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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민국 후기)

강희장(江希張): 10살때 총통의 막료가 된 민국제일신동

by 중은우시 2019. 2. 12.

글: 역사백가회(歷史百家匯)





강희장은 광서33년(1907년) 정월 초이틀에 산동성 제남 남력성현 강가장에서 태어난다. 부친 강종수(江鍾秀)는 농민출신으로 20년간 힘들게 공부하여, 어느 정도 성취를 이룬다. 그는 제남의 성수묘(星宿廟)에 의학(義學)을 세운다. 그리고 <공맹도가>, <흥학창문>등 통속적인 책을 쓴다. 모친 왕숭맹(王崇孟)은 사숙에서 공부한 바 있고, 나중에 제남여자사범학교에 입학한다. 부모가 모두 글을 읽어서, 그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강희장은 1,2살때 글자를 알아보았고, 3,4살때 글을 쓸 줄 알았다. 5,6살에는 경서에 주석을 단다. 4살이 되던 해 봄에 부친은 그를 데리고 박돌천(趵突泉)의 소판교(小板橋)로 데려간다. 놀면서 샘가에서 시를 지어 읊었다. 그리하여 낚시를 하던 한 노인의 주목을 끈다. 노인은 입에서 나오는대로 상련(上聯)을 낸다: "조어(釣魚)". 그러자 강희장은 바로 대답한다: "방응(放鷹)" 노인이 그에게 한 구절을 더 말해보라고 하자, 강희장은 강가에 작은 나무조각이 떠내려 오는데, 그 위에 개미가 있었다. 강희장은 한편으로 나무판을 건져 올리면서, 한편으로 하련을 말한다: "구의(救蟻)". 노인은 기뻐하며 손뼉을 친다. 그리고 그의 부친에게 말한다: "아드님은 장래에 반드시 장원이 될 것이네."


원래 그 노인은 산동제학사 진영창(陳榮昌)의 막료이다. 진영창이 이 일을 듣고나서, 다음 날 강가장으로 가서 강희장을 만나 직접 시험한다. 진제학은 그에게 무슨 뜻을 가지고 있는지 묻는다. 그러자 강희장은 이렇게 대답한다: "천지를 위하여 입심(立心)하고, 백성을 위하여 입명(立命)하고, 옛 성인을 위하여 절학을 잇고, 만세를 위하여 태평성세를 열고 싶습니다." 4살짜리 어린아이가 이렇게 큰 뜻을 품고 있다니, 진제학은 경탄해 마지 않는다. 진제학은 관청으로 돌아온 후, 산동순무 손보기(孫寶琦)에게 아뢴다. 손보기는 바로 진주천(珍珠泉) 옆에 있는 순무저택에서 강희장을 만난다. 손보기가 먼저 상련(上聯)을 냈다: "오대위천지군친사(五大爲天地君親師)"(다섯가지 큰 것은 하늘, 땅, 임금, 부친, 스승이다). 이련의 하련을 내는 것은 난도가 높다. 어른이라고 하더라도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전혀 생각지도 못하게 강희장은 바로 대답한다: "일생수인의예지신(一生守仁義禮智信)"(일생동안 인,의,예.지.신을 지킨다). 손보기는 놀라서 소리친다: "신동이다! 신동이다!" 손보기는 바로 학부(學部)에 보고하여 그를 선통제의 반독(같이 공부하는 학생)으로 추천한다. 이것이 바로 <정종애국보>에서 보도한 바로 그 상경때의 일이다. 강희장은 경성에서의 시험도 보기좋게 통과한다. 학부대신은 섭정왕 재풍에게 보고하여, 강희장을 황제의 반독으로 삼을 것을 건의한다. 그러나 이때는 마침 신해혁명 직전이었다. 재풍은 시급한 일들이 많아서 그 일을 신경쓸 겨를이 없었다. 강씨부자는 경성에서 1달간 체류하다고 아무런 회신이 없자 고향으로 돌아간다.


1914년, 강종수는 고문에 대한 이해능력이 뛰어난 것을 보고, 아들을 지도하기 위하여 <사서백화해설>을 쓴다. 그러나 그는 혼자서 완성하기 어려울 것으로 생각하고, 다른 사람과 아들에게 얘기해서 같이 완성한다. 강희장이 여러해 후에 회고한 바에 따르면, 그 책의 절반은 그가 쓴 것이다. 다른 절반은 사형인 주락삼(周樂三)과 다른 몇몇이 공동으로 쓴 것이다. 그러나 전체 책의 작자는 "칠세동자강희장"으로 되어 있다. 2년후에 정식으로 출판된다. 강희장은 그리하여 국내외신문과 잡지에서 앞다투어 보도하는 대상이 된다. 강유위는 그 책을 읽은 후, 서신을 보내 격려하고, 강희장을 "감히 민국제일신동으로 부를 만하다"고 칭찬하며, 강희장을 제자로 삼고 싶다고 말한다.


1916년 유럽에서 제1차세계대전이 일어나자, 강희장은 그에 자극받아 <식전론(息戰論)>을 쓴다. 전쟁조종자들로 하여금 전쟁을 그치도록 권하는 내용이다. 이 책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1. 우주전식생명구조론을 창도한다. 2. 세계각국에서 전인류가 생명을 애호하고 전쟁을 멈추고 더 이상 사람을 죽이지 않도록 권한다. 3. 세계5대종교의 교의를 숭상하여, 도와 덕을 받들어, 전세계 인류가 서로 사랑하고, 평화롭게 공존하도록 하여, 세게대동, 화평무쟁을 이룬다. 어린 나이에 <식전론>을 쓴 것은 기적과도 같은 일이다. 당시의 사람들이 모두 "강신동"이라고 예찬한다.


