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소가노대(蕭家老大)
정강2년(1127년) 일월초, 혼용무능한 북송의 군신들이 제대로 대응을 봇하고, 게다가 강호술사 곽경(郭京)을 잘못 기용하여 나라를 망치는 바람이 북송의 도성 변경은 금나라군대에 함락당한다. 금나라병사들은 당시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대도시를 한바탕 약탈한다. 같은 해 사월초, 금나라병사들은 송휘종, 송흠종의 두 황제와 송나라의 후비, 황자, 종실, 귀족등 3천여명을 데리고 북으로 돌아간다. 금나라병사들에게 끌려간 사람은 그 외에도 교방악공, 기예공장등 수천명과 평민백성도 10만명이 넘었다. 그중에서 여자들이 특히 많았다. 금나라병사들은 북송조정의 대량의 문서와 지도 그리고 금은보화를 가져갔다. 북송은 이렇게 멸망한다. 역사에서 "정강지변" 혹은 "정강지치"라고 부리는 사건이다.
정강2년(1127) 오월초하루, 당시 21살이던 강왕(康王) 조구(趙構)는 남경응천부(하남성 상구)에서 즉위하여 조송정권을 회복시키니 그가 송고종이다. 정강2년은 건염원년으로 연호를 바꾼다.
송고종이 황제에 오른 때는 형세가 엄준하여, 부득이 명망이 높은 애국명신 이강(李綱)을 재상에 앉힌다. 그러나, 조구가 당시 진정으로 믿었던 사람은 간신 왕백언(汪伯彦), 황잠선(黃潛善), 그리고 일부 환관들이었다. 황잠선과 왕백언은 옛 영토를 회복하는데는 생각이 없었고, 동남으로 천도할 것을 줄기차게 주장한다. 그리하여 동남쪽의 땅에서 편안하게 지내고자 한 것이다. 이것은 송고종의 생각과도 들어맞았다.
건염2년(1128) 연말, 금나라의 좌부원수 종유(宗維)가 서주를 함락시키고, 군대를 몰아 남하한다. 회양(淮陽)을 수비하고 있던 한세충(韓世忠)의 군대는 바로 궤멸되어, 염성(鹽城)으로 패주한다. 금나라병사들은 바로 진격한다.
건염3년(1129), 금나라병사를 두려워하던 송나라장수 유광세(劉光世)는 싸우지도 않고 도망친다. 그리하여 금나라병사들은 순조롭게 회하(淮河)를 건널 수 있었다 .이어서 금나라의 기병은 당시의 남송조정소재지인 양주(揚州)를 향해 진격한다.
이월초하흘 새벽, 송고종 조구는 마침 후궁을 안고 성생활을 즐기고 있었다. 내시성의 압반(押班) 강리(康履)가 돌은 긴급상황을 보고한다. 소식을 정탐하러 보낸 내시들이 밤을 새워 도망쳐와서 보고하는데, 천장(天長)이 이미 함락되었고, 금나라병사들이 양주를 향해 달려오고 있다는 것이었다. 기병은 곧 양주로 쇄도할 것이라는 것이다. 이 소식은 청천벽력같았다. 한창 방사를 즐기던 조구는 졸지에 놀라서 양위가 되었다. 그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급히 갑옷을 챙겨입고, 어마에 올라타서 밖으로 도망친다. 급히 그의 뒤를 따르는 것은 어영도통제 왕연(王淵), 내시 강리등 5,6명에 불과했다.
이때 양주성내는 혼란이 시작된다. 병사들과 백성들이 모두 공포에 빠지고, 인심이 흉흉해져서, 사방으로 피난가는 무리가 도시를 떠난다. 재상 왕백언, 황잠선은 그러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관리들을 데리고 고승의 설법을 듣고 있었다. 많은 관리들이 재상의 사무실을 찾아와서 물어봤으나, 그들이 들을 수 있는 것은 차가운 대답이었다; "이미 조치를 취했으니 걱정할 것 없습니다" 형세는 아주 긴급했고, 적이 이미 눈앞에 다가왔는데도 이들 관리들은 여전히 술마시고 노래부르며 연회를 즐기고 있었다. 황제가 이미 양주를 도망쳤다는 소식이 듣자 급히 말을 타고 도망친다.
