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민국 후기)

장학량(張學良)의 여섯 자매들....

중은우시 2016. 1. 31. 00:06

글: 추월랑(秋月朗)


장학량에게는 형제자매가 많았다. 비록 부친은 1명이지만, 모친은 여러명이었다. 부친 장작림(張作霖)은 53살까지 살면서 6명의 부인을 두었고, 모두 8남6녀를 낳는다. 여기에서는 그의 여섯 명의 딸에 대하여 쓰리고 한다: 장수방(張首芳), 장회영(張懷英), 장회경(張懷卿), 장회동(張懷瞳), 장회희(張懷曦)와 장회민(張懷敏).


장녀 장수방. 일명 장관영(張冠英). 1898년생. 장학량의 누나이고, 장작림과 본부인 조춘계(趙春桂)의 사이에 태어난 외동딸이다. 장작림의 첫째 자식이기도 하다. 모친이 죽었을 때 장학량은 12살이고, 장수방은 15살이었다. 장학량, 장학명(張學銘)은 모두 장수방이 돌보았다. 장수방은 장작림에 의하여 흑룡강독군 포귀경(鮑貴卿)의 아들인 포영린(鮑英麟)에게 시집보낸다. TV드라마 <소수(少帥)>에 나오는 것처럼, 장수방은 부친에게 50만을 내놓으라고 한다. 부친이 결혼상대방을 마음대로 정하는 댓가로. 장작림이 사망한 후, 포영린은 이혼하자고 한다. 그러나 전통적인 장수방은 이혼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포영린은 그래도 새로 부인을 취하여, 장수방은 평생 우울하게 지낸다. "9.18"사변후, 장수방은 장학량을 따라 이곳저곳을 떠돈다.


서안사변후 장학량이 구금되면서, 오누이는 한때 헤어지게 된다. 1947년 1월, 그녀는 돌연 동북군 원로 막덕혜(莫德惠)가 남경에서 그녀에게 전달해준 장학량의 친필서신 한 통을 건네 주었다. 이때 장학량은 이미 대만에 연금되어 있었다. 서신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나는 여러해 이래 정신이 아주 좋고, 신체도 나쁘지 않다. 오직 눈이 약간 침침하다. 아마도 요 몇년동안 기름등 아래에서 글을 본 때문인 것같다.....나는 걱정하지 마세요. 특히 신체는 내 스스로 나 자신을 돌볼 겁니다. 누님이 보내주신 것은 감사합니다. 나는 알고 있습니다. 누님도 여유롭지 못하다는 것을. 다음에는 물건을 보내지 마세요. 돈은 남겨서 아이를 위해서 쓰세요. 다가오는 새해 복많이 받으세요, 큰동생 량 올림." 설날이 지나자 장수방은 대만으로 장학량을 보러 가기로 결정한다. 그러나 장개석이 허락하지 않았다. 1947년 5월, 막덕혜가 허가를 받아 대만으로 간다. 장수방은 즉시 약간의 생활용품을 준비했다. 그녀와 전체 가족의 수십폭 사진과 1통의 가서를 막덕혜를 통해 동생에게 보낸다. 5월말, 막덕혜는 다시 장학량의 친필서신을 가지고 온다. 서신에서는 <명사(明史)> 한부를 보내달라고 한다. 서안에서는 그가 원하는 판본을 구할 수 없어서, 그녀는 특별히 북경까지 가서, 상무인서관이 출판한 정장본 <명사>를 사서, 유지로 잘 포장한 후, 막덕혜가 알려준 대만의 주소로 부쳐준다.


신중국이 성립된 후, 장수방은 북경에 정착한다. 수입원이 없어서 생활이 한때 아주 곤란했다. 주은래 총리가 그 소식을 들은 후, 특별히 주택 하나를 제공하고, 장수방에게 정기적으로 보조금을 지급하여, 말년을 편안히 보낼 수 있게 해준다. 장수방은 2남3녀를 낳았고, 1954년 북경에서 병사한다. 향년 56세였다.


차녀 장회영. 1907년생. 둘째부인 노수훤(盧壽萱) 소생. 장작림은 그녀를 몽골다르칸친왕의 아들에게 시집보냈다. 그는 정신병이 있었고, 아주 거칠어서 장회영은 여러해동안 고통을 겪는다. 그래서 자주 친정으로 돌아와서 지냈다. 장작림이 황고둔에서 폭약에 사망한 후, 장학량이 나서서 이 혼인을 해소시키고, 장회영은 다시 진록의 아들 진우도와 결혼한다. 자녀는 없고, 사망년도는 미상이다.


삼녀 장회동. 넷째부인 허주양(許澍暘) 소생이다. 그녀는 동삼성총독, 청사관관장 조이손(趙爾巽)의 막내아들 조천사(趙天賜)에게 시집을 갔다. 결혼후 부부 두사람은 화목했다. "77사변"후 온 가족이 미국으로 이주하고, 행복하게 살았다.


