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신불감(辛不甘)
동죽군은 1900년 상해의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황포차(黃包車)를 끄는 인력거꾼이고, 모친은 다른 사람의 집에서 허드렛일을 하는 일꾼이었다. 그녀가 13살 되던 해, 집안사정이 좋지 않고, 부친이 중병에 걸려 어쩔 수 없이, 장삼당자(長三堂子, 妓院)의 주인에게 300원을 빌리는데, 조건은 동죽군을 담보로 기원(妓院)에 맡겨 2년간 지내게 하는 것이었다. 다만 매창불매신(賣唱不賣身). 즉 몸을 팔지는 않고, 그저 손님들과 얘리를 나누는 것이었다. 당시 상해에서 이런 여자를 "소선생(小先生)" 혹은 "청관인(淸倌人)"이라고 불렀다. 소선생이 나이가 들어 정식으로 손님을 맞게 되면 "대선생(大先生)"이라고 칭하게 된다.
장삼당자는 바로 청나라때의 청루(靑樓) 즉, 호화로운 기원이다. 서우(書寓)라고도 불렀다. 서우의 아가씨들은 여교서(女校書)라고 불렀고, 예기(藝妓)라고도 불렀다. 금기서화(琴棋書畵)를 할 줄 알았다. 장삼당자같은 고급 기원에서는 아가씨가 미성년이면 손님을 받지 않았다. 이것은 주인의 마음이 선량해서가 아니라, 그들의 목적은 아가씨의 인기가 높아지기를 기다려서, 손님을 받을 때 높은 가격을 받기 위함이다. 이것은 주인의 경영수완이다.
마음이 우울하고, 나이가 어렸던 동죽군은 웃지를 않았다. 사진을 찍을 때도 걱정이 가득한 모습이었다. 손님들이 그녀에게 붙여준 별명은 "웃지 않는 아가씨"이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자신의 장기가 있었다. 그녀는 미인이었고, 목소리가 고왔다. 그래서 그녀를 찾는 손님이 항상 넘쳐났다. 노래 한 곡을 부르면 당자는 1원을 받는다. 첫날 저녁에 30장을 받았다. 나중에 점점 늘어나고 손님이 끊이지 않으니, 그녀는 청루주인에게 돈보따리가 된다. 그래서 그녀는 자주 목이 쉬었다. 그래도 많은 손님들이 그녀를 보러 찾아왔고, 노래를 부르지 않더라도, 매일 부지기수로 계단을 오르내려야 했다. 손님이 가고 나면 그녀는 피곤해서 두 다리가 저렸고, 피곤에 지쳤다.
당자의 인기있는 아가씨들에게는 보살펴주는 사람이 있어서, 화장과 단장을 도와준다. 동죽군에게는 맹(孟)씨성의 여인이 있었는데 식견이 있는 중년부녀였다. 그녀는 자주 동죽군에거 청루여자의 비참한 운명을 얘기해주었다. 그녀는 동죽군에게 이런 말도 해준다. 기원에서는 그녀같이 인기있는 아가씨는 절대로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담보로 잡은 기간이 끝나더라도, 소장은 절대로 쉽게 놓아주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흑사회(조직폭력배)의 힘을 이용해서라도 너를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만들 것이다. 얼마나 많은 아가씨들이 기원에서 피눈물을 흘렸는지 모른다. 나이들어 인기가 없어지면 길거리로 쫓겨난다. 설사 시집을 가서 돈있는 사람의 첩이 된다고 하더라도, 청루출신이기 때문에 집안에서 지위를 갖지 못하게 된다.
이 맹씨여자는 자주 동죽군에게 말했다. 하루빨리 좋은 사람을 찾아서 손님을 맞기 전에 시집가라고. 그녀의 이런 말들은 동죽군의 마음 속에 깊이 새겨진다. 그녀는 그런 운명을 맞을 수는 없었다. 암암리에 기회를 기다린다. 불구덩이를 빠져나갈 수 있는. 그리하여 그녀는 자세히 당자에 오는 손님들을 관찰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곳에 좋은 사람은 너무 적었다. 우연히 혁명당 청년들이 화를 피하여 이곳에서 모임을 갖기도 했다. 그들의 고담준론은 동죽군으로 하여금 적지 않은 이치를 깨닫게 해주었고, 마음 속으로 그들의 구국의 뜻에 감복한다.
