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삼창(森彰)
1234년 송(宋)-몽골(蒙)연합군이 금(金)을 멸망시킨 후, 남송의 운명은 이미 결정되었다. 다음 해, 몽골칸 오고타이가 서로는 천섬(川陝)에서 동으로는 회하(淮河)하류에 이르는 수천리전선에서 동시에 남송에 대한 공격을 개시한다. 송-몽골전쟁이 전면적으로 발발한 것이다. 그러나 사천의 작은 성인 조어성(지금의 중경시 합천구. 송나라때는 合州라 불렀다)는 전쟁사상 기적을 창조한다. '상제지편(上帝之鞭)'이라 불리던 몽골철기를 성에서 36년간이나 막아낸 것이다. 이는 중국고대 성방어전사상 가장 뛰어난 사례였다.
송-몽골의 전쟁이 개시된 2년후, 당시 전체 사천지역이 함락되었다. 국면을 전환하고 상류를 공고히 하기 위하여, 1242년 남송황제 송이종은 전적이 현저한 여개(余玠)를 사천으로 보내 방어전을 지휘하게 한다.
여개가 사천으로 간 후, 염진(冉璡), 염박(冉璞) 형제의 계책을 받아들여, 조어산(釣魚山)을 중심으로 산성방어체계를 구축한다. 송나라조정의 동의를 받은 후, 염씨형제는 축성천주(築城遷州) 업무를 전적으로 책임진다.
완공후의 조어성은 내,외성으로 나뉘어진다. 외성은 깍아지른 절벽의 위에 축성되었고, 성벽은 조석(條石)으로 쌓아서 만들었다. 성문은 8개인데, 성문위에는 누각을 만들었다. 각각 호국(護國), 시관(始關), 소동(小東), 신동(新東), 청화(菁華), 출기(出奇), 기승(奇勝), 진서(鎭西)이다. 성안의 면적은 1.9평방킬로미터이고, 수천 무(畝)의 좋은 밭과 사계절 끊이지 않는 풍부한 수원이 있었다. 전체 합주를 조어성으로 이주시킨 후, 군민(軍民)이 결합하고, 경전(耕戰)을 결합하여, 공수를 자유자재로 하게 되어 군사중진이 된다. 나중에 여개는 이를 모범으로 하여, '수점불수선(守點不守線), 연점이성선(聯點而成線)"의 책략을 취한다. 사천의 각 험요지에 20여개의 산성을 축성하여, 완벽한 산성방어체계를 형성한다. 조어성은 이 체계의 핵심이자 가장 견고한 보루였다. 1254년, 합주의 수비장수 왕견(王堅)은 진인보하여 성을 완비한다. 사천의 병방백성들이 병란을 피해 이곳으로 많이 왔고, 조어성은 정예병사에 충분한 식량을 갖춘 견고한 보루가 되었다.
1251년, 징기스칸의 막내아들 톨루이의 장남 몽케가 칸의 보좌에 올라 몽골의 정국을 안정시킨다. 그리고 적극적으로 남송을 멸망시키는 전쟁을 기획한다. 1252년, 쿠빌라이는 군대를 이끌고 대리(大理)를 평정하여, 남송에 대하여 포위협공의 틀을 갖춘다. 6년간의 기획을 거쳐 1258년 가을, 몽케는 4만의 군대를 이끌고 3갈래로 나누어 사천에 들어간다. 게다가 사천의 몽골군과 각지에서 징집해서 온 부대를 더하면 몽골군의 인원수는 4만을 훨씬 넘었다. 몽골군은 검문고죽애(劍門苦竹隘), 장녕산성(長寧山城), 봉주운산성(蓬州運山城), 낭주대획성(閬州大獲城), 광안대량성(廣安大良城)등을 연이어 점거하고 합주로 다가왔다.
어떤 역사학자에 따르면, 몽골대군이 조어성을 오래 공격했지만 함락시키지 못한 원인은 몽골군대에 기병이 많아서, 공성전에 능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사실을 보면 이런 결론은 성립될 수가 없다.
