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민국 후기)

장신부(張申府): 복잡난언(複雜難言)의 일생

중은우시 2018. 10. 24. 13:32

글: 하신(何新)


장신부(1893-1986), 원명 장숭년(張嵩年), 자는 신보(申甫). 현대철학가 장대년(張垈年)이 형. 1893년 6월 15일 하북 헌현(獻縣)에서 출생.


그는 중국공산당 초기조직의 3대 주요 창시자중 한 사람이다.


1908년, 장신부는 순천고등학당 중학반에 입학하고, 1913년 북경대학에 입학한다.


북경대학에서, 장신부는 복잡하고 재미있는 학습경력을 보여준다. 그는 막 북경대학에 들어갔을 때, 예과반에서 수리(數理)를 공부한다. 다음 해, 북경대학에 시험칠 때, 장신부는 수학에 흥미를 가졌다. 그러나 그는 당시 예과를 아직 졸업하지 못했다. 규정대로라면 졸업증서가 없으면 북경대학 문과에만 시험칠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먼저 문과인 철학과에 들어간다. 몇주 정도 공부한 후 다시 이과인 수학과로 옮긴다. 철학과를 떠나고나서, 그는 돌연 철학에 농후한 흥미를 나타낸다. 특히 루소의 분석철학은 그의 흥미를 크게 끈다. 이때부터 장신부는 철학, 수학과 뗄레야 뗄 수 없는 인연을 맺게 된다.


1917년, 장신부는 조교의 명의로 북경대학에 남아서 일을 한다. 예과수학과 논리를 가르쳤다. 그리고 여기서 이대쇠(李大釗)을 알게 된다. 이때 진독수(陳獨秀)는 북경대학 문과학장을 맡고 있었고, 자주 이대쇠의 집으로 갔다. 그래서 장신부와 진독수도 점점 알게 된다. 이대쇠는 당시 북경대학 도서관주임이며, 업무로 비교적 바빴다. 그래서 장신부에게 등록실의 일부 업무를 맡긴다. 이대쇠가 떠날 때, 장신부는 북경대학 도서관의 대리주임이 되어 있었다.


1918년, 모택동이 북경대학 윤리학과 교수인 양창제(楊昌濟)의 소개로 도서관 등록실에서 일을 하게 된다. 장신부의 부하로 일했다. 장신부는 태산을 알아보지 못했고, 모택동에게 일을 엄격하고 가혹하게 시켰다.


장신부는 나중에 이렇게 회고한다: "그때는 5.4시기이다. 모택동은 내 부하로 일을 했다. 해방후, 그는 도처에 다니면서 '장신부 보스의 얼굴은 아주 찡그러져 있었다'고 말하곤 했다. 왜냐하면 그는 내가 그에게 한번은 도서관의 카드를 다시 채우게 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모택동은 북경대학 도서관에서 일했던 기간에 대한 인상이 아주 깊었다: "나는 대학도 다니지 못했다. 나는 그저 중학교를 졸업했고, 북경대학 도서관에서 하급직원으로 일했다. 1개월에 8원대양. 장신부는 나의 직속상사였다."


1918년 겨울, 이대쇠, 진독수는 공동으로 <매주평론>을 창간한다. 장신부는 편집을 책임진다. 그는 동시에 <신청년>의 편집위원도 맡았다. 그리고 소년중국학회와 신조사의 단원이기도 했다.


장신부는 중국에 처음으로 루쏘, 로망 롤랑등 서방 당대의 사상가들을 소개한다. 전후로 <신청년>등 잡지에 루쏘의 여러 글을 번역해서 싣는다. 그리고 그의 철학사상을 소개하여 당시에 널리 영향을 미친다.


장신부는 루쏘의 각종 저작을 계통적으로 연구했고, 루쏘주의를 선전하고 연구했다. 나이 겨우 25살에 이미 루쏘 전문가가 된다. "羅素"라는 번역어도 그의 작품이다. 루쏘는 일찌기 프랑스의 한 친구에게 서신을 보내면서 이렇게 말했다: "중국의 장신부 선생은 나보다 나의 저작을 잘 이해하고 있다."


