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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민국 후기)

오치휘(吳稚暉): 민국제일매장(民國第一罵將)

by 중은우시 2018. 10. 24.

글: 채휘(蔡輝)


"출판계에서, 요 칠년간 2,3부 이상 볼만한 책이 없다....나중에 내가 찾고 찾다가 겨우 오치휘 선생의 <상하고금담(上下古今談)>을 얻어서, 무호로(蕪湖路)로 가져가서 읽었다. 나는 이런 괴현상을 보고는 정말 방성대곡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의 중국인이 배가 고프면, 그래도 죽을 공짜로 나눠주는 곳에서 먹게 해준다. 그러나 머리가 고픈 사람은 정말 먹을 것이 없다."


이것은 호적 선생이 <귀국잡담>에 쓴 말이다. 1917년에 간행된 <신청년>에 발표했다.


<상하고금담>은 일종의 과학보급소설이다. 백화문으로 썼으며, 당시로서는 확실히 뛰어난 작품이다. 그래서 호적이 그것을 높이 평가한 것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지금은 그것을 알고 있는 독자가 이미 많지 않다.


오치휘는 소설로 유명한 사람이 아니다. 그는 나중에 이런 말까지 한다: "문학은 헛소리이다. 철학은 현실을 조화시킨다. 과학이야말로 진실된 말이다." 그리고 "문학이 죽지 않으면 대도(大盜)가 없어지지 않는다."


오치휘는 문학가가 되려고 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호적은 그를 굳이 문학가로 집어넣었다. 심지어 진독수처럼 제멋대로인 인물도 오치휘에게는 예의를 다했다. <신청년> 2원에 오치휘는 <청년과 도구>라는 글을 발표한 적이 있는데, 진독수는 특별히 글의 뒤에 장편의 설명을 덧붙인다: "전체 글에서 글자 한자도 약이 되지 않는 것이 없다. 우리 중국인의 두뇌에는 일찌기 보지 못한 것이다. 독자제군들이 아껴서 읽어보기 바란다. 한줄 한구 한자도 가볍게 넘기지 말기를 바란다."


이렇게까지 겸허하게 적은 것은 아마도 두 가지 원인이 있는 것같다:


첫째, 오치휘는 "민국제일매장"으로 불렸다. 호적, 진독수등은 그의 성세를 빌리고자 했다.

둘째, <신청년>의 주장은 많은 것이 오치휘가 일찌기 얘기한 것이다. 호적, 진독수등은 오치휘를 선각자로 보았다.


오치휘는 일생동안 괴이한 행동을 많이 했다. 세상사람들은 그의 정치적 풍격에 대하여 비판도 많이 한다. 그러나 그는 신문학에 어느 정도 공헌을 핵고, 백화문학의 개척자중 한 명이다.


1865년 음력 이월말, 오치휘는 강소 양호현(陽湖縣, 지금의 무진현)에서 태어난다. 이때 달이 서쪽에서 떴고, 엣날에는 이를 "조(眺)"라 한다. 그리서 "조"를 이름으로 삼고, 자는 "치휘(稚暉)"라 한다.


오씨집안은 대대로 농사를 지었고, 조상이 남겨준 3칸자리 평방과 3무의 전답이 있었다. 오치휘이 부친은 문앞에 작은 차점(茶店)을 열어서 생계를 유지했다. 오치휘가 6살때, 모친이 병사한다. 모친의 나이 경 25살때이다. 매장때 관 속에는 겨우 볏집을 깔았을 뿐이다. 오치휘는 무석의 외할머니집에서 자라는데, 사랑을 많이 받았다. 성격은 장난을 좋아해서, 어렸을 때 자주 공부를 빼먹었다.


오치휘는 7살때 사숙(私塾)에 들어갔다, "15,6세때 집안환경이 더욱 궁색해져서 왕왕 굶을 정도였다. 밤에 승상(繩床)에 누우면, 항상 추위가 쇳덩어리같았다." 