<문사참고>의 <냉병기전쟁의 기적: 합천조어성전투>라는 글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몽골군대는 부주(涪州) 린시(藺市)에서 다리를 만들어 장강하류의 원병을 막고, 다시 중경하류의 동라협(銅鑼峽) 협강(夾江)에 요새를 건조하여 중경의 송군을 위협하고 견제했다. 몽케는 동시에 군대를 보내어 성의 남쪽 가릉강쪽을 봉쇄하고, 성밖의 서북산채를 취한다. 그리고 군대를 보내어 조어산 주위의 순라를 책임지게 한다.
이 방법은 효과가 있었다. 몽골군은 한때 성남의 외성을 함락시킨다. 그러나 성을 수비하는 송군이 천연적으로 형성된 암도(暗道)를 이용하여 몽골군을 괴롭혔고, 바위를 타고 올라가서 몽골군을 위에서 공격하여 결국 외성을 수복한다.
오랫동안 공격했으나 함락시키지 못한 몽골군은 땅굴(地道)을 꿇어 공성하고자 한다. 그들은 기승문(奇勝門)의 북쪽 약 150미터 지점에서부터 땅굴을 파기 시작한다. 이 땅굴은 종횡이 교차하고, 주통도(主通道), 지도(支道), 수정(竪井)로 구성되어 있다. 굴의 너비는 1.5미터이고, 높이는 약 1미터였다. 절단면은 '철(凸)'자형을 하고 있었다. 이런 형상은 시간과 인력을 절약할 수 있었고, 복병을 숨길 수 있었다. 지하의 '요(凹)'자로 들어간 부분은 배수용으로 쓰였다. 양쪽의 토대(土臺)는 사병들이 휴식을 취하는 장소로 쓰였다. 지면에서는 거짓공격을 감행하는 엄호하에, 몽골사병은 땅굴에 숨어서, 깊은 밤을 틈타 기승문으로 공격해 들어가 많은 군민을 죽인다. 그러나 왕견의 조직하에, 수비군은 몽골군을 격퇴한다. 그 후에 뇌석(擂石)으로 땅굴을 막아서 후환을 없앤다.
이를 보면, 몽골군이 공격하는데 일련의 조치를 취했지만, 조어성은 "삼면이 강에 접하고, 절벽이 험하고 높이가 있어, 수비하기는 쉽고 공격하기는 어려웠다." 동시에 청거(靑居), 대획(大獲), 운정(雲頂), 천생(天生)등 11개의 위성 성지(城池)가 있었다. 이들 위성 성지는 모두 암도와 잔도(棧道)로 조어성과 통해 있었다. 그리하여 조어성과 서로 호응하여 삼엄한 조어성군사방어체계를 갖출 수 있었다. 진빈빈(陳彬斌)은 <중국문화보>에 쓴 글에서 이렇게 말했다. '일선천(一線天)'으로 불린 곳의 가장 좁은 곳은 겨우 1사람이 통과할 수 있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전투가 가장 격렬했을 때, 몽골군이 부두에 오른 뒤 한때 성벽에 근접한 적이 있다. 그때 바로 이곳에서 더 나가지 못했다고 한다.
그외에 조어성은 충분한 경작지, 어당(魚塘), 수지(水池)등 장기간 견딜 수 있는 기본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군민이 한 마음으로 단결한 것이다. 그리하여 조어성은 함락시키기 어려운 마지막 관문이 되었다. 포위공격을 수개월간 당한 후에도 조어성은 여전히 물자가 풍부했고, 수비군은 투지가 높았다.
조어성을 오랫동안 공격해도 함락시키지 못하자, 몽케는 여러 장수들에게 "진취지계(進取之計)"를 의논하라고 한다. 대장 수수쿠리(術速忽里)는 견고한 성의 아래에 병사를 주둔시키는 것은 불리하므로, 차라리 소수의 부대를 남겨 괴롭히게 하고, 주력부대는 장강을 따라 동으로 내려가, 쿠빌라이등의 군대와 합친 후 일거에 남송을 멸망시키자고 주장한다. 그러나, 한번도 좌절을 겪은 적이 없는 몽골군은 퇴각을 하고자 하지 않았고, 계속하여 공성한다.
