 정신적인 짐을 지려고 하는지. 설마 그녀는 정신적인 고통을 느끼지 못한단 말인가?..." 그후 모순은 병을 이유로 비판글을 쓰는 것을 거절한다. 그리고 관련부서에 더이상 그에게 글을 쓰라고 재촉하지 말 것을 요청한다.
"수욕정이풍부지(樹欲靜而風不止)" 설사 모순이 은인하더라도, '폭풍' 특히 '문혁'중의 '광풍취우(狂風驟雨)'는 모순에게도 불어닥쳤다. 1963년 12월 23일, 모순은 중국문련이 개최한 소속각협회 책임자연석회의에 참석한다. 중공중앙선전부 부부장 임묵함(林默涵)이 전달한 모택동이 12월 12일 본 중선부 문예쳐가 편찬 인쇄한 <문예회보>를 본 후 문예공작에 관련해 내린 비시(批示)를 들었다: "각종 문화형식 - 희극, 곡예, 음악, 미술, 무도, 영화, 시와 문학등등, 문제가 적지 않고, 사람수도 아주 많다. 사회주의개조의 여러 부문 중에서, 지금까지 효과가 적다. 많은 부문은 지금까지 '죽은 사람'이 통치하고 있다. 영화, 신시, 미술, 소설의 성취를 저평가해서는 안된다. 다만 그중에도 문제가 적지 않다. 희극등 부문은 문제가 더욱 크다. 사회경제기초가 이미 바뀌었는데, 이 기초를 위해 봉사하는 상부구조의 하나인 예술부문은 지금까지 큰 문제가 있다. 이는 조사연구에 착수하고, 진지하게 처리해야 한다. 많은 공산당원은 정열적으로 봉건주의와 자본주의의 예술을 제창하고, 사회주의예술을 제창하는데는 열정적이지 않다. 이것은 괴이한 일이 아닌가." 이 비시가 직접적으로 겨냥하는 것은 14년간 문화부장을 지낸 모순이 아닌다. 모순은 이를 듣고 말한마디로 할 수 없었고, 잠이 들 수 없었다.
1964년 6월 27일, 모택동은 <중앙선전부의 전국문련과 소속각부협회 정풍에 관한 상황보고>를 읽은 후, 다시 제2차 비시를 내린다: "이들 협회와 그들이 장악한 간행물은 대다수(듣기로 몇 개는 좋은 것도 있다고 한다)는 십여년동안 기본적으로 (모든 사람이 아니라) 당의 정책을 집행하지 않고 있다. 관리로서 그저 어르신으로 지내고, 공농병에 접근하지 않았다. 사회주의혁명과 건설을 반영하지 않았다. 최근 몇년, 수정주의의 변연에 빠졌다. 만일 제대로 개조하지 않으면 반드시 장래 어느 날 헝가리의 페퇴피 쾨르와 같은 단체로 바뀔 수 있다." 이는 십오년간의 문예공작에 대한 부정이다. 십오년간 문예공작을 주관한 문화부장 모순에 대한 부정이다.
얼마 후, 모순은 문화부장의 직위를 면직당한다. 그리고 정협부주석이 된다. 이때부터 모순은 기본적으로 문예계의 활동을 사양했다. 기본적으로 더 이상 창작하지 않는다. 그래도 모순의 소설 <임가포자(林家鋪子)를 개편한 영화는 비판을 받았다. 모순의 집도 홍위병에게 공격받았다. 중앙선전부 부장 육정일(陸定一)은 모순의 이름을 직접 거명하며 비판했다. 작가협회는 모순을 비판하는 자료를 정리했다. 다만 운이 좋게도, 모순은 시종 공개비판을 받지 않았다. 그것은 주은래의 보호때문이었다고 한다. 다만 아마도 모순의 중요한 지위와 영향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노곽모(魯郭茅)', 모순은 어쨌든 당시 곽말약 바로 다음가는 문인이었다), 아마도 모택동과 모순의 개인적인 관계와도 관련이 있을 것이다.
비록 침묵했지만, 모순의 내심은 '문혁'에 대해 모택동에 대해 이견을 가지고 있었다. 모순의 아들 위도(韋韜)는 이렇게 쓴 바 있다: "모주석이 일으킨 '문화대혁명'에 처음 부친도 찬성했다. 모주석은 수정주의에 반대하고 방어하는 각도에서 고려했을 것이라고 여겼다. 그도 중국이 소련의 뒤를 따르는 것은 걱정했다. 수정주의로 변하는 것을 걱정했다. 다만 금방 부친은 많은 것에 대하여 이해할 수 없다고 여기게 된다." 모순은 가족들에게 여러번 '문혁'에 대한 분노를 드러냈다. 자주 통심질수하여 '천원인노(天怨人怒)'라고 말했다. 그리고 몰래 친인, 주은래등을 회고하는 글과 엣시사, 회고록 및 <상엽홍어이월화(霜葉紅於二月花)>를 이어서 썼다.
1976년 9월 10일 모택동이 사망한다. 위도는 이렇게 썼다: "부친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조용히 지켜보면서 기다리고 있었다. 9월 18일, 수도의 백만군중이 천안문광장에서 융중하게 모주석이 서거한 추도대회를 개최했다. 부친과 나도 참가했다. 집으로 돌아온 후 위도는 부친에게 물었다. '총리서가후에 군중들이 인민영웅기념비의 앞에 헌화하는 것과 같이 자발적으로 추도하는 장면이 나타날 것으로 보십니까?' '그렇지 않다' 한참을 침묵한 후 부친이 반문한다: '너는 '기존방침대로 한다'라는 최고지시를 보았느냐? 그건 모주석의 임종유언이다. 즉 마지막 '최후지시'이다. 그런데 앞뒤 글이 없다. 앞뒤를 자르고 이렇게 말하다니 정말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다."
얼마 후, '사인방'이 타도되고, 모순은 <반당집단'사인방'분쇄>라는 시가를 지어 환호했다. 그리고 며칠 후 수도의 각계애국인사들이 속속 사인방타도를 경축하는 좌담회를 열었고, 거기에서 처음으로 공개발언한다. 그후 문련의 명예주석을 맡았다. 1981년 3월 27일, 모순은 베이징에서 사망한다. 3월 31일, 중공중앙은 모순의 생전요구에 따라 그의 중국공산당 당적을 회복시키기로 결정한다. 그리고 당령은 1921년부터 계산하기로 한다. 등소평이 모순의 추도회를 주재했고, 호요방이 추도사를 써서, 모순을 높이 평가한다: "우리는 아주 침통한 심정으로 깊이 이 중국혁명사업, 중국신흥의 혁명문학사업에 일생을 분투한 탁월한 프롤레타리아문화전사를 추도한다. 심안빙(沈雁氷)동지는 국내외에 높은 명망을 지닌 혁명작가이고, 문화활동가이면 사회활동가이다..."
모순의 필명이 얘기하는 것처럼, 모순의 일생은 명암의 사이에서 문학과 정치의 사이에서 모순이었다. 그와 모택동의 관계는 이런 모순을 분명하게 반영한다. 모순은 전체적으로 모택동을 존경하고 따랐다. 그러나 모택동의 특히 '문혁'에 대하여는 이견을 가졌다.이는 모순의 정치지위와 역사평가의 변화에 영향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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