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민국 후기)

공령의(孔令儀): 명문집안의 마지막 귀족

중은우시 2018. 12. 1. 18:04

글: 지구지려(地球之旅)


공령의는 공상희(孔祥熙) 가족의 마지막 남은 제2대 인물이다. 뉴욕에 60년이상을 한 공령의 여사는 2008년 뉴욕 맨해턴 센트럴파크 부금의 고급자택에서 향년93세로 병사한다. 그녀는 공상희의 장녀이며, 손문의 부인인 손경령과 장개석의 부인인 송미령의 외조카이다. 그녀의 모친 송애령은 '송씨삼자매'의 맏언니이다.


공상희와 송애령은 2남2녀를 둔다, 차례로 공령의, 공령간(孔令侃), 공령위(孔令偉, 즉 孔二小姐), 공령걸(孔令傑). 4명은 이제 모두 작고했다. 송미령과 큰언니 송애령은 아주 친밀했고, 4명의 공씨집안 자녀들을 송미령은 자신의 자식처럼 아낀다. 1970년대중반에 송미령은 뉴욕으로 이사하는데, 공씨자녀들이 계속하여 이모의 생활을 책임졌다. 공령의와 남편 황웅성(黃雄盛)이 가장 많이 보살펴주었고, 공령의는 압박을 많이 받아 머리카락이 거의 빠질 지경이었다. 송미령은 2003년 10월 23일 향년106세의 나이로 사망한다.


공씨집안의 4명 자녀중공령의는 사람됨과 일처리가 조용했다. 공개활동에 나서는 경우가 아주 적었다. 다른 동생들과는 전혀 달랐다. 공령간, 공령위와 공령걸은 '돈과 권력'에 심취하여, 장개석의 부인 송미령의 비호하에 안중무인으로 하고싶은대로 하며 무수한 말썽을 일으켰다. 그리하여 국내외인사들로부터 백안시 당한다. 1943년, 송미령이 미국을 수개월간 방문하는데, 족적은 미국과 카나다의 여러 곳을 다녔다. 공령간과 장포를 입은 공이소저가 곁을 따라다녔고, 미국의 조야에서도 좋지 않게 보았다. 그후 공령간과 공이소저는 여러번 대만 정치에 관여했고, 장경국은 화가 났지만, 송미령의 체면을 봐서, 그저 혼자서 탄식하며 참았다.


공령의는 1915년 9월 19일 산서 태곡(太谷)에서 태어난다. 일찌기 상해호강대학에서 공부했고, 나중에 남경금릉여자문리학원(속칭 금릉여대)를 졸업한다. 그러나 공령의가 상해지강대학을 졸업했다는 설도 있다. 공령의는 이렇게 말했다. "일찌기 남경에 있을 때, 나는 금릉여대부중에서 공부했다. 일찌기 노총통(장개석), 부인관저에서 약 5년간 살았다. 그때 장경국, 장위국은 아직 그들의 곁에 없었다. '노총통'은 나의 이름을 부르지 않고 아보보(我寶寶), 보보(寶寶)라고 불렀다. 자주 나를 데리고 길거리를 산책했고, 나를 자신의 자녀처럼 대했다."


공령의의 혼인은 순조롭지 못했다. 송미령은 그녀를 위해 대상을 찾아주었다. 위립황(衛立煌)장군이 상처한 후, 누군가 그녀를 그에게 시집보내려 했다. 공령의는 나중에 동생인 공령간의 상해성요한대학 친구인 진계은(陳繼恩)을 마음에 둔다. 그러나 진계은의 부친이 상해의 한 댄스홀 악단의 지휘자여서, 공상희 부부는 집안이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여 혼사에 반대한다. 공령의는 자신의 결정을 고집하고, 진계은과 함께 미국유학을 떠나기로 약속한다. 부모는 그저 묵인하는 수밖에 없었다. 공상희는 진계은에게 '중앙은행업무국 부국장'이라는 명의를 주어 출국하게 해주고, 두 사람은 뉴욕에서 결혼한다.


