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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송)

애산해전(崖山海戰): 가장 장열한 망국지전, 그리고 3가지 수수께끼.

by 중은우시 2018. 8. 5.

글: 예비역공군상위(豫備役空軍上尉)





남송 상흥2년(1279년) 3월 19일, 원나라군대가 남송군대를 대파한다. 좌승상 육수부(陸秀夫)는 등에 말제(末帝) 조병(趙昺)을 업고 바다에 뛰어들어 자살한다. 양태비(楊太妃)와 수십만군민도 바다로 뛰어들어 순국한다. 남송은 이렇게 멸망한다.


이 전투는 중원문명이 앞날을 결정짓는 전쟁이었고, 후세에 이 전쟁에 대한 논쟁이 아주 많다. 그중 3가지 의문은 지금까지도 분명히 설명되지 않는다.


첫째, 남송은 왜 겨우 남은 모든 군대를 애산이라는 곳에 집중시켰을까라는 것이다. 역대사가의 고증에 따르면, 송군은 일찌기 애산 이남의 담강해역부근에 병력을 주둔시키고 있었다. 이치대로라면 이들 도서에서 원군에 저항하는 것이 맞다. 그러나 그들은 거꾸로 거슬러 올라 애산으로 온다. 원군이 추격하는 방향과는 반대였다. 이는 완전히 역행한 셈이다. 일부 사람들은 이때 남송의 장수들은 전쟁의 최후에 대하여 이미 잘 알고 있었고, 송군은 몽골인을 당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고향을 그리는 심정에서 육지로 돌아가서 방어를 진행하는 것으로 선택하였다고 한다.


둘째, 남송의 군대는 이미 근 천척의 전선(戰船)을 가지고 있었다. 장병의 수도 20만이 넘었다. 몽골군대는 겨우 2만이었다. 전선도 400척에 불과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이것은 해전이고, 몽골인이 승리한 것은 기병의 우세에 의지한 것인데, 해전에서는 기병의 우세를 발휘할 수 없다. 송군은 오히려 우세를 잡을 수 있었다. 그런데 최종적으로 참패한다.


필자가 보기에 이 문제는 주로 군대의 인원구성과 관련이 있다. 이번 해전에서 송나라의 20만사병은 주로 각지의 근왕부대로 구성되어 있다. 지나치게 혼합부대여서 전투시 통일성이 결핍되어 있었다. 더욱 중요한 것은 남송이 몽골군에게 패배한 후, 절강에서 복건까지 도망치고, 다시 광동으로 도망치면서 부대는 대부분 궤멸되고 패배한 바 있다. 그러다보니 사기가 아주 낮았다. 그리고 몽골인들에게 두려움이 있었다. 그래서 전투시에 자신감이 없었다. 반대로 몽골군대는 2만여명중에서 몽골인은 1000명가량이고, 나머지는 한인, 금인, 거란인, 서하인등 여러 종족으로 구성되어 있었지만, 계속 추격전을 벌이면서 동질감을 강화했고, 사기도 높았으며, 전투력도 강했다. 그래서 결코 약하게 볼 수 없었다.


셋째, 남송군대의 장수인 장세걸(張世傑)은 지휘에서 연이어 실수를 범한다. 남송군대는 이때 보급을 모조리 해남도에 의존하고 있었다. 자연히 중병을 파견하여 출해구(出海口)를 지켜야 했다. 그러나 장세걸은 모든 전선을 항구에 집중시켰고, 협소한 해면에서 전투하는 것은 수량이 방대한 남송 수군에 불리할 수밖에 없었다. 반대로 몽골에게는 기회를 주게 된다.


그렇다면 애산해전의 경과는 어떠했을까? 상흥2년 정월부터 얘기해야 한다. 몽골대군은 투항한 장수 장홍범(張弘範)의 지휘하에 애산에 도착한다. 삼면에서 이곳을 수비하는 남송수군을 포위한다. 기세등등한 적군을 보면서 장세걸은 파부침주(破釜沉舟)의 결심을 한다. 사병들에게 궁전, 건물등 지상건축물을 모조리 불태워버리도록 명령한다. 몽골인들에게는 풀하나 나무하나 남겨주지 않겠다는 것이다. 더욱 의외인 것은 그는 적벽대전때 조군이 사용한 전법을 쓴다. 밧줄로 천척이 넘는 배를 묶어서 '연환선'으로 만든다. 1자형으로 배치한다. 거기에는 말제 조병의 '용주'가 정중앙에 위치하고 있었다.


다음 달, 장홍범은 송군전선에 맹공을 가한다. 전투전에 어떤 몽골장군은 화공을 건의한다. 그러나 장홍범은 거절한다. 이유는 화공은 송군의 진형을 쉽게 흐트릴 수 있고 그렇게 되면 혼란을 틈타서 도망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하여 남송선대는 '화공'으로 불에탈 운명을 피해갈 수 있었다. 초칠일, 장홍범은 대군을 4부대로 나누어, 송군의 동, 남, 북의 3개 방향에서 각자 지키도록 하고, 장홍범은 친히 1군을 이끌고 송군과 정면대결을 벌인다. 밀물을 이용하여 북면의 군대가 먼저 송군에 돌진을 감행하나 실패하고 할 수 없이 물러난다.


정오가 되었을 때, 장홍범이 지휘하는 수군이 정면에서 송군을 공격한다. 명금(鳴金)을 공격신호로 삼는다. 몽골사병은 방패를 들고 몸을 숙여 갑판에 엎드린다. 맹렬한 화살을 맞으며 송나라 전선에 접근한다. 선박이 접촉한 후, 몽골군은 명금을 울리며 교전을 시작한다. 일시에 연이어 7척의 송선을 격파한다. 그리고 남송선대의 중앙을 향하여 돌진한다. 장세걸은 상황이 좋지 않다고 보고 즉시 사람을 보내어 밧줄을 끊는다. 그리고 정예병을 뽑아서 11척의 배를 이끌고 포위망을 돌파한다.


포위망돌파에 성공한 후, 장세걸은 좌승상 육수부가 말제를 업고 바다에 몸을 던져 순국했다는 비보를 듣는다. 원래 새로 양태비를 받들고 조씨자손을 옹립하여 즉위시켜 나중에 복국할 수 있도록 하려 했다. 그러나, 양태후는 황제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자 바로 바다에 몸을 던진다. 장세걸은 비통하게 그녀를 해변에 장례지낸다. 이때부터 복국의 생각을 철저히 버린다. 얼마 후, 장세걸은 큰 비바람 속에서 평장산 아래에서 익사한다(지금의 광동성 해릉도)


이번 해전에서 남송군민은 절대로 투항하지 않는다는 항쟁정신을 보여준다. 비록 막다른 골목까지 몰렸지만, 한 명도 퇴각하지 않고, 혈육으로 애산을 지키고 대송왕조를 보위했다. 패전후, 모두 바다에 몸을 던진다. 공전절후의 역사비극이 상연된 것이다. 이 전투는 대송왕조와 원왕조의 마지막 혈전이다. 그리고 몽골인의 송나라 강역내에서의 마지막 대형전투이다. 애산해전이후, 당시의 정치국면은 철저히 바뀐다. 몽골인이 건립한 원왕조가 중국을 통일한 것이다. 중국의 역사는 새로운 시기로 들어섰다. 다민족국가를 형성하는 동시에, 유목문명이 전통적인 농경문명을 대체했다. 전통적인 화하문화는 거의 치명적인 타격을 입는다. 엄중하게 불평등한 민족정책으로 한족백성은 도탄에 빠질 수 밖에 없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