23살때, 오치휘는 수재(秀才)가 된다. 25살때 강음(江陰) 남청서원(南菁書院)에 입학한다. 한번은 강음지현이 공묘를 지나면서 가마에서 내리지 않았다. 오치휘는 '비성불법'이라고 보고, 동료학생과 돌을 던져서 맞츤다. 얼마 후, 강소학정(江蘇學政) 양이(楊頤)가 기생을 끼고 화방(畵舫)을 탔다. 오치휘는 밖에 장포를 걸치고 안에는 바지를 입지 않고서, 배에 올라가 양이에게 술을 내려달라고 부탁한다. 그리고 고의로 넘어져서 사람들의 웃음을 산다. 양이는 분노하여, 서원에서 오치휘를 제명하게 한다.


27살때, 오치휘는 무석현성(無錫縣城)으로 가서 향시(鄕試)를 친다. 누군가 그는 "무석사람이 아니다'라고 고발한다. 그리하여 시험장에서 쫓겨난다. 오치휘는 할 수 없이 원적지로 돌아가서 응시하고, 합격하여 거인(擧人)이 된다. 오치휘는 나중에 농담으로 말했다. 글은 잘 못썼는데, 시험지 첫머리에 자기가 잘하는 전서로 썼다고. 아마도 주시험관이 글자를 다 못알아보고, 서예실력은 괜찮으니 뽑아준 것일 거라고.


그 후에 오치휘는 무석인이라고 자칭한다.


1892년, 28살의 오치휘는 북경으로 가서 회시에 응시하나, 낙방한다. 그후 몇번 과거에 응했으나 모두 낙방했다. 1895년, 강유위는 '공거상서(公車上書)"를 발동하는데, 오치휘도 이름을 넣는다. 그러나 그는 이때 유신파가 아니었다.


1897년, 친구의 소개로, 오치휘는 천진북양학당 철로반으로 가서 국문을 가르친다. 월급은 30대양이었다. 겨울휴가때, 오치휘는 북경 남해회관으로 강유위(康有爲)를 찾아간다. 두 사람은 평생 이때 딱 한번 만났을 뿐이다.


과거에 낙방하고, 오치휘는 각 학교를 전전하며 글을 가르친다. 한번은 채원배(蔡元培)와 동료가 된 적도 있다. 채원배는 오치휘가 일을 하는데 항심이 없다(無恒心)고 하여 그에게 '오불항(吳不恒)'이라는 별명을 지어주다. 오치휘는 그래서 이름을 오경항(吳敬恒)으로 바꾼다.


1901년, 오치휘는 일본에 단기유학하고, 9개월만에 돌아온다. 다음 해, 그는 26명의 학생을 데리고 일본에 간다. 그 자신은 홍문학원(弘文學院, 일본 최초의, 중국유학생을 전문으로 가르치는 학교)에 들어가 공부한다.


얼마 후, 노신(魯迅)도 홍문학원에 입학한다. 그리고 오치휘가 강연을 한다는 말을 들었다. 노신은 이렇게 기록했다: "머리에 백사포를 두른 사람을 보았다. 무석사투리로 자리를 가득채운 영용한 청년들에게 강의를 했다. 부지불식간에 숙연해졌다. 그러나 듣다보니, 그가 이렇게 말했다. '나는 여기서 할망구를 욕하는데, 할망구는 분명히 거기에서 나 오치휘를 욕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자 강연을 듣던 사람들이 가가대소한다. 그래서 흥미를 잃었다. 유학생들이 마치 무슨 웃고 장난치는 것같았기 때문이다. '할망구'는 분명히 청나라의 서태후를 가리키는 것이다. 강연에 웃고 욕하는 것이 들어갈 수는 있지만, 무료한 농담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고, 오히려 해만 된다."


이때 오치휘는 바로 청정부 주일공사 채균(蔡鈞)과 '대전(大戰)'을 벌이고 있었다. 뉴원(鈕瑗)등 9명의 유학생이 성성군관학교(成城軍官學校)에 입학하여 배우려고 했는데, 채균이 담보를 해주지 않아 학교에 입학할 수가 없었다. 오치휘는 글을 써서 공격했다. 심지어 20여명의 유학생을 데리고 공사관내에서 수일간 정좌(靜坐)하기도 했다. 결국 채균은 일본경찰에 통지하여, '치안방해죄'로 오치휘를 강제로 쫓아낸다.


