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건륭제)

옹정제(雍正帝)는 왜 연갱요(年羹堯)를 죽였을까?

중은우시 2018. 6. 19. 12:19

글: 진휘(陳輝)


옹정은 왜 연갱요를 죽였을까? 지금까지 역사학자들은 여러가지 설이 분분하다. 역사학 박사인 정소유(鄭小悠)가 최근에 출간한 <연갱요의 죽음>(한당양광.산서인민출판사출판)에서는 여러가지 상세한 내용을 담고 있다. 예를 들어, 연갱요는 한번도 옹정의 적계(嫡係)였던 적이 없고, 그들은 거의 얼굴을 마주친 적이 없다든지, 연갱요의 여동생이 비록 입궁했지만, 오누이간에 거의 연락이 없었다든지, 연갱요의 EQ는 매우 낮았다든지 등등


고관이 된다고 반드시 EQ가 높은 것은 아니다.


연갱요는 관료사회에서 그렇게 잘나갔고, 그렇게 높은 지위에까지 올랐고, 윗사람들과 그렇게 많은 관계를 맺었는데, 이 사람의 EQ가 낮다면 어떻게 자신의 상사들과의 관계를 그렇게 잘 처리했을까라는 의심을 품을 수 있다.


기실 아주 간단하다. 연갱요는 45살이전에 아주 순조로웠다. 옹정제를 포함해서 모두 다른 사람들이 그를 자기쪽으로 끌어들인 것이다. 그래서 그가 자기보다 지위가 높은 사람에게 잘보일 필요는 별로 없었다. 그는 완전히 자신의 능력으로 한걸음 한걸음 올라간 것이다. 옹정제가 그와 직접 대면했을 때, 연갱요는 이미 사십여세였다. 옹정제는 처음에 그를 무척이나 쫓아다녔다. 연애에 빠진 사람보다도 더 심했다. 그래서 연갱요는 EQ가 필요하지 않았다. 옹정제가 안면을 바꿀 줄 몰랐다든지 그런 상황이 아닌 것이다.


40여세의 사람이 다시 EQ를 올리려고 해도 너무 늦었다. 역사상 절대다수의 공을 세운 인물은 모두 EQ가 비교적 낮은 편이다. 일생동안 조용하게 살았던 사람은 통상적으로 EQ가 높고, 인간관계를 잘 처리한다. 그러나 공로를 세우거나 운이 좋아서 높은 지위에 오른 사람은 대체로 EQ가 다른 사람들보다 낮은 편이다.


옹정제는 왜 연갱요를 북경으로 불러들이지 않았고, 그에게 재상의 자리를 맡기지 않았을까? 제도상, 관례상 당연히 가능했다. 그러나 연갱요의 이런 EQ로는 북경에서 다른 사람들과 어울릴 수가 없었다.


옹정은 왜 연갱요를 중용했을까?


옹정제에게는 하나의 특징이 있다. 그는 대신의 권력을 억제하는 것을 중시했다고 원래 연구해왔지만, 필자의 느낌으로는 어떤 측면에서는 방권(放權) 즉 권력을 아랫사람에게 나눠주었다. 그 자신은 뭐든지 관여하는 것을 좋아했고, 그가 신임하는 사람이 뭐든지 관여하는 것도 좋아했다. 그가 이렇게 했는데도 권신이 나타나지 않은 것은 좀 이상한 일이다.


연갱요와 같은 권력은 나중에 악이태(鄂爾泰)도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었다. 몇개의 성을 그가 완전히 통제했다. 뭐든지 그가 결정했다. 옹정제는 완전히 안심하고 한개의 성 혹은 몇 개의 성을 몇 사람에게 넘겨주었고, 아주 신임한다. 그는 도독과 순무를 비교적 신임했고, 권한을 많이 넘겨주었다. 신변에 윤상(允祥) 외에 비교적 가까웠던 사람은 장정옥(張廷玉)같은 사람이 있다.