1911년의 신해혁명은 중국의 운명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그러나 원세개가 대권을 훔치고, 신당의 영수 송교인을 암살하였다. 많은 혁명당인들이 진압을 당하고, 지하로 숨어든다. 그리하여 원세개를 토벌하는 2차혁명을 준비한다. 지금 상해의 복주로는 바로 당시 상해 홍등가인 사마로(四馬路)이다. 당시 혁명당인들이 자주 출몰하던 곳중 하나이다. 기원은 그들이 비밀활동을 가장 안전하게 진행할 수 있는 장소였다.
당시의 사천성 부도독(副都督) 하지시(夏之時)는 이곳의 단골이었다. 그는 일찌기 일본에 유학했고, 나중에 동맹회(同盟會)에 가입했다. 신해혁명때, 그는 신군 장교의 신분으로 의거를 이끌어 혁명군 총지휘가 되어, 중국내지의 정치변혁에 혁혁한 공을 세운다.
그리하여 전설에 나오는 재자가인의 이야기가 여기서 발생한다. 이 난잡한 화류계에서 하지시는 소녀 가기(歌妓) 동죽군을 만난다. 그녀의 용모와 노래는 하지시의 마음을 뛰게 만든다. 그리고 신체건장하고 영준하며 호방한 혁명지사를 만난 동죽군도 사랑이 싹튼다. 마음 속에서 애정의 환상이 가득했다.
얼마 후, 원세개는 3만대양의 하지시의 목에 3만대양의 현상금을 내건다. 그는 일본조계의 여관에 몸을 숨길 수밖에 없었다. 동죽군은 위험을 무릅쓰고 그를 찾아간다. 목숨이 언제 날아갈지 모르는 위기의 순간에, 하지시는 여인로부터의 사랑이 필요했다.1914년의 늦은 봄의 어느 깊은 밤, 동죽군은 마침내 기원주인의 방해와 다른 사람의 권유를 모두 물리치고, 의연히 모든 보석장식을 내버려두고 당자를 빠져나와 하지시의 뜨거운 품에 안긴다.
재미있는 것은 하지시가 동죽군에게 함께 떠나자고 할 때, 동죽군이 3가지 조건을 내걸었다는 것이다.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이렇게 하지 않으면, 나는 아무 것도 아니다. 이후에 부부가 되더라도, 어느 날 네가 기분 나빠지면, '너는 내가 돈주고 샀다'고 한다면 나는 참을 수가 없다. 너는 돈 한 푼 써서는 안된다. 만일 돈을 쓰겠다면 나는 너와 결혼할 수 없다. 만일 나에게 몇 가지를 약속해줄 수 있다면, 내가 방법을 강구해서 기원에서 빠져나오겠다."
그녀가 제기한 3가지 조건은 이렇다:
첫째, 첩이 되지 않겠다.
둘째, 일본에 가면 공부를 하게 해달라.
셋째, 일본에서 공무를 마치고 돌아오면, 좋은 가정을 꾸리자. 하는 국가대사를 책임지고, 나는 집안일을 책임지겠다.