여러해 후, 공령의는 다시 홀몸이 된다. 1960년대초에 그녀는 대만으로 가서 장개석과 송미령을 만난다. 이모부와 이모는 공군대령인 무관 황웅성을 그의 보디가드로 붙여준다. 그녀를 데리고 대만을 여행하게 한 것이다. 아침저녁으로 같이 있다보니, 두 사람은 서로 호감을 가지게 된다. 그러나 황웅성에게는 이미 처자식이 있었다. 공령의는 돈을 들여 황웅성을 이혼시킨다. 1958년 황대령은 미국대사관의 무관으로 파견나간다. 1962년 워싱턴에서 공령의와 황웅성은 결혼식을 거행한다. 황웅성은 대만으로 돌아가 공군사관학교 교육장을 맡다가 소장의 계급으로 퇴역한다. 다만 공령의와 친구들은 계속하여 그를 Colonel(대령)이라고 불렀다. 황웅성의 조적은 강소 숭명도이고, 청화대학 항공공정과(1938)를 졸업했으며, 항공학교 13기이다. 2003년 8월 2일에 뉴욕에서 병사한다. 향년 89세이다. 그가 사망했을 때, 뉴욕의 모 중문신문에서는 "공령의가 뉴욕에서 사망했다"는 오보를 내기도 했다.


1990년대, 공씨집안의 세 자녀가 차례로 사망한다. 공령간은 폐암으로 1992년에 향년 75세의 나이로 사망하고, 공이소저는 직장암으로 1994년에 향년 75세의 나이로 사망하며, 공령걸도 역시 암으로 1996년 향년75세의 나이로 사망한다. 공령의는 공씨집안의 제2대중 유일하게 남은 인물이 되고(그녀는 자식을 낳은 적이 없음), 송미령이 가장 친밀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된다. 롱아일랜드 Locust Valley의 공씨저택을 매각할 때, 뉴욕의 부동산업자는 송미령의 명의를 이용하여 공씨저택의 물품과 가구를 경매한다. 그리하여 당시 80여세의 공령의는 역사문물(공씨족보, 전국부수석 임삼의 화상, 송미령의 그림등)을 마음대로 처분한다는 엄중한 질책을 받는다. 신문기자 육갱(陸鏗)은 이렇게 비난했다: "소위 공송호문(孔宋豪門)이 가산을 처리하는 것은 뭐라고 할 것이 없다. 그러나 역사적인 의미를 지닌 물건은 최소한 존중해야 한다....설사 패가자제(敗家子弟)라도 최소한 지켜야할 것은 있다. 이것은 말도 되지 않는다." 1947년 여름, 육갱은 남경의 <중앙일보> 부총편집 겸 인터뷰주임의 신분으로 공송가족이 부중(孚中)과 양자(揚子)공사를 통하여 부정부패한 것을 폭로하여 전국을 떠들썩하게 한 바 있다. 육갱은 2008년 6월 22일 89세의 고령으로 샌프란시스코에서 사망했다.


1998년 12월 13일, 조용하던 Locust Valley에 돌연 수천수만의 중국계 사람들이 나타난다. 그들은 송미령이 살았던 저택과 경매품을 고려고 온 것이다. 계속 이어지는 차량행렬과 인산인해의 사람으로 Locust Valley의 부자주민들은 깜짝 놀라게 된다. 중국계 사람들은 규칙을 지키지 않고, 아무데나 차를 주차하여 그들은 화가 머리끝까지 난다. 속속 카운티정부와 경찰에 고발을 하고, 경찰은 중국계 사람으로 하여금 중국어로 된 경고판을 써달라고 하여 세워둔다: "동포들이여, 길이 이미 폐쇄되었으니, 돌아가십시오!"


호기심많은 중국계들이 Locust Valley로 몰려들 때, 공령의는 중문매체에 아무 것도 아니라는 듯이 이렇게 말한다: "나는 그 곳에 아무런 감정이 없다. 여러분은 왜 거기에 감정을 느끼는가?" 그리고 또 말한다. "우리의 물건은 이미 전부 가져갔다. 나은 것은 모두 아무런 가치도 없는 버리는 물건들이다." 그러나, 공령의는 이전에 다른 중문매체에 이렇게 말한 바 있다: "나의 모친이 옛날에 미국으로 먼저 왔을 때 Locust Valley의 집을 샀다. 그 후 부모는 이곳에서 2,30년을 살았다. 동생 령간,령걸과 여동생 령위도 이곳에 상주했다. 장부인(송미령)고 과거 이십년동안 뉴욕으로 오면 이곳을 집으로 삼았다. 이곳에는 우리의 많은 추억이 있다."