한편으로 옹정제는 종실의 여러 왕을 가장 억누른 황제이다. 다른 한편으로 종실의 여러 왕을 가장 잘 쓴 황제이기도 하다. 그가 재위하고 있을 때, 직접 정치에 참가한 친왕이 가장 많았다. 강희제때는 아주 적었다. 특히 행정에는 간여하지 않았다. 옹정은 몇몇 동생으로 하여금 호부, 예부등을 관장하게 하고 직접 행정관리에 참여하도록 했다.


옹정제와 연갱요는 몇번 만나지 못했다.


후욱동(侯旭東) 선생은 <총: 신임형군신관계와 서한역사의 전개>에서 황제는 잘 아는 사람들 사이에서 생활하기를 원한다고 했다.


황제에 있어서, 곁에는 신하 아니면 백성이다. 그가 믿지 못하는 사람이 있으면, 자신이 불편하다. 잘 아는 사람이 그를 대신해서 무언가를 집행하면 안심이 된다. 옹정제는 연갱요를 자신이 잘아는 사람으로 만들고 싶었다. 그러나 연갱요는 옹정제를 잘 몰랐다. 그들은 몇번 만난 적이 없고, 완전히 서신으로 교류했다.


강희말기, 연갱요는 사천순무로 나간 후 강희제가 죽을 때까지 딱 1번 북경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주로 강희제를 만났고, 옹정제는 만나지 않았다. 옹정이 등극할 때, 그는 한번 돌아온 적이 있고, 각종 의식에 참가했고, 군사업무를 보고했다. 개인적인 교류는 아주 적었다. 교류할 시간도 없었다. 세번째는 승전을 거둔 후 북경으로 돌아와서이다.


이를 보면, 옹정제와 연갱요는 정말 서로 잘 모르는 사이였다. 옹정제는 그를 기인(旗人)으로 여겨 자신이 잘아는 사람들 서클내에 있다고 여겼다. 그러나 그들 둘은 잘아는 사람관계를 배양하지 못했다. 옹정제가 약간 적극적이었다면, 연갱요는 약간 수동적인 관계였다.


연갱요가 추천한 관리는 옹정제가 다 들어주었다.


옹정제는 친왕으로 오래 있었다. 이때는 부귀한인(富貴閑人)의 모습으로 나타났다. 가급적 대신들과 교류를 하지 않았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이때는 장정옥도 몰랐다. 아는 사람이 아주 적었다. 등극한 후에는 조정대신을 알 수 있도록 매개역할을 할 사람이 필요했다. 누구를 쓰고 누구를 쓰지 말아야할지. 누가 능력이 있고 누가 능력이 없는지를 알려줄 사람이. 연갱요는 다행히 문무대신들과 모두 잘 알았다. 과거출신이면서 군대를 이끌고 있기 때문이다. 한인들과도 얘기가 통했고, 만주족과도 밀접하게 교류를 했다. 그래서 아주 좋은 매개였다. 게다가 둘은 처남매부간이다. 옹정으로서는 아주 중요한 사람이었다.


연갱요와 옹정제는 사람을 보는 눈이 일치했다. 악이태는 바로 연갱요가 옹정제에게 추천해준 사람이다. 나중에 아주 좋은 관계로 발전하고, 연속 승진한다. 옹정제는 그를 몰랐었다. 잘 모르는 사람이 이렇게 중요한 직위에 오르다니, 분명히 중간사람이 큰 역할을 한 것이다. 그리고 사이직(史貽直)도 있다. 그들보다는 나이가 많이 어렸기 때문에 같이 놀지는 않았다. 그래서 나이가 조금 더 많은 사람들보다 발전이 좀 느렸다. 강희말기, 그는 계속 승진하지 못하고 있었다. 나중에 연갱요가 옹정제에게 그를 추천한다. 일거에 한림원의 보통직위에서 예부시랑, 호부시랑으로 올라간다. 당시 사이직은 아직 마흔이 되지 않았다. 그는 주로 그의 과거시험동기들을 추천해주었는데, 강희38년 거인과 강희39년 진사이다. 또한 서북지구의 부하들이다.


연갱요의 승진이 빨랐던 것은 옹정제때문이 아니다.