1920년 8월, 진독수는 공산당 창당을 준비하고, 조직명칭을 확정하기 위하여, 진독수는 이대쇠, 장신부에게 보낸 서신에서 이렇게 말한다: "창당의 일은 너와 수상(守常, 이대쇠)와만 얘기할 수 있다." 이를 보면, 장신부는 당시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했는지 알 수 있다.


1920년 10월, 이대쇠, 장신부, 장국도(張國燾)는 북경대학 도서관에서 공동으로 중국공산당 북경초기당조직을 결성하고, 장신부는 공산당 최초의 창시자중 한 명이 된다.


장신부는 공산당의 초기 창건업무에 참여했을 뿐아니라, 당시에 "남진북리(南陳北李, 남쪽의 진독수, 북쪽의 이대쇠)"간을 오가며 연락하는 사람이었다. 중국공산당의 건당에 큰 공헌을 했다. 공산주의의 신앙자로서, 장신부는 공산당전신의 최초창시자중 한 사람이다.


당시 북경공산주의소조의 두 창시자인 이대쇠와 장신부는 당원을 발전시킬 준비를 한다. 그들은 먼저 유청양(劉淸揚, 나중에 장신부의 처가 된다. 천진학생운동과 각오사의 우두머리이고, 장신부는 그녀를 통하여 주은래를 알게 된다)을 눈독들인다. 그러나 유청양은 장신부의 구혼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들이 나중에 발전시킨 세번째 당원은 장국도이다(일설에는 유청양이 장신부에게 동의하지 않은 것은, 그들의 발전대상에서 그녀의 명단 뒤에 장국도가 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당시 장국도는 유청양을 열렬히 추종했고, 한동안 유쾌하지 않은 연정이 있었다).


1920년 겨울, 장신부는 채원배 비서의 명의로, 프랑스에 가서 공부한다. 이석증(李石曾), 오치휘(吳稚暉)등은 프랑스 파리에서 리앙중법대학을 만든다. 장신부는 거기에서 논리를 가르친다. 그가 프랑스로 가려는 것을 알고, 이대쇠, 진독수는 국내에서 그에게 프랑스에 도착한 후 계속하여 당원을 발전시키고 당조직을 건립할 것을 부탁한다.


프랑스에서 안정된 후, 장신부는 1921년초에 동행한 여자친구 유청양을 입당시킨다. 얼마 후, 다시 나중에 도착한 당원 조세염(趙世炎), 진공배(陳公培)와 파리에서 공산당조직을 결성한다.


장신부보다 먼저 파리에 도착한 주은래는 원래 런던에서 유학하려고 했다. 런던에서 한동안 머문 후, 그곳은 생활비가 너무 비싸다고 여겨져서 다시 파리로 돌아온다.


나중에 주은래는 그의 친구인 유청양과 장신부가 파리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래서 급히 그들을 찾아간다. 그리하여 장신부는 주은래를 혁명으로 인도한 사람이 된다. 그리고 주은래가 초기에 정계에서 신속히 성장할 수 있도록 도운 핵심인물이기도 하다.


1922년 여구(旅歐)중국소년공산당이 성립된다. 장신부는 당시 큰형님의 신분이어서, 그가 성립대회에 참가하지는 않았지만, 자주 그들에게 명령을 내렸고, 이는 많은 구성원들의 불만을 산다. 1923년, 파리의 소년공산당은 장신부를 제명하기로 선포한다.


1924년 귀국후, 장신부는 황포군관학교의 설립준비업무에 가담하고, 장개석의 독일어통역을 맡는다. 그는 중국공산당에서 초기군사업무에 종사한 당원중 한 명이다.


1924년 5월, 손중산은 장신부를 황포군관한교 정치부 부주임에 임명한다. 당시 중국공산당원중 황포군관학교에서 가장 높은 직위를 맡고 있었다. 장신부는 황포군관학교 제1기 학생의 구술시험, 필기시험의 감독과 시험채첨업무도 맡았다. 황포 1기생들은 모두 그의 제자라 할 수 있다.


