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노후(老猴)
전국옥새에 관한 문제에 관하여 필자는 채동번(蔡東藩)의 <중국역사통속연의>를 읽는 과정에서 여러차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일찌기 한(漢)나라부터 오대십국(五代十國)까지 전국옥새의 전승과정을 쓴 바 있다. 거기에서 석경당이 낙양을 공격하면서 후당의 마지막황제 이종가(李從珂)는 전국옥새를 품에 안고 현무루(玄武樓)에 올라가 스스로 불에 타 죽었는데, 전국옥새는 그후로 행방불명이 된다. 동시에 필자는 <신오대사>의 '소제기(少帝記)' 오(五)를 인용하여 후진출제(後晋出帝) 이중귀(李重貴)의 전국옥새 실전에 관한 자술이 이를 증명한다고 인용한 바 있다.
전국옥새는 황위정통, 합법의 증빙이다. 기원전238년 전시황이 즉위한 때로부터, 청태3년(936년) 후당이 멸망하며 전국옥새의 행방이 불명해질 때까지, 그것은 근 1200년간을 전승되어 내려왔다.
송나라
그런데, 자칭 정사를 근거로 하였다는 <송사연의(宋史演義)>에서는 이렇게 쓰고 있다: "진나라제도에 천자는 육새(六璽)가 있다. 또한 전국새(傳國璽)가 있어 역대가 이를 따랐다.당나라때는 보(寶)로 고치고, 제도로 8개로 한다. 오대때 혼란스러워지면서 여러 개를 잃어버린다. 후주 광순때 2보를 만든다. 그중 하나는 "황제승천수명지보(皇帝承天受命之寶)"라 새기고, 다른 하나는 "황제신보(皇帝神寶)"라 새겼다. 그후 여러 황제들이 모두 일보씩을 만들어 "황제공응천명지보(皇帝恭膺天命之寶)"라는 글을 넣었다. 이 기록에 따르면, 전국옥새는 진나라 육새중 하나로 역대에 전해졌다. 그러나 오대의 후당때 옥새는 이미 사라진다. 후주부터 송나라의 여러 황제가 사용한 새(璽)는 모두 진나라의 전국새가 아니다. 별도로 만든 황제어보이다.
예를 들어, 송나라가 망하기 전날 원군이 임안부를 함락시킬 때, 송공종 조현(趙㬎)의 태황태후 사씨(謝氏)는 감찰어사 양응규(楊應奎)를 내보내 원군에 항복할 때 바친 '전국새인'은 송태조, 송태종이 스스로 제작한 소위 '전국새'이다.
에서 조정을 돌아와 즉위한다. 상도로 가면서, 우승상 장구사(張九思)등이 병사를 끌고나와 영접한다. 그리고 전국새 1매를 바친다. 전햊는 바로는 전국새는 쿠빌라이가 사용한 어보가 아니라, 역대황제에게 전해져 내려오던 진나라의 옥새라고 한다.
원태조 테무진이 원나라를 건립한 후, 지원31년(1294년), 원나라 제5대황제 원세조 쿠빌라이가 자단전(紫檀殿)에서 붕어하고, 황태손 철목이(鐵木耳)와 태부 백안(伯顔)이 상도를 진수하며, 북방 몽골제왕의 반란을 방어한다. 철목이는 부고를 듣고, 즉시 화림(和林, 지금의 몽골 소북화림뎍이현)에서 조정을 돌아와 즉위한다. 상도로 가면서, 우승상 장구사(張九思)등이 병사를 끌고나와 영접한다. 그리고 전국새 1매를 바친다. 전햊는 바로는 전국새는 쿠빌라이가 사용한 어보가 아니라, 역대황제에게 전해져 내려오던 진나라의 옥새라고 한다.
장구사는 이 옥새의 내력을 얘기한다: 먼저 송, 원 교체기의 난세때, 원나라대장군 무카리(木華黎)의 증손인 석적(碩迪)이 얻었는데, 그가 죽고 가난해지자, 처는 옥새를 시장에서 팔았다. 중승 최욱(崔彧)이 이것을 매입한다. 최욱은 비서감승 양환(楊桓)을 불러, 인문을 확인하니, "수명어천(受命於天), 기수영창(旣壽永昌)"이라는 8글자가 전서로 새겨져 있었다. 최욱은 놀라서 말하기를 "이것이 설마 전국옥새란 말인가!" 최욱은 이 소위 진나라 전국옥새를 철목이의 모친인 태비 홍지라(弘吉剌)씨에게 바친다. 태비는 이 옥새를 얻고서 여러 신하들에게 보여준다. 승상이하 모두가 경하한다는 뜻을 나타낸다. 모두 말하기를 원세조 쿠빌라이가 사망한 후, 이 옥새가 나타났으니 이는 하늘에 눈이 있는 것이고, 황태손 철목이에게 내린 것이니 이는 더할 나위없이 기쁜 일이라고 말한다. 태비는 우승 장구사를 파견하여, 친히 금군 수백명을 이끌고 옥새를 받들고 영접할 때 바치도록 한다. 철목이는 옥새를 받은 후, 기쁜 기색을 나타내며, 수고했다는 말을 아끼지 않았다.