일본경찰이 오치휘를 체포하여 천황의 궁을 지날 때, 오치휘는 호성하(護城河, 御溝)에 뛰어들어 자살하려 하나, 일본경찰이 구해준다. 채원배는 당시 일본에 있었는데, 급히 달려와서 오치휘를 귀국시킨다.


상해로 돌아온 후, 오치휘는 채원배와 애국학사(愛國學社)를 조직한다. 채원배가 총리가 되고, 오치휘가 총감이 된다. 다음 해, 채원배의 초청을 받아, 장태염(章太炎)도 가입한다. 학사에는 장사쇠(章士釗), 마군무(馬君武), 황염배(黃炎培), 소력자(邵力子), 유아자(柳亞子), 이숙동(李叔同)등 학자가 모여들었다. 그리고 추용(鄒容)도 있었다.


얼마 후, 오치휘와 장태염은 경비문제로 충돌이 일어난다. 오치휘는 추용을 좋아하지 않았는데, 장태염은 추용을 지지했다. 그리하여 갈등이 격화된다. 바로 이 때, 애국학사의 기관보 <소보(蘇報)>는 광서제(光緖帝)에 대하여 "재첨소아(載湉小兒), 불변숙맥(不辨菽麥)"(재첨(광서제의 이름) 어린아이가 숙맥을 구분못한다)이라는 글을 싣는다. 청나라조정은 진노한다. 장태염, 추용이 전후로 감옥에 갇히고, 이 사건을 처리하는 강서후보도 유명진(兪明震)은 장사쇠의 스승이었는데, 암중으로 채원배, 오치휘를 풀어준다.


오치휘가 영국으로 도망갔을 때, 이미 40세였다. 런던에서, 손중산이 주동적으로 오치휘를 찾아온다. 오치휘는 그 후에 손중산의 충실한 추종자가 된다. 1906년, 오치휘는 프랑스로 가고, 장정강(張靜江), 이석증(李石曾)과 <신세기>주간을 발행한다.


1907년 3월, 장태염은 일본에서 <추용전>을 쓴다. 그리고 오치휘가 당시 청나라조정에 추용을 팔아먹었다고 말한다. 오치휘는 대노하여, <신세기>에서 장태염과 논전을 벌인다.


작가 조취인(曹聚仁)은 이렇게 말한다. 19세기말, 중국은 3대산문가를 배출했는데, 장태염은 전아(典雅)함으로, 양계초는 창달(暢達)함으로, 오취휘는 분방(奔放)함으로 유명하다.


논전에서, 장태염은 오치휘를 "강유위 문하의 소리(小吏), 성선회 학교내의 양노(洋奴, 오치휘는 성선회가 만든 남양공학에서 가르친 바 있다)"라고 하면서, 오치휘가 일본에서 물에 몸을 던진 것은 "깊은 골짜기에 몸을 던지지 않고 양구에 몸을 던져, 눈과 얼굴이 물밖으로 나왔다"고 했다. 그러나 장태염의 제자인 노신도 어구는 협소하지 않다고 지적한다. 그래도 노신은 오치휘가 밀고했다는 것은 계속 믿었다.


오치휘는 장태염이 청나라조정 고위관리 단방(端方)에서 서신을 써서, 돈을 주면 혁명을 포기하겠다고 한 것을 가지고 이렇게 욕한다: "그(장태염)는 신속하다. 마치 바지를 벗는 것처럼. 구슬도 버려두고" 그리고 일단 기회만 생기면, "신발을 벗어 그의 아가리를 17.8번 치겠다"고 말한다.


결과로 보면, 오치휘가 우세를 점했다.


장태염,오치휘의 논전은 감정적인 부분이 많아서 교훈으로 삼을만한 것이 못된다. 그러나 이때의 백화문은 아직 유치한 수준인데, 오치휘는 글쓰면서 독특한 풍격을 드러낸다.  


