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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송)

<이십사사(二十四史>에 왜 <서하사(西夏史)>는 없을까?

by 중은우시 2018. 12. 4.

글: 서소봉(舒小峰)





서하왕릉을 갔을 때는 이미 초가을의 황혼녘이었다. 여행객들은 점점 떠나고, 능원은 조용했다. 서하왕릉은 필자가 영하(寧夏)여행의 주요목적지중 하나였다. 서하의 개국황제 이원호(李元昊)의 묘 앞에서, 천년전의 그 신비왕조가 이때 나와 지척거리에 있어서 손만 뻗으면 닿을 수 있는데, 서허는 필자에게 그렇게도 멀고 그렇게도 요원하다.


서하는 매(鷹)처럼 굴기했다가 매처럼 사라졌다.


궐문(闕門), 향전(享殿), 원장(園墻)은 모두 항토기지(夯土基址)만 남아 있다. 묘는 그저 한덩어리의 황토이고, 부서진 기와조각을 제외하고 우리가 시골에서 볼 수 있는 보통백성의 묘와 비교했을 때 그저 조금 더 높을 뿐이었다. 그 뿐이다.


서하왕조는 일찌감치 우리를 떠났고 ,많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 그저 중학교 역사교과서의 그 개념만 남아 있다: 1038년, 이원혹 칭제하고, 서하를 건립했다.


이원호의 묘 앞에서 나의 머리 속에는 한 무더기의 의문이 일어난다. 당항족(黨項族)은 어디에서 왔을까? 서하는 왜 멸망했을까? 몽골철기가 서하왕조를 짓밟으 후, 당항족은 거의 순식간에 증발했고, 역사에서 소실되었다. 이것은 무엇때문인가?


이원호의 묘 앞에서 나는 "흥기도 순식간이고, 멸망도 순식간이다(其興也勃焉, 其亡也忽焉)"라는 말을 생각했다. 요나라를 건립한 거란족, 금나라를 건립한 여진족, 청나라를 건립한 만주족, 심지어 흉노족은 우리가 어디로 갔는지 알고 있다. 다만, 서하와 당항족은 너무나 신속하게 소멸했고, 철저하게 소멸했다. 이는 중국역사는 물론이고, 세계역사상으로도 극히 보기 드문 경우이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은 이렇게 서하를 형용한다: "그것은 매처럼 일어났다가 매처럼 사라졌다."


기실, 서하의 역사는 그리 짧지 않다. 서하왕조의 기반을 닦은 이계천(李繼遷)이 982년 송나라에 반란을 일으킨 때로부터 시작하여 1227년 서하가 멸망할 때까지 계산하면 246년간 존속했다. 요나라의 210년(916-1125)보다 36년이나 길고, 금나라(1115-1234)보다는 126년이나 길다. 척발사공(拓拔思恭)이 건립한 하주정권(夏州政權)부터 계산하면 347년에 이른다(881-1227). 이는 북송(960-1127)과 남송(1127-1279)를 합친 320년보다도 27년이 더 길다. 설사 이원호가 칭제한 1038년부터 계산하더라도 1227년 몽골에 멸망할 때까지 근 200년간 존속했다. 다만 이 송, 요, 금의 역사보다 긴 왕조에 대하여 중국역사왕조에서 편찬한 24사중에는 왜 <송사>도 있고, <요사>도 있고 <금사>도 있는데, 유독 <서하사>만 없단 말인가?


지금까지, 국내외 학자들의 공동노력으로, 서하사연구는 성과가 상당히 있다. 다만, 서하왕조의 역사는 여전히 신비한 면사로 덮여 있다.


사서의 기록에 따르면, 서하가 가장 강성했을 때, "동으로 황하까지, 서로는 옥문까지, 남으로는 소관에 접하고, 북으로는 대막을 장악했다." 강역은 지금의 영하, 감숙서북부, 청해동북부, 내몽고 및 섬서북부지역을 포함한다. 당시의 서하의 동쪽 경계는 황하이고, 섬서와 연결된다. 서로는 옥문관에 이르고, 남으로는 소관 즉 오늘날 영하의 최남단인 고원시(固原市)에 이른다. 북으로는 음산산맥의 최서단인 낭산(狼山)에 이른다. 즉 지금의 내몽고자치구 서북부이다. '방(方)2만여리"의 국토이다. 역사상, 서하는 먼저 동북쪽으로 요나라와 접경했고, 동남쪽으로 송나라와 접경했다. 그렇게 삼족정립(三足鼎立)의 세를 이룬다. 나중에 금나라가 요와 북송을 멸한 후, 서하는 이어서 계속 금, 남송과 정족지세를 이룬다.