하지시는 생각지도 않고 그녀가 요구한 것을 다 받아들인다. 그후 그는 위험을 무릅쓰고 상해에 남아 있는다. 동죽군이 청루출신이므로, 그들의 결합은 많은 혁명당인들의 반대에 부닥친다. 그러나 하지시의 태도는 확고했다. 2주후, 그들은 송전양행(松田洋行)에서 결혼식을 거행한다. 당시 하지시는 27살이고, 동죽군은 겨우 15살이었다. 동죽군을 화장을 하고, 흰색의 비단치마를 입는다. 하지시는 양복을 입고 넥타이를 맨다. 그들의 복장만 봐도 당시 그들의 사상이 비교적 신식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결훈후 며칠만에 동죽군은 신혼남편을 따라 일본으로 간다. 사쿠라의 나라에서, 그들은 신선한 공기를 흥분하며 마셨다. 자유의 아름다움을 만끽한다. 동죽군과 하지시는 이곳에서 완전히 새로운 생활을 시작한다. 그녀는 마침내 학교에 가서 공부하는 꿈을 이룰 수 있었다. 그리고 사이가 좋은 몇몇 일본친구들도 만든다. 하루빨리 일본에서의 학습과 생활에 적응하기 위하여, 동죽군은 일본어를 배우기 시작한다. 1916년, 그들의 장녀 하국경(夏國瓊)이 태어난다. 딸은 그들 가정에 새로운 기쁩을 안겨주었다. 동죽군은 남편을 보살피고 자식ㅇ르 기르며 힘든 와중에서도 즐거왔고, 생활은 아주 충실했다. 하지시는 그때 원세개를 축출하는 일을 하고 있었다. 동죽군은 이 기회를 이용하여 공부를 한다. 동죽군은 진정한 학식과 그녀의 이후 개명한 생각은 모두 일본에서 공부한 이 6년동안에 얻은 것이다. 이 6년은 그들의 결혼생활에서 가장 달콤하고 아름다운 6년이었다. 하지시는 처가 나다니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서, 동죽군을 위하여 가정교사를 부른다. 마쓰다(松田) 선생과 하야시 케이코(林惠子) 소저가 그녀에게 문화와 가정을 가르친다. 동죽군은 남편의 이런 조치를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그녀는 남편을 사랑했고 기꺼이 받아들인다. 마쓰다의 수업으로 동죽군은 많은 지식을 쌓는다. 그녀는 점점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어떻게 사회를 대해야 하는지를 알게 된다. 하지시의 부친이 위중하여, 동죽군은 부득이 남편과 함께 귀국한다. 그리고 이때의 국내는 도처에 군벌들이 난립한 혼란한 국면이었다. 얼마 후, 동죽군은 혼자서 딸을 데리고 5일간 먼 거리를 걸어 중경(重慶)에서 사천 합강(合江)으로 간다. 합강은 하지시의 고향이다. 이때부터 구식대가족의 복잡한 생활에 말려든다.
동죽군이 비천한 청루출신이므로, 하지시의 가족들은 처음에 그녀를 백안시한다. 다행히 그녀는 일찌감치 준비를 했고, 사전에 많은 외국물건을 사와서 선물로 온 가족들에게 나눠주며 인심을 얻는다. 그렇게 하여 그녀를 대하는 표정이 웃는 얼굴로 바뀌게 된다. 그후 동죽군은 자신의 살림재주로 점점 지위를 차지한다. 하씨집안은 혼례를 다시 치르기로 결정한다. 이렇게 하여 그녀의 합법적인 신분이 확정되는 것이다. 신경써서 고른 날짜에 하씨집안은 등을 내걸고 장식을 하며, 닭과 양을 잡는다. 동죽군은 큰 딸을 데리고 다시 한번 혼례를 치른다.
1919년 하씨집안은 성도(成都)로 이사를 간다. 이때의 하지시는 돌연 군에서 면직된다. 의기소침해진 그는 점점 혁명가에서 수구적인 향신(鄕紳)으로 변모한다. 이 신해혁명의 노장은 동죽군이 연이어 딸만 넷을 낳자 아주 화를 내고, 동죽군이 사회사업에 열심인 것에 대하여도 불만을 가진다. 동죽군은 그때 아주 능력있고, 아주 견식있으며 그보다도 더 나았다고 할 수 있다. 사회에서도 사람들은 그보다 동죽군을 더 칭찬했다. 하지시는 무의식중에 자신의 처가 자신보다 능력있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동죽군은 이 모든 것을 참아낸다. 한편으로 그녀는 남편이 엣날 혁명청년의 기개를 되찾기를 바라고, 다른 한편으로 그녀는 그에게 깊이 감사하고 있었다. 어쨌든 하지시가 그녀를 불구덩이에서 구해낸 것이고, 그녀에게 새 삶을 살 수 있는 기회를 준 것이니까.
이어서, 하지시는 마작을 하고 아편에 손을 댄다. 나중에 동죽군은 마침내 사내아이를 낳는다. 하지시는 중남경녀(重男輕女)의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딸들이 공부하는 것에 반대한다. 한번은 작을 일 때분에 권총을 꺼내서 동죽군을 위협한다. 그리하여 동죽군은 크게 상심한다. 이런 모욕이 점점 일상이 되어 가고, 하씨집안이 공기는 점점 사람을 질식시켰다. 1929년, 생활을 바꾸기 위하여, 동죽군은 부귀로운 생활을 버리고, 네 딸을 데리고 상해로 간다. 그녀가 가정을 떠난 것은 성도를 뒤흔든다. 당시 각 신문에서 크게 보도한 뉴스이기도 했다.