사녀 장회경. 1911년생. 차녀 장회영과 마찬가지로 둘째부인 노수훤 소생이다. 결혼도 장회영과 같은 길을 걷는다. 그녀가 시집을 간 곳은 청나라황실복벽을 꾀했던 변발군사령관 장훈(張勛)의 아들 장몽조(張夢潮)이다. 장몽조는 신경관능증을 앓고 있었고, 두 사람은 사이가 좋지 않았다. 장학량이 동북군을 물려받은 후 앞장서서 이 결혼을 해소시킨다. 그리고 차례로 악민열(岳民烈), 강병옥(姜秉玉)에게 시집가서, 아들 악흠요와 딸 악흠란, 강배민, 강배령을 낳는다. 신중국성립후 계속 천진에 거주하며, 천진시 정협위원도 역임한다. 1990년 6월 5일, 장학량고거진열관 장학량탄생90주년기념활동에 참가한다. 그리고 '북수강녕(福壽康寧)' 네 글자를 쓴다. 1992년, 천진에서 사망한다. 향년 81세이다


오녀 장회희. 1913년 심양에서 출생. 삼녀 장회동, 넷째동생 장학사와 같이 넷째부인 허주양의 소생이다. 일찌기 북양정부총리 근운붕(靳雲鵬)의 아들과 혼약했으나, 성혼은 못했다. 장작림이 죽은 후, 장학량이 나서서 이 결혼을 취소시킨다. 1935년, 장학량은 당시 영국에 있던 부인 우봉지(于鳳至)를 통하여 장희희를 영국 캠브리지대학에 유학보낸다. "서안사변"이 발발한 후, 장학량은 구금되고, 우봉지는 귀국하여 장학량 구명활동을 한다. 그러나, 당시 영국에서 중고등학교를 다니던 세 아들은 나이가 아직 어려서 런던에서 독립적으로 생활할 수 없게 되자, 24살의 장회희가 장학량의 세자녀를 돌보는 책임을 맡게 된다. 1940년 봄, 우봉지는 병이 들어 미국으로 가서 치료받는다. 1941년 가을, 장회희도 미국으로 가서 워싱턴에 정착하고, 결혼후 자식을 낳아, 생활이 안정된다. 장회희는 일찌기 대만으로 가서 오빠를 만나고자 했으나 대만당국이 허용하지 않아서 실현되지는 못했다. 1991년, 장희희는 아들 장영기를 심양대수부로 보내고, 장영기는 모친을 대표하여 글을 남긴다: "고향 어르신들이 아직 장장군을 기억해주는데 감사드립니다." 사망연도는 미상이다.


육녀 장회민. 1924년 심양에서 출생. 여섯째부인 마악청(馬岳淸) 소생. 장작림의 막내딸이고, 장학량의 막내여동생이다. 장작림이 죽었을 때, 그녀는 나이가 겨우 4살이었다. 심양이 함락된 후, 모친을 따라 천진으로 간다. 1947년 보인대학을 졸업하고, 전 봉천성장 적무선의 손자인 적원곤에게 시집간다. 2남1녀를 낳아 기른다. 아들 적노평, 적운대, 딸 적해제이다. 1948년 마월청을 따라 대만으로 간다. 대만 동해대학에서 가정과 교수를 지낸다. 교직에 있는 동안, 미국 캘리포니아대학 가정과의 통신교육을 받고, 1951년에 졸업한 후 부교수로 승진한다. 1955년에는 교수로 승진한다. 장학량이 대만으로 온 후, 장회민은 허가를 받아 장학량 비서의 신분으로 북투의 그 군통이 여전히 감시하는 신비한 건물을 드나든다. 오빠가 좋아하는 음식을 가져다 주고, 그에게 신문도 읽어주고, 친구들에게 보내는 서신을 대신 써주기도 한다. 장학량이 대만에서 연금되어 있는 가장 곤란한 시기에 그녀가 자주 가서 만났고, 그것은 장학량에게 가장 큰 위안이 되었다. 2008년 12월,심양의 장씨대수부박물관의 직원이 대만 신죽현으로 가서 장학량고거 개관의식에 참가한다. 거기서 84살의 장회민을 만난다. 장회민은 정신이 또렷하고, 흥이 넘쳐서 대만에서 장학량과 지낸 이야기들를 해주었고,기회가 되면 대수부를 다시 방문하겠다고 말한다. 2014년 9월, 신죽의 장학량고거 수리공사가 완공된다. 90세의 장회민도 가서 참관한다. 그녀는 장학량의 자매중 유일하게 건재한 사람이었다.


장학량의 자매들의 혼인은 부친이 정략결혼시켰다. 대부분은 정치적 목적을 가졌고 이는 자매들의 생활에서 누구는 행복하고 누구는 불행한 결과를 가져왔다. 다행히 장학량이 자주 그녀들을 위해서 나서서 이혼을 시켜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