작자 채동번은 장구사가 바친 옥새의 진위에 대하여 전문적으로 논증한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진나라 전국옥새는 일찌감치 노(爐)에 들어가 재가 되었다(후당 말제 이종가가 옥새를 안고 자분(自焚)한 것을 가리킴). 그런데 어찌 다시 나타난단 말인가. 하물며 무카리는 원나라때의 신하인데 전국옥새를 얻었다면, 어찌 이를 감추고 바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장구사가 바친 전국옥새는 분명히 위조품이다. 이를 통해 아부한 것일 뿐이다.
원나라때, 유사하게 옥새를 바치면서 황제를 영접하는 일은 여러번 있었다. 예를 들어, 애육려발력팔달이 사신을 보내 화림에서 회녕왕 보르지진왕해산 즉 무종황제를 맞을 때도 어보를 바친다. 철실등이 원영종을 보르지진 석덕팔랄을 시해하고, 안제불화와 야선철목아를 우두머리로 하여 옥새를 들고 북으로 진왕 보르지진 야손철아 즉 태정제에게 어보를 바친다. 진왕부사 도랄사가 원나라에 투항한 후 원나라 제왕 월로첩목아가 바친 어보도 있다. 모두 전국옥새는 아니다. 계속 와전된 자체제작 어보이다.
명나라
<명사>지44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명나라 홍무원년 보새(寶璽)를 제작하고자 한다. 가호부해가 아름다운 옥을 바치며 말하기를, "이것은 우전에서 난 것입니다. 조부때부터 전해져 내려오는데 재왕의 옥새가 될 만합니다. 그리하여 어보로 만들도록 명한다..." 이를 보면 명태조 주원장이 즉위하 ㄴ초기에 자체적으로 옥새를 제작하려 했고, 누군가 이에 영합하여, 그에게 아름다운 옥을 바쳤다. 그러면서 이 옥은 선대로부터 전해져 내려온 것이라고 말한다. 명태조는 사람에게 명하여 그 옥으로 옥새를 만들게 한다.
<명사연의> 에서는 여러번 전국옥새 이야기가 나온다. 지정29년(1370년) 원순제 보르지진 타환첩목이가 이질을 앓아 응창(지금의 내몽고 적봉시 극십극등기)에서 죽자, 명군의 강력한 공세하에, 사주(嗣主) 애유식리달랄질은 계속 패퇴한다. 명나라장수 이문충(李文忠)이 성으로 들어가, '송원옥새(宋元玉璽), 금보옥책, 진규,대규, 옥부등의 물건를 찾아내서 얻고 낙타, 말, 소, 양을 무수히 얻는다.' 이상에서 기술한 것은 송,원의 옥새는 모두 자체제작한 어보라는 것이다. 대대로 전해져 내려온 진나라의 전국옥새는 아니라는 것이다.
명효종 주우탱(朱友樘)때, 누군가 '전국옥새'를 바쳤다. 그러나 명효종은 자신이 본 '전국옥새'가 가짜라고 선언하고, 채용하지 않는다. 이는 <명사>지제44에도 명확히 기록하고 있다:
홍치13년(1500년) 호현(鄠縣)의 백성인 모지학(毛志學)이 니하빈에서 옥새를 얻었다. 그 글은 "수명어천, 기수영창"이다. 색이 하얗고 약간 푸른 기가 있으며, 이뉴(螭를 조각한 손잡이)가 있다. 섬서순무 웅충(熊翀)은 진나라 전국옥새가 다시 나온 것이라 여기고, 사람을 보내 바친다. 예부상서 부한(傅瀚)은 이렇게 말한다: 진나라 전국옥새 이래로, 역대에 얻고 잃은 것의 진위에 관한 내용이 역사기록으로 남아 있습니다. 지금 바친 옥새는 전문(篆文)이 <철경록>등 책에서 임모한 어조전문(魚鳥篆文)과 서로 다릅니다. 그리고 이뉴도 역사에 기록된 문반오룡, 이결일각(螭缺一角)과 다르다. 옆에 새긴 위록자도 맞지 않는다. 진나라 전국옥새는 잃어버린지 오래 되었고, 지금 바쳐서 송,원이 얻은 것은 모두 후세에 모방해서 만든 옥새이다." "진시황이 남전옥으로 옥새를 만든 이래, 한나라이후 전하면서 사용해왔다. 이때부터 교묘하게 다투며 힘을 써서 얻으려 했다. 이것을 얻으면 하늘의 명을 받은 것이라 여겨서 서로 얻으려 했다. 