상해의 부흥공원에서 약속을 하고 온 하지시와 동죽군은 긴 시간 얘기를 나눈다. 결국 5년간 별거하기로 결정한다. 동죽군은 침중한 심정을 안고 협상하기 위하여 작은 집의 계단을 올라갈 때, 그녀는 생각한다. 만일 5년이후에도 쌍방이 모두 자신의 생각과 견해를 바꾸지 않는다면, 이혼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계단을 반쯤 올라갔을 때, 그녀는 마음이 약해진다: 만일 정말 이혼하면 자신은 어떻게 살 것인가? 아이들은 어떡할 것인가? 생각을 다시 바꾼다. 더 이상 이혼하지 않는다면 장래의 생활은 끝장이다. 그래서 그녀는 다시 일어선다. 이렇게 주저앉고 일어서기를 반복한 후, 동죽군은 결심을 내린다. 얘기가 잘 되지 않으면 그와 이혼하겠다. 이번 협상때 하지시는 이런 말을 한다: "네가 나와 이혼하고서도 네가 장래에 상해에서 성공할 수 있다면, 그 몇몇 딸들을 키워낼 수 있다면, 교육까지는 바라지도 않는다. 그러면 나는 내 손에 장을 지지겠다."
다른 사람에게 구걸하는 것보다 고개를 숙이고 땅에서 찾는 것이 낫다. 이혼후의 동죽군은 4명의 딸들을 데리고 힘들게 생활한다. 어떤 때는 절망적일 때도 있었다. 아이를 기르기 위해, 그녀는 하루종일 전당포를 드나든다. 하지시는 계속하여 서신을 보내 동죽군에게 돌아와 달라고 말한다. 심지어 황당한 모해계획까지 세운다. 그는 심지어 상해 구사회의 비교적 유명한 인물인 범소걸(范少傑), 대계도(戴季陶)를 찾아가서, 그들에게 동죽군을 마대자루에 넣어서 강에 던져버리라고 한다. 그러나 대계도, 범소걸같은 사람들은 동죽군을 아주 존중했고, 이런 것들을 모조리 동죽군에게 해준다. 그들은 모두 하지시를 비난하고, 그가 멍청하다고 말한다.
하지시는 쓸쓸하게 사천으로 돌아간다. 얼마 후, 사천의 신문에 "하지시의 집안에 노라(인형의 집에서 가출하는 여주인공)가 나왔다"는 내용의 보도가 실리고, 하지시는 대노한다. 동죽군은 매일 피곤한 몸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왔다. 멀리서 들려오는 큰딸 하국경의 바이올린 소리는 그녀에게 큰 위로가 되었다. 생활은 여전히 궁박했지만, 그녀는 낙관적이었다. 이웃인 정덕영(鄭德英)은 동죽군을 데리고 친구 오진성(伍振聲)을 찾아간다. 오진성은 동죽군에게 사관창(紗管廠)을 열 것을 권한다. 그러나 자금이 문제였다. 동죽군은 돌연 어릴 때의 친구인 우보(尤寶)를 떠올린다. 그리고 그와 함께 공장을 열기로 결정한다.
여러 사람의 노력으로, 군익사관창(君益紗管廠)이 마침내 문을 연다. 공장을 열기 위하여, 동죽군은 아이들을 기숙학교로 보내고, 자신은 밤낮없이 힘들게 일한다. 그러나 제품의 판로가 좋지 않았다. 대계도는 동죽군으로 하여금 영덕생(榮德生)을 찾아가게 한다. 그러나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공장은 겨우겨우 유지되었다. 바로 이때, 건물주인 장천(莊泉)이 화교들을 데리고 참관왔고, 투자하겠다고 한다. 진청천(陳淸泉)이라는 필리핀 화교는 동죽군을 만나보고서는 너무 늦게 만난 것을 한탄하는 심정이었다. 그는 동죽군의 인간적 매력에 감복하고, 그녀를 돕기로 한다.
