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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민국 후기)

민국 제일미녀는 누구인가?

by 중은우시 2018. 12. 1.

글: 이자지(李子遲)





민국의 미녀를 얘기하자면 아주 많다. 예를 들어, "사대미녀"라는 말도 있다. 완령옥(阮令玉), 주선(周璇), 육소만(陸小曼), 임휘인(林徽因)을 가리킨다. 그리고, "십대미녀"라는 말도 있다. 위의 사대미녀에 맹소동(孟小冬), 당영(唐瑛), 능숙화(凌淑華), 은명주(殷明珠), 성애이(盛愛頤), 조일획(趙一獲)을 추가한다. 그 외에도, 송씨삼자매, 특히 송미령(宋美齡)과 송경령(宋慶齡)도 있고, 왕단봉(王丹鳳), 왕인미(王人美), 상관운주(上官雲珠), 낙체(樂), 임대(林黛), 장조화(張兆和), 왕민동(王敏彤, 즉 完顔立童記), 정평여(鄭萍如), 천도방자(川島芳子, 즉 愛新覺羅 顯玗), 왕광미(王光美), 증헌식(曾憲植)등등도 있다.


그렇다면, 민국제일미녀는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어떤 사람은 호접(胡蝶)이라고 한다.


호접(1908년 3월 23일 - 1989년 4월 23일), 원명은 호서화(胡瑞華)이고, 상해에서 태어났다. 조적(祖籍)은 광동 학산(鶴山)이다. 중국초기의 유명한 여배우이며, 중국무성영화시대와 유성영화시대에 걸친 저명한 영화배우스타이다. 초기에 완령옥과 나란히 이름을 떨친다. 1933년에 중국역사상 최초로 대중이 참여하는 미인선발활동을 벌이는데, 상해의 <명성일보> 진접의(陳蝶衣)가 추진한 것이다. 그 때 21,334표의 최고득표로 호접은 '영후(影后)'에 등극한다. 진옥매(陳玉梅)가 2위였고, 완령옥이 3위였다. 그리고 1934년의 '십대영화스타" 선거에서도 그녀는 민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자스타"로 선발된다.


용모를 보면, 호접의 용모는 중국민간의 전통적인 미녀 표준에 부합한다. 얼굴이 은쟁반같고, 눈이 맑고, 이빨이 희며, 피부는 응지(凝脂)같을 뿐아니라, 두 뺨에 보조개가 그녀를 상징한다. 그녀는 온순하면서도 성격이 강인하다. 진취적이면서도 담담하다. 이성적이면서도 귀엽다. 저명한 작가 장한수(張恨水)는 그녀를 이렇게 묘사했다: "호접은 사람됨이 시원시원하며 여성의 자태이다. 성격은 신중하고 기민하며 영리하다. 홍루몽의 인물에 비유하자면 열에 다섯여섯은 설보채, 열에 두셋은 습인, 열에 한둘은 청문과 같다." 그러나, 이런 온유하고 돈후하며 활달하고 대범한 여인도 비극적인 숙명을 벗어나지는 못했으니 실로 안타까운 일이다.


수양과 행위를 보면, 호접은 당시 영화배우들 중에서 교양이 비교적 높은 경우이다. 그녀가 초기에 정규교육을 받았을 뿐아니라, 평소에 열심히 공부하고 다재다능했다는 것도 관련이 있다. 책읽기를 즐겼을 뿐아니라, 금도 잘 탔다. 스스로 즐길 뿐아니라, 마음을 다스렸다. 자연히 성격이 온유하고 돈후하며, 기질은 고아하고 비범했다.


호접은 1931년 중국최초의 유성영화 <가녀홍모란>의 주연을 맡아 전국에 이름을 떨친다. 심지어 해와교포들의 눈길까지 끈다. 그외에 <자매화>, <공곡란>, <화소홍련사>, <제소인연>, <절대가인>등 백여편의 영화를 찍는다. 호접은 일생동안 첩, 모친, 여교사, 기녀, 무녀, 아가씨, 노동부녀등 여러 역할을 했다. 기질은 부려화귀(富麗華貴)하고, 아치탈속(雅致脫俗)하다. 연기는 온량돈후(溫良敦厚)하고, 교미풍아(嬌美風雅)했다.


호접은 말년에 카나다로 이주하였고, 1960년 일본에서 거행된 제7회 아시아영화제에서는 <후문>으로 최우수영화상을 받고, 호접은 최우수여자연기상을 받는다. 같은 해에 이 작품은 일본 문부대신이 정한 최우수영화상도 받는다. 52세의 호접은 아시아의 영후에 오른 것이다. 1966년, 그녀는 영화계를 떠나고, 1989년 벤쿠버에서 병사한다. 유언은 "나비(胡蝶, 胡蝶)는 이제 떠난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