황제가 도주했다는 소식은 금방 양주성내에 퍼진다. 백성들은 더욱 혼란스러워진다. 노인과 아이를 데리고, 등집을 매고, 황급히 피난을 떠난다. 궁녀들은 길거리에서 울면서 도처로 뛰어다니다가 난민들에게 강간당한다. 관리들은 말을 타고 칼을 휘두르며 피난민들 사이를 뚫고 나갔다. 성문입구는 사람들이 많이 몰려서, 수천의 노약자와 아녀자들이 짓밟혀서 죽는다. 양주성은 혼란 그 자체였다.
송고종은 양주성의 남문을 빠져 나와서 양자교(揚子橋)에 말을 세운다. 절강성 동부 출신의 한 위사(衛士)가 그에게 불손한 말을 한다. 그가 황잠선을 중용하여 이런 국면이 초래되었다고 한 것이다. 송고종은 매우 화가나서, 패검을 빼들고, 그 위사를 베어버린다. 그후에 게속 남쪽으로 도망친다. 단번에 장강변의 과주진(瓜洲鎭)까지 갔다.
이때 과주부두의 상황은 더욱 혼란스러웠다. 관선(官船)을 찾을 수 없을 뿐아니라, 민선(民船)도 얼마 되지 않았다. 십여만의 난민이 강가에서 서로 건너려고 다투고 있었다. 우연히 배가 한 척오면, 부두에 배를 대기도 전에 물 속에서 도강하려고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에게 낚아채였다. 힘있고 용기있는 자들이 금나라와 싸우는 전선에 간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살인약탈을 한 후에 배를 빼앗아 장강을 건너고 있었던 것이다.
송고종은 심복인 왕연의 도움으로, 하나의 작은 배를 구한다. 큰 상을 내리겠다고 약속하고서 배를 타고 강을 건넌다. 이번에 그가 배를 타고 건널 때는 아무도 그를 따르지 않았다. 건너편이 도착한 후, 혼자서 강가의 수제묘(水帝廟)로 걸어가서 휴식을 취한다. 진강부(鎭江府)의 수신(守臣) 전백언(錢伯言)은 송고종이 강을 건너 서진구(西津口)에 도착했다는 소식을 듣고 부병(府兵)을 보내어 그를 진강부치(鎭江府治)로 모셔온다. 그제서야 송고종은 비로소 약간 안정을 취할 수 있었다.
과주진은 과부도(瓜埠渡)리고도 부른다. 강소성 한강현(邗江縣)의 남부이고, 대운하가 장강으로 들어가는 곳이다. 양주에서는 약 50리 떨어져 있다. 장강 남북수운의 교통요충지이고, 고대의 유명한 부두이다. 건염3년(1129) 이월 초사흘, 양주에서 과두진으로 오는 길은 모두 피난민으로 가득했다. 부두에 모여있는 사람이 십만여에 이른다. 난민은 강변에서 울며불며 혼란을 겪고 있었다. 최근 운하의 수위가 낮아져서, 운하의 배는 장강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다. 그저 몇 척의 작은 배를 타고 건널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배가 특히 부족했다.
그날 밤, 금나라군대릐 선두부대 오백기병이 양주로 진입한다. 그리고 대거 간음약탈을 벌이다. 적성루(摘星樓)를 불태워버린다. 다음 날, 금나라병사들은 과주도까지 추격해온다. 이때 아직 강을 건너지 못한 난민은 여전히 십여만에 이르렀다. 금나라병사들이 밀려오자, 수만은 강으로 뛰어들어 죽는다. 강가에서는 금나라병사들이 살륙을 벌여 피자국이 낭자했다. 부녀들은 도성으로 다시 끌려가서 금나라병사들의 잔혹한 학대를 받는다. 과주도에는 곳곳에 버려진 금은주보가 흩어져 있어서, 금나라 병사들이 주워가졌다. 관청의 문건과 조정의 의장물품도 산처럼 쌓여 있었다. 이번 전란에서, 남송황실은 체면을 완전히 구기게 된다.