어떤 사람의 통계에 따르면, 서하는 입국에서부터 멸망때까지 근 200년간, 몇몇 이웃나라인 송, 료, 금, 몽골과 여러번 전쟁을 벌였다. 1038년에서 1227년까지 190년간 서하-송간에 일어난 중대한 전투는 15차례이다; 1210-1223년의 13년간, 서하-금 사이에 크고 작은 전쟁이 25차례 벌어졌다; 몽골-서하전쟁은 1205-1227까지 모두 8번의 중요한 전투가 발발한다. 그외에 요나라와는 2번의 비교적 큰 규모의 전쟁을 벌였다. 어떤 사람은 서하통치자는 군사적으로 궁병독무(窮兵黷武)하고, 외교적으로 조진모초(朝秦暮楚)한 것이 패망원인이라고 한다. 다만 역사를 객관적으로 보면, 무력으로 지반을 확충하고, 이익은 전쟁과 외교의 기본이다. 기실 서하는 사방에 강적으로 둘러싸여 있어서 이런 상황하에서 무력과 외교는 입국의 기본정책이다.


전해지는 바로는 고대 외국의 한 국왕이 그의 신하에게 본국의 역사를 기록하게 했다. 대신들이 자신감을 가지고 수년의 심혈을 들여 두터운 역사서를 지어서 국왕에게 바쳤다. 그러자 국왕은 대노한다: '내가 이렇게 두꺼운 책을 볼 시간이 어디 있단 말인가?" 그후 국왕은 같은 이율 이들 사신을 처형했다. 마지막으로 한 대신이 이 국왕에게 말한다: '경애하는 국왕전하. 우리 국가의 역사는 한 마디로 개괄할 수 있습니다. 전쟁, 전쟁, 그리고 전쟁."


우리는 역사를 연구하거나 사서를 읽을 때, 왕왕 전쟁연대를 중점으로 본다. 조용했던 평화시기에 대하여는 관심을 적게 가진다. 이원호가 1038년 칭제한 후 1227년 멸망할 때까지 서하의 역사에 관하여 사람들은 그저 서하-송, 서하-금과 서하-몽골간의 전쟁만 본다. 기실, 서하의 숭종(崇宗) 이건순(李乾順)이 1187년 즉위한 후로 인종(仁宗) 이인효(李仁孝)가 1193년 사망할 때까지 100여년간 계속하여 금, 송과 대체로 평화를 유지한다. 이 백년의 시간동안, 서하는 비록 적지 않은 내우외환을 겪었지만, 전체적으로 평화로워 보기드문 발전을 이룬다. 정치, 경제, 문화, 교육과 사회등 각분야에서 모두 큰 발전을 이룬다. 이 시기를 후세역사연구가들은 서하의 '전성기'라고 부른다.


서하가 통치한 지역은 기본적으로 오늘날 하서주랑과 황하 하투(河套)일대이다. "그 땅은 오곡이 풍성하고, 특히 쌀과 보리를 심기에 적합했다." 서하의 경내에는 산이 둘러싸고 있어서, 북으로는 음산과 낭산, 서로는 하란산, 서남으로는 기련산, 동남으로는 육반산이 있다. 황하는 서남에서 서북으로 그 가운데를 관통하고, 수도인 흥경부(興京府, 지금의 은천시)는 더더욱 의산대하(依山帶河)로 형세가 견고하다. 흥주(지금의 은천시), 영주(靈州, 지금의 영하 영무현 서남) 일대는 수리가 발달하여, '흥주,영중는 고거(古渠)가 있는데, 당래(唐來), 한원(漢源)이라 했다. 모두 황하를 끌어들여 관개한 것이다. 매년 가뭄이나 훙수의 우려가 없었다." 농업이 발달하여, 일찌기 '새상강남(塞上江南)'이라는 별칭을 얻었다. 기련산은 천연목장이다. 감주(감숙성 장액시 북쪽), 양주(감숙성 무위시)일대는 수리가 발달했다. "여러 강으로 관개되어 있다" 물과 풀이 아픔다워서 서하의 양식창고이자 좋은 말이 나는 산지였다. 특히 양주는 경제적으로 아주 중요했다. 고조우는 <독사방여기요>에서 이렇게 말했다: "서하가 양주를 얻어서 물력으로 관중을 침범할 수 있게 되고, 송나라에 큰 우환이 되었다." 농사도 지을 수 있고, 유목도 할 수 있는 지리환경과 경제적으로 자급자족이 이루어져서, 서하의 발전과 확장에 강대한 경제적 기반이 되었다.


