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월소장(月小粧)
고대에 '자매화(姉妹花)'가 입궁하여 같이 군왕을 모시는 사례는 적지 않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역대 군왕들은 모두 자매화를 좋아했고, 완안량(完顔亮)도 예외가 아니었다.
한 가지에서 피어난 꽃도 품성이 모두 다르고, 쌍둥이 자매의 성격도 천지차이가 있다.
당괄정가(唐括定哥)는 성격이 경박한 여자였다. 그녀는 완안량과 원래 사통하였고, 완안량이 요구하자, 자신의 남편을 죽여버리고 입궁했다.
당괄석가(唐括石哥)는 당괄정가의 여동생이나, 그녀의 성격은 훨씬 견정(堅貞)했고, 성격도 훨씬 부드러웠다. 그녀는 불행한 여자이다. 궁으로 들어가서 언니를 만나다가, 완안량의 눈에 띄어 강제로 그와 관계를 맺게 된다.
그 후, 완안량은 당괄석가의 남편인 비서감 문(文)씨(이름은 남아있지 않다)의 모친인 안도과(按都瓜)에게 이렇게 말한다: "너는 며느리를 쫓아내라. 그렇지 않으면 다른 조치를 취할 것이다." 안도과는 아주 두려워하며 아들 문모에게 탄식하며 말했다: "황상이 다른 조치를 취하겠다는 것은 바로 너를 죽이겠다는 것이 아니냐. 네가 어찌 일개 여인때문에 목숨을 걸겠느냐." 문모는 목숨을 보전하기 위하여 할 수 없이 처를 입궁하도록 했다.
당괄석가와 문모는 서로 끌어안고 통곡했다. 그들은 어릴때 정혼하고, 청매죽마였으며 서로 애정이 깊었다. 그리고 당괄석과는 언니와는 다르게 정절을 지켰다. 문모도 그녀를 아주 아꼈으며 한마음으로 사랑했다. 그녀는 이런 좋은 남자와 헤어져서 금수를 모셔야 한다는데 가슴아팠다. 그러나 방법이 없었다. 그녀는 문모를 죽게 놔둘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무거운 마음을 안고 입궁한 당괄석가는 완안량의 짐승같은 눈빛을 보자 정말 죽고 싶다는 마음까지 가진다. 더욱 두려운 것은 그녀가 임신을 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아이는 이미 몇 달이 되었다. 잔인한 완안량은 사향수로 그녀를 낙태시킨다.
진장춘(陳長春)의 <금궁사(金宮詞)>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가시신환답치건(假厮新換蹋鴟巾), 잡사무혐어비신(雜事無嫌語秘辛)
자매승은당괄씨(姉妹承恩唐括氏), 정가연소석가빈(定哥姸笑石哥顰)
이 사는 당시 민간에 유행했다. 이 사를 봐도 이들 자매화의 서로 다음 심정을 엿볼 수 있다. 이것은 총애를 많이 받고 적게 받은 것때문에 어떤 사람은 웃고 어떤 사람은 찡그린 것이 아니라, 당괄석가는 스스로 원한 것이 아니라, 억지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완안량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문모를 모욕주려고 생각한다. 그는 문모를 불러서 이렇게 묻는다: "아직 석가를 보고 싶으냐?" 문모는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할 수가 없었다. 그는 머리를 숙이며 대답한다: "미신이 어찌 감히 분수에 맞지 않는 생각을 할 수 있겠습니까" 완안량은 가가대소하며 말한다: "맞다. 네가 그러면 너에게 처를 한명 하사하겠다." 완안량은 문모가 도량이 있다고 여기고 적련아불(迪輦阿不)의 처인 택특라(擇特懶)를 그의 처로 삼게 해준다.
완안량이 여러 후궁들과 놀아나자, 당괄정가는 참지 못하고 바람을 피운다. 이전의 가노를 궁안으로 몰래 들여와서 간통한 것이다. 당괄석가도 이를 알고 있었고, 언니에게 그만두라고 권했지만, 언니는 듣지 않았다. 당괄석가는 그저 언니를 위하여 비밀을 지켜주는 수밖에 없었다.
당괄정가는 석가에게 묻는다. 남자가 필요하지 않느냐고. 필요하면 하나 데리고 들어오게 해주겠다고. 당괄석가는 눈썹을 찡그리며 고개를 젓는다. 당괄정가도 그녀를 더 이상 신경쓰지 않고 혼자서 즐길대로 즐긴다.
당괄석가의 우려는 들어맞는다. 천하에 비밀은 없다. 당괄정가의 한 시녀가 그녀를 배신하고 이 일을 완안량에게 밀고한다. 완안량은 대노하여, 그녀와 사통한 사내를 죽여버리고, 사내를 궁으로 데리고 들어온 궁녀들도 모조리 처형한다. 아마도 당괄정가에게는 아직도 약간의 애정이 남아 있어서인지 당괄정가는 죽이지 않는다.
당괄정가는 그러나 희망이 없다고 보고 스스로 목을 매어 자살한다.
당괄정가가 죽은 후, 당괄석가도 연루된다. 완안량은 당괄석가도 분명히 당괄정가와 마찬가지로 바람을 피웠을 것이라고 여긴다. 설사 그러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이 일을 알면서도 알리지 않은 혐의가 있다. 그래서 완안량은 당괄석가를 궁에서 내쫓아버린다.
며칠이 지난 후 완안량은 화가 가라앉고, 마음 속으로 당괄석가를 그리워한다. 그래서 다시 사람을 보내 그녀를 데리고 들어와서 수용(修容)에 앉힌다. 1155년에는 소의(昭儀)에 봉하고, 1156년에는 유비(柔妃)에 봉하고, 1157년에는 여비(麗妃)에 봉한다.
마음씨가 선량한 당괄석가는 진안무도하고 미녀가 무수히 많은 완안량의 후궁으로 선종(善終)을 했다. 이는 불가사의한 일이다. 아마도 좋은 일을 하면 좋은 보답을 받는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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