국내외를 깜짝 놀라게 만든 "1.28송호회전"이 발발하여, 전국인민들이 모두 분개한다. 상해의 각계에서는 집회와 시위를 벌이고, 돈과 재물을 기부해서 십구로군(十九路軍)의 항전을 지원했다. 갑북에 위치한 군익사관창은 일본비행기의 폭격에 명중당해 거의 폐허가 된다. 자금을 모아서 공장을 재건하기 위하여, 진청천은 동죽군을 데리고 하문(廈門)의 고향으로 가서 자금을 모은다. 그러나 생각지도 못하게 항일언론을 발표하는 바람에 동죽군이 체포당할 뻔한다. 다행히 천재로 인하여 그녀는 피할 수 있었다. 하루는 진보학생인 정호(鄭浩)가 손에 선전자료를 들고 동죽군의 집으로 온다. 그런데 마침 조계의 형사에게 미행당한다. 형사는 원래 돈이나 뜯어내고 말려고 했는데, 생각지도 못하게 이 여자가 끝까지 돈을 주지 않았다. 그래서 돈을 받아내지 못하자, 분노한 그는 동죽군을 감옥에 집어 넣는다. 나중에 여러 사람들의 노력과 그녀가 전 도독의 부인이었다는 신분까지 꺼내서 겨우 풀려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일로 인하여 하지시는 그녀에게 더욱 원한을 갖는다.
별거기한이 끝나자, 동죽군과 하지시는 정식 이혼한다. 이혼때, 하지시는 아이들과 만난다. 네 딸이 모두 잘 자라서 예쁜 모습을 보자 하지시는 감개무량해진다. 이때 동죽군이 부친이 병으로 쓰러지고, 임종때, 그는 낮은 목소리로 그의 아원(阿媛, 딸)에게 말한다. 아마도 그는 딸에게 큰 운이 도래한다는 것을 알았던 것같다. 1년만에, 동죽군은 두 명의 가장 가까운 가족을 잃는다. 그녀는 울고 싶어도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마치 인생의 막바지에 이른 것같았다. 이때 유품흥(柳品興)이 나타난다. 그는 동죽군에게 식당을 열 것을 건의한다. 그리고 한 의사(義士)가 그에게 부탁하여 보내준 2000원의 돈을 준다. 고난이 한계에 달하자, 마침내 전기가 마련되었다. 동죽군은 이때부터 그녀 일생중 가장 휘황한 창업을 시작한다.
어느 정도 시간동안 기획한 후, 1935년 3월, 금강천채관(錦江川菜館)을 정식 개업한다. 개업하는 날, 폭죽을 울리고,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상해탄의 유명인사인 양호(楊虎)와 두월생(杜月生)까지도 참석해준다. 이는 금강천채관의 성공을 예시하는 듯했다.
진청천은 동죽군을 만나러 온다. 그는 '금강'의 성공에 찬탄을 금치 못한다. 정말 '사별삼일, 괄목상대'이다. 그러나, 상해에서 한 가지 일을 성공시키기는 쉬운 것이 아니다. 매일 동죽군은 식당의 각종 사무를 처리해야 하는 외에, 반드시 당시 상해탄의 각종 세력을 상대해야 했다. 하루는 황금영(黃金榮)의 양아들 소금영(小金榮)이 한 무리의 깡패를 데리고 식당으로 와서 난리를 친다. 점포를 부수고 싸움을 벌인다. 이 장면을 보고서 동죽군은 태연자약했다. 원래 원수는 맺지 않고 풀어야 한다는 원칙하에 직접 황금영의 집을 찾아간다. 황금영이 감동하여 이번 풍파는 일단락된다. 동시에 동죽군은 자신이 직접 주방에 들어간다. 삼일 밤낮을 주방에서 나오지 않은 적도 있다. 그녀는 사천의 고향에서 스님과 요리사를 불러서 주방을 맡게 한다. 그리고 이를 계기로 점포업무를 정돈한다. 그리하여 '금강'의 면모는 일신된다.