장신부는 주은래에게 태산과도 같은 은혜를 베푼다. 그는 주은래를 위하여 유럽에서 중국으로 귀국하는 경비를 마련해 주었고, 그를 황포군관학교 정치부 주임의 자리에 앉혀주었다. 그리고 그를 정치무대로 올려보낸다. 장신부는 주은래에 대하여 이렇게 평가했다: "나는 꺽일지언정 굽히지는 않는 사람이다. 그러나 주은래는 다르다. 그는 굽으면서 꺽이지 않는 사람이다."


1926년이후, 장신부는 중국공산당을 탈당한다. 탈당이후, 장신부는 교육과 번역저술로 살아간다. 전후로 기남대학, 대륙대학, 대하대학, 중국대학, 북경대학, 청화대학등에서 교편을 잡는다. 그가 가르친 것은 루쏘철학과 논리였다.


당시의 철학계에서 듀이의 실험주의철학을 주로 소개하는 사람은 미국유학갔던 호적(胡適)이었고, 베르그송의 생명철학을 주로 소개하는 사람은 독일유학한 장군려(張君勵)였고, 헤겔철학을 주로 소개하는 사람은 미국,독일에 유학했던 하린(賀麟)이며, 루쏘의 신실재론철학을 주로 소개한 사람은 프랑스에 유학했던 장신부였다.


1931년, 장신부는 청화대학의 철학교수로 부임한다. 거기서 논리학과 서양철학사를 가르쳤다. 풍우란(馮友蘭), 김악림(金岳霖), 등이칩(鄧以蟄)의 3명 교수와 더불어, 철학계의 "4대금강"이라고 불리웠다.


1935년 겨울, 장신부는 유청양등과 공동으로 북경의 "12.9"운동을 일으키고 이끌고, 시위총지휘를 맡는다. 1936년 2월, 장신부와 유청양은 동시에 체로되고, 안정문내의 육군감옥에 2개월간 갇혀 있는다. 나중에 풍옥상(馮玉祥)이 보석으로 풀어분다. 출옥후, 청화대학은 당국의 압력으로 장신부를 해임한다.


1936년 1월, 북경문화계에 구국회가 성립된다. 장신부는 대회주석단의 구성원 및 구국회의 집행위원으로 선임된다. 나중에는 화북각계 구국회의 책임자가 된다. 그는 애국진보교수중 활약이 많고 영향력이 있던 대표적 인물이다. 장신부는 공산당을 떠난 후, 등연달(鄧演達)을 따른다. 그리고 장백균(章伯鈞), 황기상(黃琪翔)등과 중국국민당 임시행동위원회, 즉 제3당을 만든다.


1948년, 장신부는 저안평(儲安平)이 만든 <관찰>에 <평화를 호소한다>는 글을 발표한다. 바로 이 '시의적절하지 못한' 평화를 호소하는 글로 인하여, 장신부의 이후 정치생명은 치명적인 타격을 입는다. 11월 15일, 홍콩의 민맹 총부는 제4차확대회의에서 일찌기 창시자중 한 명인 장신부의 맹적을 제적한다. 12월 16일, <인민일보>는 "반도 장신부의 매신투고(賣身投靠)를 통척(痛斥)한다"는 글을 싣는다.


10일후, 이미 동북해방구에 진입한 장신부의 부인이자 중국역사상 최초의 여성공산당원이며, 저명한 정치활동가인 유청양은 <인민일보>에 이혼계사(離婚啓事)를 싣는다. 제목은 "장신부는 민주를 배반하고 여호작창(與虎作倀)한다. 유청안은 엄히 질책한다." 그리고 장신부와 이후 이혼하고 일도양단한다고 선언한다. 이제 장신부는 신패명렬(身敗名裂)하고, 중반친리(衆叛親離)한 지경에 이르렀다.


신중국이 건립된 후, 장신부는 주은래의 도움으로 북경도서관에서 일한다. 1957년에는 우파분자로 된다.


1978년후에는 제5기, 제6기 전국정협의 상임위원이 된다. 


1986년 서거하니, 향년 93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