강희장의 총명한 자질과 사회적 영향력이 커지면서, 1917년, 국민정부 대총통(代總統) 풍국장(馮國璋)은 그를 막료로 초빙한다. 당시 그의 나이 10살이었다. 학자인 진공일(陳贛一)은 <신어림>에서 이렇게 썼다: "강희장은 5살에 경사를 통독했고, <공자발미>를 썼다.매번 그와 얘기를 나눈 사람들은 모두 그를 '소신선'이라고 불렀다.....양사양, 손보기는 차례로 산동순무를 지냈는데, 그의 명성을 듣고 불러서 직접 시험해 본다. 강희장은 대답에 막힘이 없었고, 신동의 눈이 있었다. 민국6년, 풍국장 대총통은 특별히 그를 불러서 만나고, 공부자의(公府諮議)로 초빙한다."


다만, 신동도 사람이다. 지력이 남보다 뛰어날 뿐이다. 모든 분야의 학문에 통달할 수는 없다. 그래서 그가 쓴 어떤 것들은 전혀 과학적이지 않다. 1918년 10월 15일, 제5권제4호 <신청년> 잡지에 노신의 <수감록.삼십삼>이 실린다. 여기에서는 "귀화(鬼話, 헛소리)와 과학"을 논술한다. 문장에서는 이렇게 쓰고 있다: "현재 귀화를 얘기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과학을 가장 미워한다. 왜냐하면 과학은 도리를 분명하게 알려주고, 사람의 생각을 명확하게 해주기 때문이며, 헛소리를 하지 못하게 한다....가장 엉터리인 것은 한 신동이 쓴 <삼천대천세계도설(三千大千世界圖說)>이다. 그는 유생, 도사, 화상, 불교의 쓰레기를 하나로 뭉뚱그렸고, 가득하게 헛소리를 늘어놓았다." 노신이 말한 그 '신동'이 바로 강희장이다.


이런 말이 있다. 사람은 이름이 나는 것이 겁나고, 돼지는 몸집이 커지는 것이 겁난다. 강희장의 저작은 전국에서 베스트셀러였고, 판권수입도 제법 괜찮았다. 그리하여 일부 사람들은 그의 이름을 도용하여 '강신동'의 이름으로 책을 냈다. 노신이 지적한 그 책이 바로 그의 이름을 도용하여 낸 책이었다. 그 책에서는 소위 '천안통'이 천상지하의 상황을 모두 볼 수 있다고 얘기하여, 내용이 황당무계하며, 완전히 헛소리들이다. 그런데 강희장이 그 욕을 얻어먹은 것이다.


12살이후, 강희장의 사상은 확실히 성숙된다. 그는 갈수록 자연과학을 좋아하고, 번잡한 '명인'으로서의 생활에 싫증을 낸다. 그의 마음을 이해한 어른은 당시 산동성장으로 있던 전중옥(田中玉)을 찾아가서, 국가는 '인재'를 아껴야 한다고 호소한다. 전중옥은 그의 부친을 불러서 만난 다음에 강희장을 태안취영중학(泰安聚英中學, 현재의 태안일중)에 입학시켜 신식교육을 받게 한다. 2년후 강희장은 1등의 성적으로 북경회문대학(匯文大學) 예과에 입학한다. 1927년 봄, 나이 스무살의 강희장은 과기구국의 이상을 안고, 프랑스로 유학을 떠난다. 파리대학에서 화학을 전공한다. 그는 원래 자질이 뛰어난데다 열심히 노력하여, 시험성적은 항상 앞자리였다.


한번은 유학생모임에서 프랑스로 와서 피아노를 공부하는 송이련(宋以蓮)을 만나고 두 사람은 바로 사랑에 빠진다. 3개월의 열애후 결혼까지 한다. 송이련의 부친은 주오스트레일리아총영사이고, 사위가 나중에 외교관이 되기를 바랐다. 그리하여, 강희장은 장인의 뜻에 따라 프랑스국제관계연구원에 들어가고, 졸업후에는 처를 데리고 오스트레일리아로 가서, 장인의 곁에서 일을 한다. 그러나, 환경이 맞지 않아, 오스트레일리아에서 1년만에 바로 돌아온다. 그 후, 송이련은 청도의 산동대학에서 음악강사를 지내고, 강희장은 여전히 글을 써서 생활한다. 1933년 봄, 두 사람은 북경으로 옮겨서 정착한다. 강희장은 <사서백화해설>을 다시 쓰는데, 주로 오류를 바로잡는 것이었다. 다음 해에 완성하며, 책이름을 <사서신편>으로 바꾼다. 일시에 엄청난 반향을 불러 일으키며 2년내에 14판까지 찍어낸다.


강희장은 <오경신편>도 쓰려고 했다. 그러나 "77사변"이 발발하면서 미루어진다. 1939년봄, 장인의 요청을 받아 처와 이별하고 남아공의 요하네스버그로 가서 현지 화교신문 <교성보>의 총편집이 된다. 거기에서 중국항전을 선전한다. 그가 2년임기를 마치고 귀국준비를 할 때, 진주만습격이 일어나고, 이로 인하여 교통이 두절된다. 그는 남아공에서 항전승리때까지 머물다가 귀국한다.


신중국성립후, 서방의 경제봉쇄로 많은 공장은 원료가 부족하여 조업을 중단한다. 강희장은 국내자원을 발굴하여 수입원료를 대체하자고 건의한다. 그는 10여부의 조사연구보고서를 작성하여 간행물에 발표한다. 그리하여 지도자들과 전문가들의 관심을 끌어, 화공부소속회사의 총공정사(책임엔지니어)로 들어간다. 1956년, 다시 상해공업설계원의 총공정사가 되어, 은퇴할 때까지 일한다. 2004년봄, 강희장은 97세의 나이로 사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