1920년대에 이르기까지, 오치휘는 항상 노신과 나란히 거명되었다. 고장홍(高長虹)은 이렇게 말했다; "<성사(性事)>는 가장 잘 팔리는 책이다. 오치휘, 노신의 저작이 그 다음으로 잘 팔리는 책이다."


오치휘는 시평을 적는 걸 좋아했다. 그의 글은 규칙이 없고, 속자도 피하지 않으며, 통쾌하고 시원시원했다. 그는 청나라황제를 "축생(畜生)"이라고 불렀고, 장지동(張之洞), 원세개(袁世凱)를 "구두명사(狗頭名士)"라고 불렀으며, 보수황족을 "장백산중야구(長白山中野狗)"라고 부르고, 청나라조정의 아래 위를 모조리 "적황구신(賊皇狗臣)"이라고 불렀다. 강유위, 진보침(陳寶琛)은 "또 다른 사기술을 지닌 깡패로 낮에는 웅크리고 있다가 밤에만 나타난다"고 했다.


진원(陳源)은 오치휘를 '이십년동안 가장 흠패(欽佩)하는 인물"이라고 했다. "그의 대담한 정신과, 앞에도 없었고 뒤에도 없을 기개, 유머와 장엄한 태도는 모두 개인적으로 독보적인 것이다."


자신이 문풍에 대하여, 오치휘는 젊었을 때 본 적이 있는 <하전(何典)>을 들었다. 이 책은 첫머리에 이렇게 쓰여 있다: "하늘과 땅을 논하지 않고, 문자를 씹을 줄 모르고, 그저 헛소리만 하면서, 세상사람들에게 속임수나 쓰고 아부나 한다면 정말 어찌 그럴 수가 있을까."


<하전>은 청나라 가경연간에 만들어 졌고, 오(吳)지방의 방언으로 쓰였다. 오치휘는 이 책이 그로 하여금 활연개랑(豁然開朗)하게 만들었다고 말하는데 약간 과장될 수는 있겠다. 오치휘는 입만 열만 자신은 문학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하는데, 그러나 그가 1907년에 쓴 일기를 보면 그는 여러번 '소설을 읽고' 또한 '음서소설의 해를 놓나는데 미친 것같았다.'


오치휘의 글은 겉으로 보기에 저속하고 비루하지만, 암중으로 큰 노력을 들인 것이다. 주작인(周作人)은 <중국신문학대계.산문>을 편찬하면서, 오히취를 단독으로 일가로 분류했다. "그가 <신세기>에서 발표한 묘문(妙文)은 읽어본 사람은 누구든지 잊을 수가 없다. 그의 이런 특별한 이야기법과 작문법은 아쉽게도 지금 아무도 전해받지 못했다."


오치휘가 문장에서 암함(暗含)한 실력은 무엇일까> 그것은 그가 시대를 앞선 사상이 있었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사람들은 전현동(錢玄同)이 가장 먼저 "한자를 없애자'고 주장한 것으로 알고 있지만, 기실 오치휘가 파리에 있을 때 이렇게 말했었다: "한자는 불유불음(不惟不音)하고 배인(排印)에 불편하고, 검자(檢字)도 불편하다. 문명을 전파하는데, 일을 기술하고 정리하는데 크게 장애가 있다." 그리고 '중국문자는 언젠가 반드시 폐기된다"고 하면서 세계어를 쓸 것을 주장했다.


전현동의 주장은 오치휘의 주장을 그대로 베낀 것이다. 노신이 나중에 이런 말을 한다. "한문은 언젠가 폐지된다" 역시 오치휘와 같다.


1912년 8월, 민국교육부는 주음(注音)자모를 채용하기로 결정한다. 그리고 '독음통일회'를 조직하여 전문적으로 연구한다. 노신, 오치휘는 모두 거기에 참여한다. 두 사람은 모두 한자라틴화를 주장하나 주류의견이 되지는 못한다. 아마도 장태염-오치휘논전으로 노신은 고의로 오치휘를 피한 것같다.


