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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건륭제)

건륭제의 후계자 선정은 왜 그리 힘들었을까?

by 중은우시 2017. 10. 18.

글: 역사산인(歷史山人)


건륭(乾隆)은 청나라 입관(入關, 산해관을 들어와 북경을 수도로 삼은 일)이후 4번째 황제이고, 88세까지 살았다. 동시에 그는 중국봉건제왕중 장수의 기록을 세운다. 특히 그의 일생은 아주 순조로와서 그다지 큰 재난도 없었다. 그와 조부 강희(康熙) 부친 옹정(雍正)의 3조를 합쳐서 "강옹건성세(康雍乾盛世)" 혹은 "강건성세(康乾盛世)"라 부른다. 건륭은 만년에 스스로를 "십전노인(十全老人)"이라 칭했고, 동시에 그는 여러가지 면에서 조부인 강희를 모방했다. 예를 들어 육하강남(六下江南)이라든지 심지어 전쟁때도 여러번 어가친정(御駕親征)한다. 그러나 슬픈 일이라면 건륭의 만년에 청왕조는 위기가 사방에서 밀려오고 아들 가경(嘉慶)에게 넘겨줄 수 있었던 것은 사면초가의 엉망진창이 다 되어버린 나라였다는 것이다.


건륭과 강희간에 비교적 닮은 점이라면 자식이 많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조부처럼 일찌감치 공개적으로 태자를 세우지 않았다. 그리고 계속 비밀리에 황위계승자를 배양했다. 동시에 그는 강희때의 "구자탈적(九子奪嫡, 아홉명의 아들이 서로 후계자가 되려고 다투다)"이 가져온 내분을 보고 교훈을 얻었다. 그래서 황위계승자 다툼은 격렬하게 일어나지 않았다. 건륭은 일생동안 17명의 아들을 두었다. 그중 3명은 요절한다. 실제로 성년이 된 사람은 십여명이다. 건륭원년 이미 후계자선택이 시작된다. 다만 이 십전노인의 아들들은 부친처럼 명이 좋지 못했다. 비록 여러 명이 이십여세까지 살았지만, 많은 아들들이 일찌기 세상을 떠난다(강희제때 구자탈적이 격렬했던 원인은 당시에 성년이 된 십여명의 황자들은 기본적으로 모두 장수했고, 강희가 죽을 때 사십을 넘긴 황자도 여러명이 있었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황자 영황(永璜)을 예로 들어 설명하자면, 건륭13년에 이미 21살이었다. 다만 당시 건륭이 가장 사랑하던 효현순황후(孝賢純皇后)가 사망하였는데, 대아거(大阿哥) 영황은 셋째동생 영장(永璋)과 그다지 상심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아 건륭의 질책을 받는다. 그리하여 후계자 자리를 다툴 자격을 잃는다. 이 일로 우울증에 빠진 대아거 영황은 3년도 되지 않아 사망한다. 1750년 영황이 사망하자, 건륭제는 크게 후회한다. 그리고 조서를 내려 그를 정친왕(定親王)에 추봉한다.


기실 건륭이 후계자를 세우는 과정은 난감하고 슬픈 일이 많았다. 마치 저주를 받은 것같았다. 예를 들어 황차자(皇次子) 영련(永璉)은 효현황후가 낳은 적장자이다. 건륭의 총애를 받았다. 건륭은 그를 "총명하고 귀중하며, 기우가 비범하다"고 칭찬했다. 옹정제도 친히 그의 이름을 내린다. 건륭이 등극한 첫해에 입저밀조(立儲密詔)를 써서 건청궁의 정대광명(正大光明) 편액 뒤에 넣어둔다. 그러나 건륭3년 이 총애를 받던 황자는 병으로 사망한다. 나이 겨우 8살이었다.


우리가 아는 것으로는 황오자(皇五子) 영기(永琪)가 건륭제의 총애를 많이 받았던 아들 중 하나이다. 이치대로라면 건륭은 그를 후계자로 삼았어야 한다. 그러나 그의 뜻대로 되지 않았다.


오아거(五阿哥)의 평생내력부터 얘기해보면 당시 건륭은 황차자가 요절한 후 후계자를 세울 생각을 전혀 하지 않는다. 건륭25년이후 스스로 조금씩 후계자를 세울 생각을 하게 되는데, 특히 대아거 영황의 죽음은 그를 여러해동안 상심하게 만든다.


건륭25년 당시 영기의 나이는 19살이었다. 동시에 여러 황자들 중에서 가장 출중했다. 말도 잘 타고 활도 잘 쏘며, 글도 잘 읽었다. 총명하기 그지없었다. 용모도 뛰어났다. 그래서 건륭은 그를 태자로 삼고자 한다. 그후 3,4년동안 건륭은 영기를 지도하고 중임을 맡긴다. 건륭30년 건륭이 정식으로 영기를 태자에 봉하려 할 때, 누가 알았으려 영기가 병에 걸려 사망하고 만다. 이 일은 건륭을 더욱 상심하게 만든다. 영기가 죽은 후에 "단(端)"이라는 시호를 내린다. 확실히 마음아픈 일이다.


그 이후 여러 해동안 마치 저주에 걸린 것처럼 건륭이 후계자로 삼으려고만 하면 그 황자는 죽어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건륭은 오랫동안 후계자를 세울 생각을 하지 못하게 된다. 건륭54년이후에 비로소 황십삼자(皇十三子) 영염(永琰)을 후계자로 세운다. 그리고 건륭60년이 되어서야 그를 황태자로 선포한다. 아마도 건륭은 마음 속으로 겁났을지도 모른다. 자기가 죽을 때가 되어서 다시 후계자를 임명해야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러나 이번의 황십삼자는 명이 질겼다. 그는 앞의 아거들의 전철을 밟지 않았고, 60세까지 산다. 1820년 가경25년에 사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