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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송)

송(宋)은 왜 개봉(開封)을 수도로 삼았을까?

by 중은우시 2018. 10. 16.

글: 기점문사(起點文史)


조송(趙宋)은 나라를 세우면서, 후주(後周)의 정치적 유산을 승계했고, 변량(汴梁, 開封)을 수도로 삼는다. 그러나 송태조(宋太祖) 조광윤(趙匡胤)의 마음 속에는 변량을 수도로 삼고 싶지 않았었다. 왜냐하면, 개봉은 "사전지지(四戰之地)"이고, 방어할 험준한 지형이 없어, 공격하기에는 쉬우나 방어하기는 어려운 곳이기 때문에, 군사적인 각도에서 보자면 확실히 수도로 좋은 장소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수도를 수비하기 위하여는 반드시 경사에 많은 병력을 배치해야 해서 비용이 많이 든다. 개보9년(976), 송나라가 개국한지 16년이 되지 않았을 때인데, 조광윤은 서경(西京)인 낙양(洛陽)으로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기 위하여 간다. 낙양에 머무는 동안, 가까운 신하들과 천도할 것인지의 여부를 놓고 논쟁이 벌어진다.


원래 조광윤은 낙양의 협마영(夾馬營)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낙양으로 천도하고 싶은 생각이 있었다. 제사를 마치고 나서, 낙양이 행궁에 그냥 머물며 변량으로 돌아갈 생각이 없는 듯했다. 수행했던 여러 신하들은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는 상황이 된다.


이때 철기좌우상도지휘사인 이회충(李懷忠)이 진언한다: "동경은 변거(汴渠)의 조운이 있고, 매년 강회에서 오는 미곡이 수백만곡(斛)에 이릅니다. 도성의 병사 수십만명이 모두 그것을 먹습니다. 폐하께서 이 곳에 계시면 그것들은 어디에서 가져오겠습니까. 만일 천도를 생각하신다면 신이 보기에 극히 부당합니다."


그러나 조광윤은 그의 말을 듣지 않는다. 황상의 생각을 바꾸기는 아주 어려워 보였다.


이때, 송태조의 동생인 당시 진왕(晋王) 조광의(趙光義)가 나서서 말한다: "천도는 안됩니다." 조광윤이 이렇게 말한다: "낙양으로 천도하는 것도 장기적인 계책은 못된다. 가장 좋기로는 장안으로 가는 것이다." 조광의는 머리를 조아리며 조광윤의 천도 결심을 막으려 했다. 조광윤은 다시 말한다: "내가 서천하려는 것은 다른 뜻이 있는 것이 아니라, 산하의 뛰어난 점에 의지하여 수도를 지키려는 것이다. 그래야 쓸데없는 병력도 줄일 수 있을 것이다. 주(周), 한(漢)의 사례를 따라 천하를 안정시키려는 것이다." 조광의는 이렇게 말한다: "국가를 지키는 것은 덕(德)에 있지, 험준한 것(險)에 있지 않습니다."


조광윤은 한참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조광의가 자리를 떠난 후, 좌우에게 말한다: "진왕(조광의)가 한 말도 이치에 맞는다. 이번에는 그의 말을 듣기로 하자. 단지...." 송태조는 탄식을 내뱉고는 천천히 말했다. "백년이 되지 않아 천하의 힘이 다하게 될까봐 우려된다."


조광윤이 겉으로 보면 동생 조광의의 권고를 받아들였는데, 실제로는 당시 상황에 따른 것이다. 조광윤은 고집을 부리는 제왕이 아니다. 그는 전통을 존중하면서도 현실을 받아들여서 시류를 따랐다. 남송때, 주희(朱熹)가 친구와 송태조의 개국에 관해 얘기할 때, 친구가 주희에게 묻는다: "태조가 명을 받아, 오대의 폐해를 없애고 난세를 바로잡았다." 그러자 주희가 말한다: "그렇지 않다. 단지 심한 것만 없앴다. 나머지 법령은 옛것을 그대로 따랐다. 무릇 큰 일을 하는 사람이라면 먼저 그 대강을 정하고, 나머지 사항은 그때그때 정해서 따르면 된다. 이것이 바로 영웅의 수단이다." 현재의 말로 한다면 개량보수의 방법이다.


천도의 이야기로 돌아가자면, 조광윤은 내심으로 비록 '주,한의 사례를 따르겠다'는 생각으로 장안을 수도로 삼고 싶어했지만, 그도 현실을 존중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살았던 10세기는 이미 주,한과는 시대가 달라졌다. 오랫동안의 전란으로, 장안등 북방의 도성은 일찌감치 옛날의 번화함을 잃었고, 남조때 의관남도(衣冠南渡)하면서 남방이 대거 개발된다. 중국의 경제,문화의 중심이 점점 강남으로 옮아갔다. 그러나, 군사, 정치의 중심은 여전히 북방에 남아 있었다. 남과 북에 각각 중심이 형성되어 분리되는 현상이 나타난 것이다. 만일 발달한 교통망이 남북을 이어주지 않는다면, 나방의 경제자원은 북방으로 수송해갈 수가 없다. 그렇게 되면 북방의 중요도시들은 유지하기가 어려워지게 될 것이고, 결국은 왕조의 안전까지 위협하게 될 것이다.