그래서 위조하여 사람을 속이게 된 것이다. 이를 얻으면 군신이 모두 기뻐하고 천하에 과시하려 했다. 모두 후세에 웃음거리가 된다." "우리 고황제는 스스로 일대의 옥새를 만들었으며, 글에는 각각 의미가 있고, 일이 있을 때 사용하니 실로 일대의 천명을 받은 옥새라 할 만하다. 이를 만세에 전할 수 있다." 명효종은 그의 말을 듣고 바친 옥새를 쓰지 않았다. 이 기록을 보면 알 수 있다. 옥새는 니하빈에서 나왔으니 실로 기이하다. 그리고, '수명어천, 기수영창'이라는 옥새의 글도 전국옥새의 글이다. 936년부터 실전된지가 이미 560년이 되었는데, 역대에 모두 기록이 있다. 어찌 웅충이 바친 것이 새로 나타난 전국옥새이겠는가? 부한은 한번 보자 정곡을 찔러서 진위를 판가름한다. 진나라옥새는 없어진지 오래 되었고, 웅충이 바친 옥새는 후세에 모방한 것이다. 명효종도 그의 말을 따르고 쓰지 않았다.
청나라
청나라때 다시 한번 전국옥새가 나타나서 바쳐지는 일이 벌어진다.
<청사고.태종본기2>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천총9년(1635년( 팔월 경신, 패륵 도르곤, 웨퉈,사하롄, 하오거가 전국옥새를 얻었다고 하였다. 먼저 원순제가 북으로 도망칠 때 가져갔다가 나중에 잃어버렸다. 200여년후에 양치기가 얻었다. 나중에 차하르 린단칸에게 들어간다. 린단칸도 원나라의 후예이다. 옥새는 소태태비(蘇泰太妃)가 가지고 있다. 이제 바친다. 그때 웨퉈는 병이 나서 귀화성에 남고, 도르곤등은 병력을 이끌고 명나라의 산서성을 약탈한다. 평로위로 들어가서, 장성을 무너뜨리고 흔주(忻州), 대주(代州)를 공략하고, 곽현(崞縣)에 이른다. 구월계축, 패륵 도르곤등의 군대를 이끌고 귀환하여, 옥새를 바치고, 하늘에 고한다."
이번 전국옥새를 얻은 내력에 관한 상세한 기록은 <명사연의> 제6회에 기술되어 있다: 몽골 차하르부의 두목 린단칸의 아들 에제(額哲)가 귀화성에서 청태종 홍타이시에게 항복할 때, 무가지보 하나를 바치는데, 바로 원나라때 역대황제가 쓰는 전국옥새라는 것이다.만주의 청태종은 옥새를 얻은 후, 향을 피우며 하늘에 고했고, 득믜양양하며 크게 축하한다. 그리고 청태종은 관온인성황제에 오르고, 국호를 대청으로 바꾼다.
원, 명때의 옥새는 진나라때의 전국옥새가 아니다. 그러므로 에제가 청태종에게 바친 보물도 자연히 진나라때부터 전승되어 내려오는 전국옥새는 아니다. 작자 채동번이 얘기한대로, 청태종이 얻은 옥새는 논자들이 천명을 받은 것이라고 하므로, 그래서 에제의 손을 빌어 바치게 한 것이다. 그러나, 이 옥새를 얻든 얻지 못하든, 왕조교체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예를 들어, 손견, 원술도 일찌기 한나라의 전국옥새를 얻은 바 있지만, 그들 둘이 정말 나중에 황제에 올랐는가? 청태종이 에제가 바친 옥새를 얻은 후 국호를 '대청'으로 바꾸었는데, 기실 이는 옥새를 얻은 것을 기회로 삼아서 자신이 성공을 자랑한 것이고, 자신의 뜻을 밝힌 것일 뿐이다.
결론적으로, 후당 이종가의 자분한 이후 송, 원, 명, 청에서는 모두 진짜 전국옥새를 찾지 못했다. 그러므로, 송나라때 감찰어사 양응규가 바친 옥새이건, 원나라 우승상 장구사가 철목이에게 바친 옥새이건, 명나라때 현민 모지학이 바친 옥새이건, 청나라때 에제가 청태종에게 바친 옥새이건 모두 옥새를 바쳐서 공을 드러내려는 것이고, 황제의 뜻에 영합하려는 것이다. 그렇게 하여 가짜 전국옥새가 계속 나타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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