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여빈(呂斌)
요나라의 '일국양제'를 얘기하자면, 한지고(韓知高)라는 한인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요나라에서 가장 먼저 조정에 중용된 한인 중 한 명이다. 그의 가족은 요나라때 가장 혁혁한 한인가족이다. 그의 손자인 한덕양(韓德讓)은 심지어 한때 요나라의 실질적인 대권을 장악하기도 하였다.
한인으로 하여금 한인을 통치하게 한다. 이는 요나라의 입국초기에 만든 창거(創擧)이다. 당시 거란 경내에는 한인이 많았다. 일부분은 당말의 전란을 피해서 피난온 것이고, 읿는 거란이 약탈해서 끌고온 것이다. 한지고는 6살때, 북방으로 끌려간다. 그러나, 화가 복이 되었다. 나중에 시집갈 때 따라가는 노비로 술률평(述律平, 純欽皇后)와 함께 요나라 황궁으로 들어가고, 황제인 야율아보기의 인정을 받는다. 그리하여 고위참모가 된다. 이후 야율아보기는 그를 총지한아사사(總知漢兒司事)로 임명하여, 경내의 한인을 관리하고 예의를 제정하는 업무를 맡긴다.
그러나, 경내에 점점 늘어나는 한인과 한문화의 충격은 야율아보기가 예상치 못했던 일이었다.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지리적 환경과 '차마위가(車馬爲家)'하는 생활습속, 그리고 장성 내외의 정치, 경제와 문화의 거대한 차이는 야율아보기로 하여금 한인의 생활방식을 그대로 복제하여 적용하기 어렵게 만든다. 그리하여 그는 한 한인모사인 한연휘(韓延徽)의 건의를 받아들여, 경내에 여러 주현성보(州縣城堡, 일명 頭下軍州)를 설치하여 한인을 집중시켜서 그들의 원래 습속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한다. 두하군주는 요나라에서 특별히 설치한 일종의 행정기구이다. <신오대사>권72 <사이부룩>에는 야율아보기가 두하군주를 건립한 상황을 언급하고 있다: "그 때, 유수광(劉守光)이 포악하여, 유주, 탁주의 사람들이 거란으로 많이 도망왔다. 야율아보기는 그 틈을 타서 새내로 들어가 성읍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그 백성을 포로로 잡아, 당나라의 주현을 본받아 성을 만들고 거기에 거주하게 했다."
일찌기 당나라말기, 날로 강대해지는 거란족이 계속하여 남하하여 한족의 땅을 침범한다. 그리고 한족을 붙잡아가서 성채를 만든다. 이들 초기의 성채는 대부분 각급 군사귀족에 예속되어 있었고, 그리하여 두하군주의 초기 추형(雛形)이 된다. <요사.지리지서>에서는 두하군주의 연원을 설명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정벌하여 붙잡은 포로를 가지고 주요한 곳에 주를 만들었다. 많은 경우 옛날에 살던 곳을 따라 이름을 짓고, 사노로 삼고, 투하주(投下州)를 설치한다." 여기서 '투하주'는 바로 '두하군주를 의미한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두하군주의 관리모델이 성공한 것은 요나라가 정복한 발해국과 연운십육주에 '일국양제'를 실행할 수 있는 기초가 된다.
938년, 후진의 황제 석경당이 그의 '부황제'인 요태종 야율덕광에게 큰 선물을 바친다. 바로 연운십육주의 전답과 호구를 등기한 '도적(圖籍)'이다. 이때부터 요나라는 연운십육주에서 도적에 따라 세금을 받아가고, 정식으로 이 땅의 새 주인이 된다. 이 토지는 지역이 넓을 뿐아니라, 인구가 밀집되어 있고, 경제가 발달했으며, 교통요지, 전략요충지이다.
연운십육주는 지금의 북경, 천진, 하북과 산서북부를 포괄한다. 최북단은 북태행산, 장성으로 유목을 하는 거란족과 맞닿아 있고, 한인인구는 40만호가 넘었다. 인구총수는 요나라 핵심지역의 10만여호의 거란인을 훨씬 넘어섰던 것이다. 그리하여 한인은 요나라의 최대민족이 된다. 그리하여 어떻게 한인을 효과적으로 관리할 것인가가 요나라 통치자의 눈앞에 놓인 큰 난제였다. 이런 배경하에서, "인속이치(因俗而治)"의 정책이 나오게 된다. 연운십육주에 한인관리모델을 적용하고, 거란은 부락식옛제도를 그대로 적용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국제(國制, 요라나고유의 제도)로 거란을 다스리고, 한제(漢制)로 한인을 다스린다."(요사.백관지일)는 것이다. 요나라는 이때부터 정식으로 '일국양제'의 통치모델을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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