바로 이 날, 금나라병사의 후속인마 4천5백명이 계속 천장에서 양주로 들어온다. 양주성내에는 대약탈, 대도살이 벌어진다. 성안의 부녀들과 금은보화는 모조리 빼앗긴다. 미처 도망가지 못한 남송의 궁녀와 관리의 처자식들은 모조리 끌려간다. 금나라병사들은 양주성내에서 반달간 약탈을 벌인 후, 부녀와 금은보화를 가득 싣고 북으로 돌아간다. 금나라병사들이 양주를 물러날 때, 불을 질러 성을 불태워버린다. 성안의 모든 건축물이 물에 타서 없어진다.
양주를 공격해 들어왔던 금나라기병부대는 인원수가 5천이 되지 않았다. 짧음 몇 달동안(비록 만난 것이 모두 연약한 송군이기는 했지만), 실제로 이미 전력이 약화되어 싸우면 충분히 이길 수 있는 정도였다. 그러나 남송왕조의 통치자는 연약한 성격으로 이 비극의 죄괴화수(罪魁禍首)가 된다.
악비가 죽은 후 십여년만에, 금나라의 해릉왕 완안량은 남송을 집어삼킬 생각을 한다. 그래서 사신 왕전재(王全在)가 남송으로 떠날 때 사신으로 하여금 송고종의 면전에서 송고종을 욕하고 책망하도록 명령한다. 완안량은 그러면서 사신에게 말했다; "그는 감히 너를 해치지 못할 것이다."
송고종은 금나라사자가 악독하게 욕하는 것을 듣고도 화를 내지 않았을 뿐아니라, 가련하게도 병풍 뒤에 숨어서 눈물을 흘렸다. 그 후에 조구는 여전히 남송대신들에게 연회를 베풀어 환대하라고 명령한다. 예의를 다하여 금나라 사자를 보내주고, 계속 사신을 금나라에 파견하여 우호관계를 유지하고자 한다.
남송의 사서는 황제의 치욕을 덮어주기 위하여, 금나라사자가 송고종을 욕하고 책망한 구체적인 내용은 일절 적지 않았다.
<송사.고종본기>에는 송고종에 대하여 이렇게 평가해놓았는데 기본적으로 정확하다:
"고종은 공검인후(恭儉仁厚)하여, 계체수문(繼體守文)하는데는 충분하지만, 발란반정(拔亂反正)하는 재목은 아니다. 하물며 당시는 시국이 어렵고 형세가 급박한데, 병력은 약하고 재물을 부족했다. 그리고, 그가 해야할 일이 어려운 것은 여러 다른 군왕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였다. 군자가 이를 봤다면 역시 고종에 대하여 연민의 마음을 품었을 것이고, 그가 닥친 불행을 가슴아파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처음 즉위했을 때는 사방에서 근위군이 몰려오고, 내상 이강, 외장 종택이 있어 천하의 일을 하지 못할 것이 없었다. 그런데 궁벽한 곳으로 천도하고 묘, 유등 여러 도적의 반란을 막는 것을 중시하여, 미봉책으로 나라를 세우니, 확실히 싸우는 것이 힘들었다.
그는 처음에 왕, 황에 미혹되었고, 마지막에는 회, 염에게 이끌려 나약하고 볼품없게 되어 기회를 놓친다. 더욱 심한 것은 조정, 장준이 연이여 배척받고, 악비부자는 대공을 이루려 할 때 피살된다. 일시에 뜻이 있는 인사들이 모두 안타까워 하며 이를 갈게 된다.
황제가 편안안 것을 찾고 치욕도 참으여, 원한은 묻어두고 황친도 잊어버린디, 죽은 후에 후세의 비난을 듣지 않을 수 없다. 슬픈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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