철로와 기차가 발명되기 전에, 수운선(水運線)이 가장 경제적이고 가장 빠른 운수네트워크였다. 다만 중국의 황하, 장강은 대체로 동서 방향으로 흐른다. 남북간에는 관통하는 수운선이 없다. 수양제가 대운하를 팠는데, 당연히 양주로 가서 미녀를 보기 위함이 아니다. 남북의 보급선을 개통시키기 위함이다.


대운하의 완성으로 남북이 관통했고, 중화제국은 비로소 긴밀한 공동체가 형성된다. 부유한 남방은 북방에 계속하여 물자를 공급해주는 대후방이 된 것이다. 운하선에 위치한 변량은 근수루대선득월(近水樓臺先得月)로, 그 지위가 갈수록 중요해졌다. 오대의 후량, 후진, 후한과 후주 정권이 모두 변량을 수도로 삼는다. 송나라는 오대를 계승해서 개봉부를 수도로 삼는다. 그것은 역사의 추세를 거스를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북송때의 변경개봉부는 조운네트워크가 낙양, 장안보다 훨씬 발달해 있었다. 변하, 혜민하(惠民河), 금수하(金水河)와 광제하(廣濟河)가 성내를 흐른다. 그리고 성밖의 하운계통과 서로 연결되어 있다. 이를 합쳐서 "조운사거(漕運四渠)"라 부른다. 섬서에서 오는 물자는 황하 - 변하 - 변량의 노선을 거친다. 채주(蔡州)의 물자는 직접 혜민하를 통하여 개봉으로 온다. 산동의 물자는 황하 - 광제하 - 변량의 노선을 거친다. 동남육로의 물자는 대운하를 거쳐 북상하여, 변수로 들어가 변량까지 운송할 수 있다. 그중 동남육로와 연결하는 변하 - 대운하는 북송의 가장 중요한 조운선이다. 송나라사람들 자신의 말을 빌리자면, "오로지 변하가 중국을 가로질러, 먼저 대하를 잇고, 조운으로 강과 호수를 이어서, 남해의 이로움을 모두 얻었다. 그리하여 천하의 재물 절반을 얻는다. 산과 들판의 백가지 물건이 이 길로 모조리 들어왔다." 그리하여 북송이 세워진지 얼마되지 않아. "발운하(發運河)"라는 기구가 설립된다. 동남육로의 물자수숭을 책임지는 기구이다.


그렇다면, 매년 동남육로에서 대운하를 통해 변량으로 운송되는 물자는 어느 정도였을까? 심괄의 <몽계필담>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발운하에서 매년 경사로 보내는 쌀은 육백만석이다. 회남 백삼삽만석; 강남동로 구십구만천백석, 강남서로 일백이십만팔천구백석; 형호남로 육십오만석; 형호북로 삼십오만석; 양절로 일백오십만석." 관청이 운송하는 양심만 매년 육백만석이었다. 많을 때는 팔백만석에 달하기도 했다. 이는 육칠십만명이 1년간 먹을 수 있는 양이다.


조량(漕糧)외에 변하-대운하 운수선은 매년 남방에서 대량의 다른 물자들도 운송해서 정부에서 쓰도록 했다. 송인종 강정원년(1040)에 지제고 부필의 보고서를 보면, "조정에서 쓰는 것 예를 들어 군식(軍食), 폐금(幣錦), 차(茶), 염(鹽), 천화(泉貨), 금(金), 동(銅), 연(鉛), 은(銀), 그리고 우모(羽毛), 교(膠), 칠(漆)이 모두 구도(九道, 동남육로에 복건도, 광남동도, 광남서도를 합친 것을 의미함)에서 나온다. 조정이 천하를 편안히 다스리며 부족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이 구도에서 공급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변하-대운하는 북송의 생명선이라고 부르더라도 전혀 과장된 것이 아니다. 실제로 송나라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했다. 희녕5년(1072), 북송의 저명한 경제학자 장방평(張方平)은 이렇게 말한다: "금일의 형세는 국가는 병사에 의지하여 서고, 병사는 먹거리를 목숨으로 여기고, 먹거리는 조운을 기본으로 하여 공급되며, 조운은 하거(河渠)를 위주로 한다...변하가 없으면, 사람이 모이지 않는다. 변하는 경사에 있어서 건국의 기본이다. 단순히 수리(水利)를 얻는 강물과 비교할 것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