기실 몽골군이 남하하기 전에, 모사 유현(遊顯)은 몽케에게 이렇게 진언했다: "파촉(巴蜀)은 강의 흐름이 빨르고, 땅은 가파르며, 배는 다니기 힘듭니다. 물자를 공급하기 아주 어려우니, 육군(六軍)이곳에 출병하는 것은 만전지책이 아닙니다." 유현은 몽케에게 파촉이라는 곳의 지리적 특징을 분석했고, 수로이건 육로이건 모두 운송하기 불리하다고 보았다. 이는 군대에 있어서 아주 어려운 상황이다. 유현의 분석은 이치에 맞지 안흔 것이 아니다. 몽골기병은 여러번 원정에 성공했지만, 그들이 의지한 것은 단병작전에서의 용맹함이다. 더더구나 완벽한 물자조달이 필요했다. 만일 이것이 보장되지 않으면, 몽골군대는 절대로 성공적인 원정을 완성할 수 없다.
조어성의 앞에서 몽골군대의 문제점은 그대로 드러난다.
촉도(蜀道)는 원래 길이 험하다. 이해는 더구나 가뭄이 들어서 반년동안 비가 내리지 않았다. 왕견은 몽골군이 공격하기 전에 일찌감치 견벽청야(堅壁淸野)의 전략을 실행해서, 몽골군이 심각한 보급난을 겪게 만들었다.
왕견은 몽골군의 곤경을 잘 알았다. 몽골군의 공성결심을 흔들기 위하여, 조어성의 수비장수는 30여근무게의 두 마리 생선과 면병(麵餠) 수백장을 투석기로 몽골군영에 보낸다. 그러면서 서신도 한 통 붙인다. 몽케로 하여금 고기를 구워서 면병과 함께 먹으라고 하면서, 성안은 양식과 물이 모두 충분하니 10년을 더 지키더라도 몽골군은 함락시킬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이때는 이미 한여름이었고, 몽골군대는 혹서에다가 수토불복(水土不服, 물과 땅이 맞지 않다)으로, 학질과 곽란이 유행하여 몽골군은 부득이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몽케 본인은 군대를 금검산(金劍山) 온탕협(溫湯峽)까지 철수했을 때 사망한다.
이 몽골제국의 제4대칸이 죽음에 관하여, 역사상 여러가지 설이 있다. 가장 널리 알려진 설은 몽케가 화살을 맞고 죽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원사>의 기록에 따르면, 몽케칸은 학질에 걸려서 죽었다고 한다. 청나라때의 <고금도서집성>에서는 몽케가 망루를 가설하여 조어성을 들여다볼 때, 성안의 송군이 포석(砲石)으로 공격하여, 중상을 입어 죽었다고 한다; 또 다른 견해로는 몽케가 여러번 왕견에게 조어성에게 좌절을 겪은 후, "패전의 치욕으로 분사(憤死)했다"는 것이다.
어떤 설을 취하든 이번 몽골의 공격은 몽케의 죽음으로 중단된다. 쿠빌라이는 동생 아릭부케와 칸위를 다투기 위하여 급히 군대를 철수하여 북상한다. 남송왕조는 잠시 위험을 벗어난 것이다.
1271년, 칸위를 빼앗은 쿠빌라이는 국호를 원(元)으로 바꾸고, 다시 한번 남송에 대한 공격을 개시한다. 그러나 산성일체의 방어체계앞에서 몽골군의 공격은 성공을 거두지 못하고 돌아온다.
1276년, 남송의 수도 임안(臨安)이 함락되고, 남송왕실은 남해로 도망친다. 1278년, 중경도 몽골군에 함락된다. 이때 천하는 이미 원나라에 귀속된다. 조어성은 고립무원이 된다. 기록에 따르면, "성안의 백성은 모두 당황하여 어쩔 줄 몰랐다. 누란의 위기에 화가 경각에 달렸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모두 힘을 합쳤고 다른 생각을 품지는 않았다." 다만 연속하여 2년간의 가뭄으로 조어성과 주변의 전답에서 수확을 거의 거두지 못한다. 게다가 계속 전쟁을 벌이다보니 양식이 떨어졌다. 이미 인상식(人相食)의 정경이 펼쳐지게 된다.
이런 상황하에서, 수비장수 왕립(王立)은 성문을 열고 투항하는 대신 쿠빌라이에게 성을 도살하지 않는다는 조건을 얻어내고, 1279년 정월에 성문을 열고 투항한다. 2개월후, 육수부(陸秀夫)는 애산(崖山)에서 송나라 마지막 황제를 등에 업고 바다에 뛰어들어 자결함으로써, 남송왕조는 멸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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