다만, 역사는 증명한다. 서하는 송,요,금과 교류하면서, 잔혹한 전쟁이든, 평화교류이든, 모두 서하 자신의 발전상 곤경을 해결할 수 없었다. 서하왕조는 최종적으로 몽골군대의 무자비한 쇠발굽아래 멸망한다. 그 원인을 분석해보면, 역대학자들은 의견이 서로 다르긴 하다. 어떤 사람은 서하왕조 내부의 권려구쟁이 정력을 집중시켜 단결하여 대외적으로 맞싸울 수 없게 만들었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궁병독무로 사람과 말이 모두 지쳤고, 경제가 피폐해져서라고 한다; 또 어떤 사람은 그들이 조진모초의 외교정책으로 결국 멸망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리고 또 어떤 사람은 '당랑포선, 황작재후(螳螂捕蟬, 黃雀在後)"로 몽골이 초원에서 굴기하여, 당시 삼족정립의 할거국면을 타파하고 결국 하, 금과 남송을 멸망시키고 천하통일을 실현한 것이라고 한다.


상술한 몇 가지 분석은 모두 이치에 맞는 말이다. 다만, 만일 우리가 서한왕조를 더욱 큰 시공에 놓고 본다면, 아마도 또 다른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서하는 유라시아대륙의 중외교류의 통로에 있었다. 매번 중원의 통일시기가 오면, 예를 들어 한, 당, 이곳은 중원에서 서역으로 통하는 중요길목이다. 중앙정권의 통제략이 약화되거나 군벌혼전의 시기가 되면 이 곳은 지방할거의 국면이 나타난다. 당말오대때 그리고 북송초기에 서하의 출현은 의외의 일도 아니다. 서하왕조는 이 지역의 일부를 통일했고, 서북지구의 경제발전과 문화교륙의 창성을 이룬다. 서북지역의 개발에도 공헌한다. 또한 서북변방과 내지의 경제문화교류에도 공헌했다.


그러나, 지리환경으로 보면, 비록 '천하황하부은천(天下黃河富銀川)'이지만 주위환경은 삼으로 둘러싸여 있고, 사막이 종횡하고 있어, 서하왕국의 인구가 어느 정도 번성한 이후에는 농업발전의 공간이 유한하고, 심지어 목축업을 발전시킬 공간도 제한받았다. 이로 인하여 경제적으로 송과 금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다. 이런 경제적의 의존성은 반드시 외교적인 의존성을 불러왔다. 어떤 연구자는 심각하게 지적한다. 서하는 송, 금에 대한 태도가 반복무상했는데, "이는 외교적인 신축성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그런 신축성의 배훙는 경제적인 심각한 원인이 도사리고 있었다."


주의할 것은, 중국역사상 하,상,주, 진,한은 모두 관중에서 흥기했다. 그러나 수,당이래 정치중심은 동으로 이전하고, 경제중심은 남으로 이전했다. 이런 추세는 막을 수가 없었다. 중원에 심각한 위협을 주는 소수민족도 이미 서북에서 정북 혹은 동북방향으로 이전되었다. 그래서 비록 서하는 북송, 금과 여러번 전쟁을 벌이지만, 그리고 호빙천(好氷川)전투같은 중대한 승리를 거두기도 했지만, 시종 중원으로 통하는 문호를 확보하지 못했다. 그리하여 중원지구에 경제를 의존하는 피동적인 국면을 전환시키지 못했다. 더더구나 요, 금처럼 중원정권을 칭신납공하도록 하거나 개조환대하도록 할 힘은 없었다. 이런 배경하에서, 농사도 짓고 목축도 하는 서하는 중원으로 동진할 수도 없고, 서쪽으로 하서주랑을 통해 중앙아시아로 진격할 수도 없었다. 그저 산남, 하투 일대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결국 멸망을 맞이한 것이다. 이것이 숙명일까? 배후에 더욱 깊은 원인은 무엇일까?


석양이 지고, 이원호묘를 찍는 가장 멋진 각도는 서북방향이 되었다. 나는 묘의 측후방으로 갔다. 석양을 맞으며 이원호묘는 금황색이 찬란하게 빛난다. 나는 셔터를 눌렀다. 이원호묘와 잔존한 벽이 모두 카메라에 들어온다. 앞부분은 오늘날의 사람들이 이원호묘로 걸어가는 좁은 길이다. 이 각도에서 우리는 이원호를 이해할 수 있을까? 이 각도에서 우리는 서하를 이해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