공령의는 말년에 공송가족의 대변인이 된다. 그리고 공씨집안의 수많은 재산을 처리해야 했다. 매년 3월에는 백세를 넘긴 이모 송미령의 생일파티를 열었다. 공씨집안의 재산은 엄청났다. 송씨집안보다 많았다. 많은 부동산, 주식과 골동품을 가지고 있었다. 1997년 연말, 공씨집안은 플로리다의 일부 부동산을 매각해서 얻은 2천여만달러를 학교와 병원에 기부한다; 1998년 Locust Valley의 부동산을 팔아서 300만달러가량을 받는다; 1999년 연초에는 다시 플로리다주 디즈니월드 부근의 400여무 토지를 매각하였는데 가격이 수천만달러이다; 2007년 1월 타이페이 '국세국'에서는 12년전에 사망한 공령위(공이소저)가 2억8천만NT달러의 자산을 가지고 있으며, 사망전에 5회에 걸쳐 1억2천만NT달러를 송금한 것을 발견한다. '국세국'은 공령위가 자산을 은닉하고 탈세한 혐의가 있다고 보고, 공령위의 유산승계인인 공령의에게 추징세금과 벌금으로 1억5700만NT달러를 부과한다. 공령의는 불곡하여, 제소한다. 변호사는 진장문(陳長文)이다. 다만, 최고행정법원에서 패소당한다.


공송가족의 부가 엄청나므로, 하버드대학의 수학가, 중앙연구원 원사 구성동(丘成桐)은 일찌기 1997년에 '중앙연구원' 원장 이원철(李遠哲)에게 미국 국가과학원 원장과 함께 장부인(송미령)을 찾아가서 송미령에게 기부금으로 중미과학교류기금회를 서립할 것을 건의하여, 중국학자들이 과학연구를 하는데 도움이 되도록 하려 했다. 그러나 최종적으로 실행되지는 못한다.


공령의는 뉴욕에서 60여년간 살았고, 계속하여 부유한 노상해인의 생활습관을 유지한다. 먹는 것과 입는 것을 중시한다. 집안에는 적지 않은 아주 진귀한 골동품이 있고, 매일 오후에는 상해식 오차(午茶)를 마시며, 상해 딤섬을 먹었다. 매년 좋은 재료를 구해서 홍콩에서 치파오를 만들게 했으며, 눈이 좋지 않아서 항상 짙은 색의 안경을 썼다. 어떤 때는 뉴욕국민당원로의 미망인(예를 들어 지금은 이미 100여살이 된 고유균(顧維鈞)의 부인 엄유운(嚴幼韻)등) 및 후손들과 같이 마작을 했다. 그러나 말년의 생활중심은 장부인(송미령)을 돌보는 것이었다.


현재 중국계 사회에서 가장 주목하는 것은 공령의의 방대한 재산과 많은 골동품들을 어떻게 처리하느냐이다. 앞으로 누구의 손에 들어갈까? 공씨 제2대의 막내인 공영걸만 후손이 있다. 그와 헐리우드 삼류 섹스배우 Debra Paget과의 사이에 태어난 아들 공덕기(孔德麒, Gregory Kung)가 그이다. 그러나 공씨집안은 스탠포드대학 후버자료관에 많은 문건을 기부했다. 그러나 수량이 너무 많고, 훼손이 심각하여, 언제 개방할 수 있을지는 알 수가 없다. 현존하는 후버자료관의 송자문 문건과 장개석 일기는 이미 대외개방되었다.


중국현대역사상 이런 말이 있다: "장가천하진가당(蔣家天下陳家黨), 송가자매공가재(宋家姉妹孔家財)" 1949년 이후 중국의 '사대가족'은 이미 역사가 되어버렸다. 장개석 부자는 대만에서 힘들게 버티면서 변수를 기다렸고, 진입부(陳立夫)는 한때 뉴저지에 양계장을 만들었다. 돈을 잘 끌어모은 공,송가족은 거액을 가지고 뉴욕에 자리잡는다. 공령의의 사망으로, 역사의 한 편단은 막을 내린다. 제1대와 제2대의 공,송가족은 거의가 뉴욕시 교외의 Ferncliff의 고급실내묘원을 안식처로 삼았다. 고유균과 서지마의 원부인 장유의도 여기에 묻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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