'금강'을 개업한 후, 그녀는 비록 흑사회 세력과 어느 정도 타협을 했지만, 그녀는 흑사회등 지방암흑세력에 빌붙지는 않았다. 당시 상해탄의 많은 인물들은 모두 그녀를 존경했고, 그녀를 자신의 수하나 집안에 들이고 싶어 했다. 그러나 그녀는 시종 자신의 기개와 신념을 지킨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 그녀의 이런 의지는 그녀가 젊었을 때 일본에서 받은 교육과 관련이 있을 것이라고, 그리고 그녀가 일본에 있을 때 진보인사들과 접촉한 것과 큰 관계가 있을 것이라고. 나중에 그녀는 동시에 국민당인, 일본인과 교묘히 주선하며, 전혀 망설임없이 혁명당인과 애국지사를 도와준다. 자신의 '일개여류'의 신분으로 많은 혈성남아들이 할 수 있는 일들을 해낸다. 그외에 그녀는 시국을 파악하는데 뛰어났다. 초기의 사업과 생활에서의 실패를 겪은 후, 그녀는 풍부한 경험과 교훈을 쌓았다. 이런 것들은 그녀로 하여금 정확하게 시장의 움직임을 파악하게 해준다. 동시에 여러 방면에서의 이익분규에서 균형점을 찾을 수 있도록 해준다. 최대한도로 자신의 이익을 지키면서.
"8.13"사변이 발발하고, 일본군이 대거 상해로 진공한다. 곽말약(郭沫若)등은 귀국하여 항일을 고취시킨다. 동죽군은 일본에 있을 때 이미 곽말약의 대명을 들은 바 있고, 그를 아주 존경했다. 그녀는 곽말약의 하루 세끼를 모두 책임지고, 실제행동으로 항전을 지원하기로 결심한다. 상해는 일본인의 공습을 받아, 거의 완전한 곳이 없게 된다. 하루는 한 매국노가 두 명이 일본특무를 데리고 '금강'으로 와서 식사를 한다. 그리고 '금강'의 요리를 극구 칭찬한다. 그들은 동죽군에게 일본군사령부의 홍구여관에 '금강' 분점을 열 것을 권한다. 이 일은 동죽군을 머리아프게 만든다. 응락하자니, 자신이 매국노라는 오명을 쓸 것같았고, 그것은 그녀가 원치 않는 일이다. 응락하지 않자니, 일본인들은 뭐든지 할 수 있어서, 자신을 힘들게 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었다.
상해에 더 이상 머물기 힘들겠다고 여긴다. 재삼 고려한 후, 동죽군은 떠나기로 결정한다. 1940년말, 그녀는 필리핀으로 가는 배에 오른다. 동죽군은 마닐라에 '금강' 분점을 열 생각이었다. 그리고 상해의 점장인 장진지(張進之)에게 마닐라의 사람을 물색해보라고 시켰는데, 장진지는 이 기회를 틈타 개인적인 이득을 노린다.
이전에 필리핀으로 가있던 두 딸 하국경, 하국수(夏國秀)의 음악연주활동은 성공을 거두어, 동죽군이 아주 기뻐한다. 진청천은 두 아이를 보러 왔는데, 생각지도 못하게 동죽군까지 만난다. 오랜 만에 다시 만나니, 두 사람은 크게 기뻐한다. 진청천은 동죽군에 대한 사랑에서 빠져나오지 못한다. 그리하여 그는 친구인 계화산(桂華山)에게 자신의 처에게 이혼하도록 설득해달라고 부탁한다. 그러나 계화산이 거절하자, 부득이 그는 직접 처에게 얘기할 수밖에 없었다.
진청천의 처는 경건한 카톡릭교도이고, 필리핀의 제2대 화교이다. 자신의 신성한 혼인을 지키기 위하여 그녀는 도보로 마닐라까지 와서 동죽군에게 자신의 입장을 표명한다. 동죽군은 놀라면서 깊은 곤혹에 빠진다. 그녀는 자신이 필리핀으로 오지 말았어야 한다고 자책한다.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원래의 모든 계획은 물거품이 된다. 동죽군 모녀는 마닐라에 묶여버린다. 멀리 상해의 장진지는 동죽군이 금방 돌아올 수 없다는 것을 알고, 금강반점의 이익을 빼돌린다.