청나라의 승진에서 가장 좋은 것은 연갱요가 걸었던 길이다. 한림원에서 나가는 것이다. 이것도 시기를 잘 보아야 한다. 앞에 있는 사람이 죽지 않으면 나갈 수가 없다. 연갱요는 좋은 기회를 맞았고, 운도 좋았다. 앞에 사람이 없었다. 계속 빈자리였다. 그래서 그는 승진이 빨랐다. 몇년만에 한림원에서 내각학사로까지 올라간다.


연갱요와 같이 진사가 되었던 장정옥은 외조부일가가 조정내에서 높은 지위를 가지고 있었다. 모친집안, 부친집안이 모두 세력가이다. 장정옥은 만주어도 아주 잘했다. 한림원번역시험에서 1등을 한다. 연갱요는 겨우겨우 통과되는 수준이었다. 그리고 장정옥은 아주 잘생겼다. 그의 조건이 연갱요보다 훨씬 좋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의 승진은 늦었다.


연갱요는 사천순무를 만는데, 이는 분명히 강희제가 특별히 임명한 것이다. 일반적으로 한림원에서 이때 외직으로 나가는 일은 드물었다. 왜냐하면 실무경험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계속 북경에서 서류업무만 해왔다.


그래서, 강희제는 그의 능력을 아주 신임했다. 당시 사천의 상황은 아주 특수했다. 명청교체기에 많이 파괴되어, 연갱요같이 젊고, 경력이 없는 사람을 순무로 앉히는 것은 연갱요가 한림원에 있는 동안 특수한 재능을 발휘했다고 봐야 한다.


한림원은 황제와 직접 만난다. 비록 직위가 높지는 않지만, 남서방과 상서방에서 일을 한다. 남서방은 시문을 초안하고 의례성 문서를 초안한다; 상서방은 황자의 스승이 된다. 직접 황제와 알 수 있는 자리이다. 한림원의 아문은 특별히 크고, 직급이 높으며 편제도 많다. 그리고 잘못을 저지르는 경우는 적다.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일을 하는 곳은 아니기 때문에 무슨 잘못을 저지를 경우는 적은 것이다.


연갱요는 여동생과 잘 알지 못했다.


연갱요의 여동생인 연귀비(年貴妃)는 옹정제가 좋아한 여인이다. 그러나 연갱요는 여동생과 그다지 잘 알지 못했다. 그들은 나이차이가 너무 많다. 


연갱요는 옹정제보다 1살이 어리다. 옹정제는 연귀비보다 15,6살이 많다. 그리고 연갱요는 서출이고, 연귀비도 서출이다. 두 사람의 모친은 서로 다를 것이다. 게다가 여자가 비교적 일찍 출가해서 서로 교류가 그다지 많지 못했을 것이다.


연귀비는 왕부에 있을 때 오빠와 통신을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서로 잘 알지 못한다면 서신왕래도 그다지 많지는 않았을 것이다. 궁에 들어간 후에 연귀비는 나중에 연갱요가 처벌받은 것에 영향을 전혀 받지 않았다. 그녀는 조심성이 많았다. 소위 "가서불발대장군(家書不發大將軍)". 그들 둘은 서신왕래가 없었다. 그래서 연갱요가 처벌받은 후에도 그녀는 영향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니 궁중비밀을 그에게 전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오누이간은 가족관계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교류가 반드시 많은 것은 아니다.


연갱요는 왜 반드시 죽어야 했을까


옹정제가 연갱요에게 내린 92가지 죄를 보면 그중 절대다수는 언급할 가치조차 없다. 예를 들어, 노란색 옷을 입었다든지, 깃발을 잘못 들었다든지같은 것이다. 이것들은 목격증인이 있으니 아마도 사실일 것이다. 그러나 처벌해도 그만, 안해도 그만인 일들이다.


옹정제가 반드시 연갱요를 죽여야 했던 것은 그가 황실구성원과 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죽이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옹정제는 만일 어린아들 복혜(福慧, 혹은 福惠, 연귀비의 아들)가 황위를 승계하면, 연갱요가 무서워질 것이라고 봤다. 연갱요가 아직 나이도 많지 않으면서, 명망은 그렇게 높기 때문이다. 당연히 이는 이 책의 추측이다.