1925년, 노신은 <청년필독서>에 대한 질문에 대한 대답에서 이렇게 말한다: "나는 중국책은 적게 보거나 아예 보지 않고, 외국책을 많이 봐야한다고 생각한다."


기실, 일찌기 1923년 2월 <청화주간>의 기자가 호적, 양계초에게 서신을 보내어, 그들에게 유학을 떠나는 청화대학 학생들에게 "최소한도의 국학서목(國學書目)"을 적어달라고 한다. 서목이 세상에 알려진 후, 오치휘는 즉각 글을 써서 공격한다. 명확하게 "중국책은 읽지 말라"는 구호이다.


1923년 7월 23일의 <신보부간>에 오치휘는 <잠양팔고화(箴洋八股化)의 이학(理學)>이라는 글을 발표하여, 중국책을 "화장실에 삼십년간 버려두고, 지금은 무미건조한 물질문명을 고취시키자; 그들이 기관총으로 우리를 공격하면, 우리도 기관총으로 맞서야 한다. 중국을 붙잡아 세운 후에, 다시 중국것을 정리해도 전혀 늦지 않다."


<신세기>와 <신청년>를 대비하면, 후자의 많은 주장은 전자에서 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장몽린(蔣夢麟)이 오치휘를 중국학술계에서 사방으로 빛을 밝히는 혜성이라고 칭찬한 것도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여사대풍조(女史大風潮)"에서 오치휘는 노신이 편에 선다. 그리하여 북양정부의 50면반대자 며안에 들어간다(오치휘는 3번째, 노신은 21번째 이름을 올린다)


저명한 학자 양천석(楊天石)은 일찌기 1920년에 주건인의 부법근공검학(赴法勤工儉學)을 돕기 위하여, 노신이 채원배에게 서신을 써서, 그에게 오치휘에게 부탁해달라고 요청했다. 오치휘는 근공검학의 발기자이며 조직자이다. 그리고 프랑스에 학교가 있다. 노신은 오치휘가 주건인에게 자리를 안배해줄 것을 바랐던 것이다. 채원배는 두 통의 서신을 오치휘에게 보냈고, 지금까지도 남아 있다. 주건인은 나중에 상무인서관에 채용되고, 프랑스유학계획을 포기하게 된다.


"4.12"정변후 노신과 오치휘는 왕래를 단절한다.


오치휘는 무정부주의를 주장한다. 그는 일찌기 이렇게 말하여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바 있다: "나는 절대로 관직은 맡지 않겠다. 그러나 국가는 반드시 관여하겠다."  항전때, 국민정부 주석 임삼(林森)이 병사하자, 여러 사람들이 오치휘로 하여금 주석직을 맡도록 추천했다. 그러나 오치휘는 화난 것처럼 가장하며 이렇게 말한다: "중국에는 오직 장총재만이 중국군민의 왜구에 대한 저항을 영도할 수 있다...그의 웅재대략이 있는데, 누가 그보다 더 적합하단 말인가?"


생활문제에서 오치휘는 제맘대로이고, 괴이했다. 여름에 집에 있을 때, 그는 아무 것도 입지않았다. 그는 집에서 손님을 맞이하는 것을 싫어했고, 문앞에 이런 글을 붙이다: "오치휘는 집에 없음." 어떤 사람이 문앞에서 그를 우연히 만나서 인사하면, 오치휘는 이렇게 말하곤 했다: 사람 잘못 봤습니다. 나는 오치휘의 형입니다.


한번은 오치휘가 병을 앓았다. 명의 진존인(陳存仁)이 집으로 찾아가서 진맥을 했다. 그는 오치휘의 집이 '누추'한 것을 본다. 오치휘는 그를 보자마자 이렇게 말한다: "의사는 모두 우두마면(牛頭馬面)이다. 염라대왕의 방조자들이다." 그리고 '약을 먹지 않겠다" "약을 잘못 먹으면 오히려 목숨을 잃을 수 있다"고 선언한다.


오치휘가 이렇게 한 것은 아마도 스스로를 보호하려는 일종의 연기였을 지도 모른다. 1953년, 오치휘는 병사하니, 향년 89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