전쟁의 불길은 마닐라 교외에까지 다가온다. 동죽군은 두 딸을 데리고 미친 듯이 도망다닌다. 도중에 필리핀 헌병을 만났는데, 일본인으로 오인받아 하마터면 살해당할 뻔한다. 상해에 남아 있던 하국영(夏國瑛)은 그녀의 학교동료이자 연인인 호개(胡凱)의 영향을 받아 좌파가 되어 혁명에 적극 참여한다. 그러나 그녀는 호개에게 자신의 모친이 노동인민이 아니라는 것에 크게 불만이라고 얘기한다. 여러 곳으로 도망다니다가 동죽군 모녀는 마침내 마닐라로 되돌아온다. 일본인의 체포를 피하기 위하여, 모녀 3명은 어쩔 수 없이 옥상에서 잠을 잔다. 진청천은 일본인과 협력하지 않으려다 감옥에 들어간다. 동죽군은 급히 일본에서 배운 일본어를 이용하여 감옥으로 찾아가 만난다. 동죽군이 오자, 진청천은 더욱 기뻐한다. 그녀는 앞으로 살 날이 많지 않다고 여기고, 대담하게 동죽군에게 자신의 마음을 털어놓는다. 정연부도두(情緣不到頭), 촌심회미휴(寸心灰未休). 이 광경에 동죽군은 두 눈에 눈물을 흘린다.
생존을 위하여, 동죽군은 하국경, 하국수를 데리고 마닐라에서 작은 장사를 한다. 그녀들의 생활은 힘든 와중에 즐거움도 있었다. 장진지가 자신의 이익만 챙기자, 금강반점의 사업을 위하여 동죽군은 먼저 귀국하기로 결정한다.
1945년 1월, 동죽군은 일본적십자선을 타고, 수십일동안의 항해를 거쳐 마침내 상해에 도착한다.
전란의 시대에, 동죽군에게는 큰 시련이었다. 하나는 방대한 반점을 경영해야 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분란의 시국을 응대해야 한다는 것이다. 동시에 그녀는 모친으로소 자신의 자녀도 교육시켜야 했다. 다행인 점은 그녀의 몇몇 자녀들은 모두 뛰어났다. 동죽군의 믿음과 성격을 물려받은 외에 각자 자신의 성취를 이룬다. 최근 들어 갈수록 많은 사람들이 그녀의 자녀교육관념에 흥미를 느끼게 되었다.
한번은 그녀가 12살된 딸에게 상해에서 기차를 타고 남경으로 가서 한 친척에게 돈을 전해주라고 한다. 아이가 남경 하관(下關)에 도착했을 때, 성문은 이미 닫혀 있었다. 그녀는 함부로 돈을 쓸 수가 없어서, 성문 아래에서 하룻밤을 잔다. 딸이 돌아와서 그녀에게 그 일을 얘기해주자, 동죽군은 마음이 아프면서도 기뻤다. 그녀는 딸에 대한 교육에 마음을 많이 쏟는다. 그녀는 항상 아이는 결백무하(潔白無瑕)하다고 말하곤 했다. 절대로 '연'의 줄을 끊어서 방향을 잃게 해서는 안된다고 했다. 딸이 외지에서 공부할 때면 그녀가 계속 편지를 써서 그녀들을 교육시켰다. 일을 할 때는 책임감이 있어야 하고, 광명정대해야 한다. 일을 처리할 때는 감정이 있어야 하며 동시에 이성도 갖추어야 한다. 객관적으로 사물을 전면적으로 분석해야 하며 주관적으로 하지 말라. 절대로 자기마음대로 하지 말라.
지금 일대의 전설적인 여자 동죽군은 그녀가 사랑하는 '금강'과 그녀를 사랑하는 모든 사람을 남기고 멀리 떠났다. 그러나, 우리가 그녀의 전설적이고 풍부한 인생을 살펴보고, 다시 한번 금강호텔을 들어서게 되면, 사천요리점의 입구가 여전히 빛나고 당시 점포의 휘장인 "대나무(竹)"이 여전히 여기저기에서 볼 수가 있다. 다시 금강호텔에서 금강오리구이, 은사간패, 방방계, 수저우육등 전통적인 요리를 시키며, 다시 한번 우리의 혀를 기쁘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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