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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민국 후기)

항송무(項松茂): 민국시대 유니레버와의 비누대전에서 승리하다.

by 중은우시 2019. 3. 25.

글: 근대사화(近代史話)





비누는 일상생활에서 자주 쓰는 필수품이다. 이 생활필수품은 중국에서도 유구한 역사를 지니고 있다. 일찌기 송나라때 중국에는 비누가 나타났다. "비조단(肥皂團)"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현대의 비누는 서방에서 건너온 것이다. 민국초기, 중국에서 비누제조는 신속히 발전한다. 광저우(廣州), 한커우(漢口), 칭다오(靑島), 다롄(大連)등지에 유명한 비누제조기업들이 있었다. 그러나 비누제조업의 중심은 역사 상해(上海)였다.


제1차세계대전이 끝난 후, 중국인이 경영하는 오주약방(五洲藥房)은 독일인이 창립한 상해고본조창(上海固本皂廠)을 인수하여, 중국신약업의 선구자인 항송무는 1921년 오주고분조창(五洲固本皂廠)을 설립한다. 외국기술자들을 그대로 채용하여 품질을 대거 개선한다. 그리하여 이 공장에서 생산된 고본표 비누는 수입품보다 품질이 나았다.


1925년, 오주고본조창은 다시 중화흥기향조창(中華興記香皂廠)도 인수하여, 투명비누등 여러 제품을 추가한다. 이 공장은 중국내 최대의 비누제조공장이 된다. 오주공장의 제품은 전후로 미국 샌프란시스코엑스포의 은상과 일본동경다이쇼(大正)박람회에서 3등상을 받는다.


1928년, 오주는 50만원을 들여 은산회사(銀産會社, 지금의 그룹내의 투자회사와 유사함)를 설립하여 회사내에서 회계독립되고, 손익을 스스로 부담하는 부서를 만든다. 회사자본금총액은 다시 150만원으로 증자된다. 직원은 최초의 30여명에서 매년 늘어나서 400명에 이른다. 오주의 사업이 커지면서, 항송무는 비누제국을 형성한다. 항송무 본인은 '비누대왕'이라고 불리게 된다.


오주의 발전은 당시 상해탄의 비누시장 패주였던 영국상인 상무(祥茂)비누(지금의 유니레버)를 심각하게 위협하게 된다. 쌍방은 격렬하게 싸움을 벌이고, 오주는 일거에 유니레버를 격패시킨다. 그리하여 오주비누는 당시 가장 유명한 인기상품이 된다. 그럼 이때의 비누대전을 좀더 상세히 알아보기로 하자.


이 비누대전의 한쪽은 세계적인 다국적기업인 영국 Lever Brothers(지금의 Unilever)이고, 다른 한쪽은 금방 발전하기 시작한 중국의 민족의약기업 오주대약방이었다.


유니레버는 당시 세계에서 손가락에 꼽히는 대기업이었고, 비누공업에서는 더더욱 선두였다. 상해가 개방된 후, 유니레버는 상해에 비누제조공장을 만들고, 소규모 비누공장들을 흡수한다. 그리하여 극동 최대의 비누제조공장으로 성장한다.


오주대약방은 1907년에 설립되었고, 상해의 거상인 황초구(黃楚九), 상무인서관(商務印書館)의 총경리인 하서방(夏瑞芳)등이 출자하여 만들었다. 주요제품은 중국전통의 중약을 이용하여 만드는 각종 보약이었다. 1911년 오주대약방은 항송무를 총경리로 모셔온다.


항송무가 총경리에 오른 후, 한편으로 계속 각종 중약제품을 개발하고, 다른 한편으로 서약쪽을 적극적으로 개척한다. 다만 당시 중국의 서약실력은 박약했다. 설사 오주대약방같은 큰 기업의 경우에도, 그들이 제작하는 서약은 겨우 수입원료를 가지고 가공하는 것일 뿐이었다. 1919년 5.4운동이 일어난 후, 중국에서는 서양제품불매운동이 벌어지고, 국산품애용운동이 벌어진다. 실업구국을 꿈꾸던 항송무는 공장을 지어 서약을 연구개발하여 서약공장들과 경쟁하기로 결정한다.  


당시 마침 독일상인이 서가회(徐家匯)에 만든 비누공장이 매물로 나왔다. 항송무는 신중하게 고려한 끝에, 인수하기로 결정한다. 항송무가 생각한 것은 이 공장의 기계설비가 제대로 갖추어져 있어 구매한 후에 비누를 제조하여 서방기업이 중국내 비누시장을 독점하는 것을 타파할 수 있을 것이라고 여긴 것이다. 그외에, 일부 설비는 약품제조에도 쓸 수 있었다. 비누공장을 매입한 후, 항송무는 바로 오주대약방의 서약제조라인의 인원을 모조리 비누공장에 투입한다. 그리고 공장의 이름을 '오주고본비누공장'으로 명명한다. 이렇게 비누제조와 제약의 두 분야로 나눈다.


