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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송)

남송은 왜 남경(南京)이 아닌 항주(杭州)를 수도로 정했을까?

by 중은우시 2018. 12. 20.

글: 흥체경(興替鏡)


남경과 항주에 관하여 누가 동남지구의 제1도시인지 문제는 여러차례의 논쟁이 있어왔다. 남경과 항주는 각각의 장점이 있다. 다만 총체적으로 보자면 남경의 역사감이 항주보다는 확실히 높다. 그래서 역대의 남방정권은 기본적으로 모두 남경을 수도로 삼아서 북방정권에 대항했다. 다만 모든 일에는 예외가 있는 법이다. 예를 들어, 남송정권의 수도는 남경을 선택하지 않고, 항주를 선택했었다. 그렇다면 왜 남경을 놔두고 항주를 선택했을까?


1. 송나라이전에 남경의 지위는 항주보다 확실히 높았다.


고대중국역사상, 북방정권이 수도를 선택할 때는 기본적으로 낙양과 장안의 사이에서 반복적으로 오가며 망설였다. 남방정권은 기본적으로 다른 생각을 갖지 않고 남경을 선택했다. 왜냐하면, 고대사회에서 남경은 동남지구의 경제, 군사, 문화, 정치중심이었고, 동시에 장강의 천험을 보유하고 있어 호거용반(虎踞龍盤)이라고 불리웠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고대의 남방정권은 모두 남경을 수도로 선택했다. 예를 들어, 동오, 동진등이 그들이다. 이 단계에서 항주의 지위는 확실히 남경만 못했다. 당나라통치시기에 해외무역이 아주 발달하면서, 항주의 지리적우세가 드러나기 시작한다. 그리고 동남지역의 중요도시로 성장한다. 그래도 전체적으로 남경만 못했다. 오대십국시대에 항주는 오월국(吳越國)의 수도였고, 남경은 남당(南唐)의 수도였다. 두 정권은 상호 대항했다. 전쟁의 영향으로 남경의 경제지위는 동요되기 시작한다. 평화적으로 투항하였기 대문에 항주는 전쟁을 겪지 않았다.


북송통치시기에 비록 남경이 여전히 동남지구의 중심이었지만, 항주의 경제는 이미 남경을 추월한다. 북송이 통치하던 말기, 북방의 금나라가 대거 남하하고, 송나라의 수도 개봉을 함락시킨다. 그리고 송나라의 송휘종, 송흠종 두 황제를 포로로 잡아간다. 그러나 금나라는 이때 아직 한화정도가 약했고, 중원지역을 함락시킨 후, 안정시키지 못하고, 그저 약탈을 벌인 후 자신들이 잘 아는 북방지역으로 돌아간다. 천하에 주인이 없다보니, 송나라황실의 유일한 생존자 조구는 당연하게 새로운 황제에 오른다. 당시 국가의 수도에 관하여 3가지 서로 다른 목소리가 나타났다. 긱긱 구도 개봉(開封), 양양(襄陽)과 양주(揚州)였다. 개봉방안은 직접적으로 배제된다. 왜냐하면 개봉은 사전지지(四戰之地)로 근본적으로 무험가수(無險可守)했다. 조정의 대부분 관리들도 개봉으로 돌아가는 것은 건의하지 않는다. 양양은 양호(兩湖, 호남,호북)지구를 지킬 수 있었고, 양주는 강북에 위치하여 강남을 지킬 수 있었다. 양양과 양주는 각각 장단점이 있었다. 양양은 국가의 중앙부에 위치하고 있어, 강남지역을 통제하는데는 불리했다. 그래서 조구는 결국 최종적으로 양주를 선택한다.


2. 송나라군신은 일찌기 남경과 항주의 사이에서 계속 망설였다.


기실 남송만이 아니라, 고대의 남방정권은 모두 이런 문제가 있었다. 상의를 거친 후, 남송의 군신은 양주성으로 들어간다. 이때부터 전체 강남의 안전을 지키게 된다. 다만 금나라대군이 돌연 남하하자, 남송은 어쩔 줄 모르게 된다. 금나라군대가 파죽지세로 밀고 들어왔고, 양주는 장강의 북안에 있다보니 지리적 위치가 좋지 않았다. 도망가는 과정에서, 조구는 전국옥새(傳國玉璽)와 송나라 역대황제의 패위(牌位)를 잃어버리고, 조구 본인은 놀라서 이후 생육능력을 상실한다. 금나라군대의 추격을 피하기 위하여, 남송의 군신은 양주에서 남경으로 도망친다. 그리고 다시 남경에서 진강(鎭江)으로 도망친다. 마지막에는 진강도 안전하지 못하다고 생각하여 항구도시 항주로 간다. 금나라군대가 밀려올 때는 송나라군신이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서 천리대도주를 연출한다. 이번 도망과정에서, 송나라군신은 항주의 편리한 조건을 발견한다. 일단 금나라군대가 남하하면 가볍게 후퇴할 수 있는 것이다. 방어의 각도에서 보자면 항주가 가장 적합한 선택지였다.


막 건립되고, 군사적으로 절대적인 열세에 놓인 남송정권에 있어서, 확실히 항주를 선택했어야 했다. 다만 항주는 송나라의 수도가 되지 못한다. 황제는 단지 임시로 항주에 거주하고 있을 뿐이었다. 남송과 금나라는 반복하여 밀고당기는 전투를 벌였다. 송나라군대가 일련의 승리를 거두고, 남송의 강회(江淮)방어선이 안정되었다. 이때, 남경을 수도로 하자는 목소리가 갈수록 커진다. 남천(南遷)정권으로서, 상당한 관리들은 북벌하여 실지를 수복하기를 바랬다. 남경을 수도로 정하는 것은 공격하면 회하이북지역으로 들어갈 수 있고, 물러나면 강남의 반벽강산을 지킬 수 있다. 전쟁국면의 발전변화에 따라, 남송황제 조구는 확실히 남경으로 천도할 생각을 품는다. 다만 그 후에 발생한 회서병변(淮西兵變)은 국면을 완전히 바꾸어 버린다. 남송은 강회지역에서 원래 공세를 취하고 있었는데, 회서병변으로 수만의 송나라군대가 허수아비정권인 제(齊)나라에 투항한다. 강회지구의 공수에 역전이 일어난 것이다. 이때 남송이 남경으로 천도하는 것은 아주 비이성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3. 강회방어선이 약화되면서, 송나라는 항주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회서병변이후, 남송의 강회방어선은 심각하게 약화된다. 이후, 남송은 방어상태에 처한다. 송고종 조구는 재위말기에, 금나라황제 완안량이 대군을 이끌고 남하한다. 그리고 신속하게 송나라의 강회방어선을 무너뜨리고, 직접 장강북안에 주둔한다. 비록 완안량이 장강을 건너오지는 않았지만, 남송의 강회방어선의 문제점이 드러난다. 강회방어선, 양양방어선, 천섬(川陝)방어선중에서 강회방어선이 가장 박약했다. 이번 전쟁을 겪은 후, 남송의 군신은 기본적으로 남경천도의 생각을 포기한다. 임시수도인 항주를 경영하는데 주력한다. 남송통치시기에 항주의 인구총수는 심지어 이전의 개봉을 뛰어넘는다. 추산에 따르면, 남송시기의 항주는 17만호, 100만의 인구를 가지고 있었다. 건국초기, 항주는 여전히 이 수준이었다. 이를 보면, 당시 항주가 얼마나 번화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