다만, 항송무는 비누제조기술을 얻지는 못했다. 비누제조공장의 독일상인은 기계만 팔았던 것이다. 비누제조공법은 엄격하게 비밀을 유지했다. 그리하여, 항송무는 인재를 찾기 시작한다. 화학공업계열의 대학졸업생을 모아서 높은 급여를 주며 비누제조개발을 연구시킨다. 직원의 우려를 막아주기 위하여, 송무소학을 설립하여, 직공의 자녀들이 입학할 수 있게 해준다. 그리고 의료처도 설립하여, 직원들에게 의료서비스도 제공했다.


핵심기술에서 돌파구를 마련하기 위하여, 항송무는 특별히 비누제작부 책임자를 변장시켜, 상해의 유니레버공장에서 9개월간 노동자로 일하게 한다. 여기에서 기술상의 비밀을 얻어낸 것이다. 이렇게 하여 여러 방면의 노력끝에 항송무는 성공적으로 높은 품질의 비누를 제작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이름을 "고본비누(固本皂廠)"라고 부른다.


고본비누가 세상에 나온 후, 최대적수는 자연히 유니레버(당시의 레버 브라더스)의 상무비누였다. 원료에 있어서, 유니레버는 전세계에 재배지를 보유하고 있어서, 품질이 우수한 원료를 싼값에 가져올 수 있었다. 그리고 비누제작의 중요제료인 수산화나트륨에서 유니레버는 영국회사로부터 우대가격으로 공급받고 있었다. 그외에 유니레버가 보유한 재력과 기술은 모두 오주고분비누공장이 필적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항송무의 기본전략은 품질로 이기는 것이었다. 그들이 생산한 고본비누는 겉으로 보기에 단단했고, 색깔이 균일했다. 그리고 때를 씻는 힘도 강했으며, 내구성이 좋았다. 이와 비교하면, 유니레버가 생산한 비누는 외관이 비교적 떨어지고, 때를 제거하는 힘도 약했다. 고본비누의 품질을 증명하기 위하여, 오주고본에서는 특별히 각 판매점에서 현장시범을 보인다. 두 개의 대야에 깨끗한 물을 넣고, 각각 고본비누와 상무비누를 집어 넣는다. 얼마의 시간이 흐르면 상무비누는 녹아버리지만, 고본비누는 여전히 단단함을 유지했다.


고본비누를 이기기 위하여, 유니레버는 가격인하로 덤핑하는 전략을 쓴다. 처음에 고본비누의 가격은 상자당 6원7각이었는데, 상무비누는 5원3각으로 내린다. 비록 상무비누의 가격이 낮았지만, 고본비누는 품질이 뛰어나서 여전히 고객들에게 인기가 좋았다. 부득이 유니레버는 다시 가격을 내린다. 상자당 가격을 점점 내려서 4원4각, 3원까지 내렸다. 이에 대응하기 위하여, 오주대약방은 항송무를 적극 지지하여, 상응하게 비누가격을 내린다. 그리고 오주대약방의 다른 보약을 판 이익을 비누대전에 쏟아붓는다.


민국시기의 중국에서 비누는 아직 신선하고 사치스러운 물건이었다. 당시에 도시에서 사는 화이트칼라나 비누를 사서 쓸 수 있었다. 노신이 1924년에 쓴 <비누>라는 글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사명선생은 거리로 나가 비누를 샀다. 6,7가지를 보았는데, 모두 4각여를 달라고 해서 사지 않았다; 1각에 1개를 주는 것을 보았더니 너무 안좋았고, 향도 없었다. 그래서 녹색의 비누를 하나 샀는데 2각3푼이었다. 그가 집으로 돌아와서 비누를 넷째부인에게 건네주자, 넷째부인은 내심의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아이를 끌어안듯이 그 녹색의 물건을 코 킫으로 가져갔다. 그리고 말했다. "아아. 이건 정말 좋은 비누군요.""


노신의 <비누>라는 글은 마침 비누대전이 벌어지고 있을 때였다. 비록 쌍방이 계속하여 가격을 내렸지만, 시장에서는 일반적으로 2각4푼을 유지했다. 당시의 물가지수로 보자면, 상당히 높은 가격이다. 비누라는 거대한 시장을 점령하기 위하여, 쌍방은 모두 비용을 아끼지 않고 대전을 벌인다.


1925년, 5,30운동이 발발하면서, 중국이들은 외국제품불매운동을 벌이고, 국산품애용운동을 벌인다. 고본비누는 일시에 인기품목이 된다. 밀일 판매량이 500여상자에 이르렀다. 그러나 유니레버의 비누는 팔리지 않았고, 상해에 만든 비누공장이 한때는 문을 닫아야 했다. 고본비누가 잘 팔리자 항송부는 사업을 계속 확대하여, 일련의 비누브랜드를 내놓는다. "항아(嫦娥)", "미녀(美女)"등이다.


항송무는 상전(商戰)을 통하여 민족브랜드를 대거 선전하고 외국제품을 막았을 뿐아니라, 스스로 모범을 보여 각종 애국운동에도 참가한다. "1.28"송호항전이 발발한 후, 오주대약방의 제2지점이 전선에 위치해 있었다. 일부 남아있던 점원은 일본군의 수색시에 의용군복장을 하고 있다가 체포된다. 항송무는 앨본해군육전대의 사령부를 찾아가서 교섭을 벌였는데, 결과는 점원들과 함께 항송무도 일본군에 총살당하고 만다. 향년 52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